15화
주먹이 탈론 플레임의 부리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앙!
피륙으로 된 생물체끼리 부딪쳤는데, 흡사 폭발음과 비슷한 소리가 산자락을 흔들었다.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가시 갑피의 내구도가…….]
손에서 어깨에 이르기까지.
탈론 플레임과의 충돌에 대비해서 전개한 가시 갑피가 모조리 박살 나 버렸다.
“씁.”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욱신거리는 어깨.
탈론 플레임을 후려친 팔이 반대로 튕겨나더니 아래로 축 처졌다.
어깨가 덜렁거리는 게, 원위치를 벗어나서 탈골된 모양이다.
그나저나.
“아슬아슬했군.”
나는 지면을 흘겨보았다.
바닥에는 탈론 플레임이 쓰러진 채,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끼루룩…….”
충격이 꽤 큰 듯했다.
탈론 플레임이 무서운 건 경이적인 속도와 공격력, 그리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점이다.
그 대신 맷집이 절망적인 수준으로 약했다.
정확한 타이밍과 힘.
두 가지 요소만 충족하면 누구나 사냥할 수 있단 말이지.
탈론 플레임은 주먹과 충돌했을 때 받은 대미지가 컸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개를 떨어트렸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보스 몬스터 - 탈론 플레임을 사냥했습니다.]
[뛰어난 업적을 세웠습니다. 유진호 플레이어의 이름이 탑에 기록됩니다.]
“저, 정말로 탈론 플레임을 사냥했어.”
“내가 뭘 본 거지?”
경악으로 물든 화랑 유망주들의 목소리.
뭘, 이런 걸 가지고 놀라기는.
왼손으로 탈론 플레임의 사체를 어루만졌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
탈론 플레임의 깃털은 방어구 제작 재료로 각광받았다.
‘이제는 제 아침 식사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포식]을 사용했다.
[탈론 플레임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정수 등급: 일반]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민첩 + 5]
[스킬 - 독수리의 눈이 추가됩니다.]
[독수리의 눈]
등급: ★★
분류: 액티브
시야에 들어온 대상의 강‧약을 파악한다.
*강한 상대 - [붉은색]
*동등한 상대 - [파란색]
*약한 상대 - [노란색]
“오.”
짧은 감탄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속도와 관련된 정수를 얻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보다 훨씬 좋은 스킬이 생성되었다.
대상의 능력을 간파하는 정수라.
간파 계열 스킬은 탑에서도 상위 랭크로 분류된다.
[독수리의 눈] 스킬의 효력은 제대로 된 ‘간파’라고 부르긴 모자란다만.
탑을 오르면서 관련 정수를 흡수하다 보면 시너지 효과로 더욱 강화시킬 수 있을 거다.
정수를 포식하자, 탈골되었던 뼈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팔이 아직 저릿저릿했지만,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이 새대가리를 이렇게 빨리 사냥할 줄이야.’
탈론 플레임의 활동 영역은 에미리트산 전역이다.
박종원을 포함한 화랑 유망주들과 전투를 벌이지 않았더라면 탈론 플레임의 관심을 끌기 어려웠을 거다.
마법이 빚어낸 폭음.
내 [포효] 소리.
차가운 금속음.
전투 중에 벌어진 여러 소리가 산자락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포식자의 관심을 끌기에 딱 좋은 상황.
화랑 유망주 팀의 헛짓거리가 날 도운 셈이 되었다.
이것도 인연이겠다, 조금 더 협조해 주면 좋겠는데.
“갈 때는 가더라도, 인사 정도는 해야지.”
나는 몸을 돌렸다.
등 뒤로, 발소리를 죽인 채 전장을 벗어나던 화랑 유망주들이 움찔거렸다.
드드드!
[날카로운 손톱]이 섬뜩한 빛을 흩뿌렸다.
하얗게 질린 화랑 유망주들.
마지막까지 분전했던 박종원조차, 굳어 버린 얼굴로 내 손톱을 바라보았다.
난 히죽 웃었다.
“살려는 드릴게.”
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통행료를 내야 한단다.
* * *
평화적인 협상을 나눈 끝에, 화랑 유망주들한테서 중급 포션 5개를 얻어 냈다.
“잘 가고, 다음에 또 보자.”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가는 화랑 유망주들을 보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고개도 안 돌리고 하산하는 유망주들.
한시라도 빨리 나한테서 멀어지고 싶은 모양이다.
이렇게 포션을 얻을 줄은 몰랐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찰랑이는 붉은 액체를 바라봤다.
포션은 등급에 따라 회복 속도 및 수준이 다르다.
중급이면 팔이나 다리가 잘려도 다시 붙일 수 있는 수준.
시간이 조금 필요하지만 말이야.
포션 다섯 개면 위험한 상황을 대비한 보험으로 충분했다.
‘안 써도 팔면 그만이니까.’
중급 포션을 현금으로 치환하면 약 5천만 원.
회귀 전의 나라면 모를까, 2025년을 살아가고 있는 나한테는 엄청나게 큰돈이다.
이왕이면 최대한 아껴 두고 바깥 세계에서 제값에 팔아야지!
중급 포션을 헌납하는 중에, 화랑 유망주 하나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당신은 화랑 길드의 보복이 안 두렵습니까?”
“응. 가서 보고해. 다른 플레이어한테 포션을 뜯겼다고.”
으드득.
말을 꺼낸 화랑 유망주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이를 갈았다.
당한 놈이 등신이지.
난 코웃음을 쳤다.
화랑에 말하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유망주는 어디까지나 ‘기대치’가 있는 플레이어다.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유력 길드의 지원도 안 받은 플레이어한테 제압당해서 포션을 뜯겼다?
그걸 보고하는 즉시 화랑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아니면 장비를 모두 반납하고 길드의 허드렛일만 주야장천 하면서 투자비를 갚겠지.
이 소식이 화랑 길드에 들어갔을 때, 누가 더 잃을 게 많을지는 자명했다.
참. 레벨도 올랐겠다, 스텟 분배해야지.
“상태 창.”
[플레이어 - 유진호]
나이: 23
레벨: 4 → 13 / 종족: 인간
등급: 언랭크 / 직업: 없음
능력: 포식
*능력치
근력: 46.6 → 63.2(+15)
민첩: 40.7 → 65.8(+12)
체력: 59.7 → 70.3
맷집: 60.2 → 77.9
마력: 94.5 → 99.1
*보너스 스텟: 5
[능력 - 포식]
생명이나 사물에 깃든 정수를 포식합니다.
*스킬
용의 심장[★★★★★]
괴력[★★★]
냉혈[★★★]
독수리의 눈[★★]
가시 갑피[★★]
└ 갑피[★] + 가시[★]
포효[★★]
산성 피[★★]
날카로운 손톱[★]
용해[★]
민첩한 뒷발[★]
*성좌
대지모신의 가호 - 랭크 1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상태 창을 바라봤다.
기재된 정보만 놓고 보면 튜토리얼 참가자가 아니라 탑 저층에서 닳고 닳은 플레이어 수준이었다.
이야, 미래의 지식을 안다는 건, 정말 대단하구먼.
[포식]으로 정수를 차곡차곡 쌓은 덕에 모든 능력치가 50을 넘겼다.
거기에, [용의 심장]의 효과로 포식을 사용할 때마다 마력 스텟이 추가로 쌓였다.
당분간은 스킬을 아무리 사용해도 마나가 부족할 일은 없겠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꾸우욱!
손에 힘을 꽉 쥐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탑 이면에 숨어 있는 진정한 적.
고신족들을 상대하려면 더 빠르게 강해져야 한다.
탑에 숨겨진 비밀들을 독식하고.
[포식]으로 괴물의 정수를 모조리 집어삼켜야만 고신족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다시금 전의를 불태운 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목각 인형.
기초 수련장에서 얻은 보상이다.
연이어 접전을 치르는 동안, 어느새 12시간이 지났는지 재사용이 가능했다.
이런 건 꼭 챙겨야지.
오른손으로 인형의 목덜미에 달린 버튼을 꾹 눌렀다.
[수련용 목각 인형을 작동합니다.]
10센티 크기의 인형이 사람만큼 커졌다.
이젠 인형이 커지는 것도 익숙해졌다.
쭉 늘어난 손톱으로 내 얼굴을 복사한 인형의 목을 잘라냈다.
[포식을 사용합니다.]
[원시종 - 티라노사우루스의 정수를 포식했습니다.]
[정수 등급: 전설]
[포식한 정수: 21.3% → 23.5%]
[대상은 생물체가 아닙니다. 포식으로 체력이나 마나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캬, 운이 따라 줬다.
현재까지 포식한 정수는 11종.
목각 인형은 그중에서 가장 얻고 싶은 정수를 복사했다.
늘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목각 인형을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는 두 정수도 완벽하게 수집할 수 있겠지.
하아암-.
한창 의욕을 불태우고 있을 때, 졸음기가 가득한 하품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한숨도 안 잤구나.’
튜토리얼 스테이지에 들어온 후로 제대로 된 휴식 시간을 한 번도 가지지 못했다.
[대지모신의 가호]나 [포식]으로도 피로를 완전히 씻어 내지는 못했다.
회귀 전에는 몇 날 며칠을 움직여도 잠이 안 왔는데.
바벨탑에 진입하니, 나도 모르게 그 기억대로 움직여 버렸다.
‘조금 쉬어야겠어.’
휴식을 취하는 것도 전투의 연장이다.
나는 몸을 돌려서 붉은 동굴로 다시 들어갔다.
에미리트산은 암석 지대로 되어 있어서 나무가 거의 없다.
잠을 자는 동안 괴물의 시야에 훤히 노출될 게 뻔했다.
[가시 갑피를 사용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갑피를 전신에 둘러놓았다.
예전 생각이 나는군.
긴장을 유지한 채로 자는 게 얼마 만인지.
작은 소리만 들려도 곧장 깰 수 있을 정도로 신경을 가다듬은 채, 슬며시 눈을 감았다.
* * *
으음, 나는 짧게 신음을 흘렸다.
머리를 뿌옇게 만들던 피로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다행히도 잠을 자는 동안에는 별일이 없었다.
신경을 날카롭게 세워 놨기에, 투기나 살기 같은 기운이 나한테 향했으면 즉시 잠에서 깼을 거다.
나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오므렸다가 폈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몸.
휴식을 취한 덕분에 신체 컨디션도 최상이었다.
‘이제 움직이자.’
난 바위의 틈새에 몸을 밀어 넣었다.
동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산자락에 걸쳐 있는 태양 빛이 눈동자를 강타했다.
“악, 눈뽕.”
어두운 곳에 있다가 나오니, 빛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조금씩 옅어지는 햇볕.
반대편에서는 둥근 달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 전과 달리 완연하게 차오른 형태.
아직은 노을에 가려져서 빛을 내지는 못했지만, 보름달이 확실했다.
‘오늘 아니면 내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드르륵- 드륵-.
안에 들어 있는 월석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소음을 빚어냈다.
첫날에 무리해서라도 월석을 사두길 잘했다.
지금 상회를 갔다가 에미리트산으로 돌아왔다면,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운이 좋군.’
미소를 머금은 채, 산자락을 밟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 산행의 목표는 에미리트산 정상.
정확히는 산 정상 아래에 있는 기다란 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