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퍼덕거리는 날갯소리가 동굴을 요란하게 울렸다.
붉은 동굴의 주민, 빅 배트다.
‘소리만 들리는군.’
점점 가까워지는 날갯소리.
동굴에서는 발광체가 아무것도 없다.
힘센 이끼라도 있으면 모를까, 지금은 어둠을 꿰뚫어 보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빛이 있어도 문제야.’
빅 배트에게는 교란 능력이 있다.
그렇기에 놈들을 사냥하려면 [가시 갑피]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난 양팔을 X 자로 교차한 채로 무작정 전진했다.
“키잇 키이잇!”
빅 배트의 비명 소리가 고막을 뒤흔들었다.
[초음파에 노출되었습니다.]
[몸의 중심을 잡기 어렵습니다. 방향감각을 상실합니다.]
술에 취한 것처럼 흐느적거린다.
다리에 힘을 주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쓰러지지만 않으면 된다.
이를 악물면서 제자리에 섰더니, 잠시 후 쿵- 하고 묵직한 감각이 허벅지를 강타했다.
빅 배트가 달려든 거였다.
‘놈들은 사냥감을 쓰러트린 후에 물어뜯는다.’
[초음파]로 감각을 교란.
사냥감이 비틀거릴 때 부딪쳐서 넘어뜨린 다음 집단 린치 하는 게 빅 배트의 공격방식이다.
정면으로만 달려드는 가시멧돼지보다 한층 더 까다로운 적!
그런데 말이야, 내가 힘이 좀 세거든.
중심만 잘 잡으면 빅 배트한테 넘어지는 일 따위는 없다는 것.
그뿐이랴?
푸아악!
살이 찢기면서 피가 튀기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의 진원지는 빅 배트였다.
몸을 떨면서 발작하는 괴물.
전력으로 날아와서 가시가 촘촘하게 박힌 갑피에 부딪친 것이다.
“키잇, 키잇.”
고통에 겨운 호흡을 들이마시는 빅 배트.
걱정하지 마라.
네 친구들도 곧 따라갈 거야.
쿵! 쿵! 빅 배트 무리가 연달아서 부딪쳤다.
어깨, 다리, 복부, 그리고 가슴팍.
내 중심을 무너트릴 수 있는 부위라면 어디든지 부딪쳤다.
“키이잇!”
“키잇!”
날카로운 가시에 제 발로 달려들고는 비명을 토해 내는 빅 배트들.
이런 걸 보고 기름 끼얹은 채로 불구덩이에 들어간다고 하던가?
‘공략을 보길 잘했어.’
회귀 전의 나는 붉은 동굴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 들어간 거지.
힘이 부족했거든.
그렇기에, 이미 밝혀진 빅 배트의 정보를 취합해서 나만의 방법을 세워 놓았다.
“효과 확실하네.”
발소리를 내서 어그로를 끌었더니, 빅 배트 무리가 가시 쪽으로 달려와서 머리를 박았다.
몇 마리는 가시에 관통된 채 부르르 떨었고.
나머지 놈들은 지면에 쓰러진 채 숨을 할딱거렸다.
“마음 약해지게 왜 그러냐.”
이럴 때는 고통을 덜어 주는 게 최고지.
손톱이 20센티 이상 튀어나왔다.
난 자비를 베푸는 마음으로 빅 배트의 숨통을 끊어 주었다.
이렇게 착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니?
[빅 배트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등급: 일반]
[포식한 정수: 1.5% → 3.2% → 6.1%…….]
캬, 정수 달달한 거 보소.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도 빅 배트 무리 하나를 쓰러트릴 수 있었다.
[가시 갑피]를 얻고 붉은 동굴에 진입한 덕분이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 *
나는 붉은 동굴을 거침없이 누볐다.
걸을 때 힘을 주면, 그에 화답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빅 배트의 날갯소리가 들렸다.
부우우웅-!
빅 배트가 내뱉는 초음파가 시간 차로 들이닥쳤다.
“이놈의 초음파는 좀 귀찮은데.”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다리에 힘을 주었다.
빅 배트가 알아서 달려들어서 죽어주니 고맙긴 하다만.
술에 취한 것처럼 균형 감각이 흐트러지는 경험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몇 번 전투를 반복했을 때.
희미한 초록빛이 통로를 밝혀 주었다.
[힘센 이끼]
등급: 매직
분류: 잡화
일부 동굴에서만 볼 수 있는 이끼입니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녀서 포션이나 회복 관련 스킬 등의 촉매로 사용하면 효과를 증진시킵니다.
힘센 이끼.
상급 포션을 제조에 필요한 식물이다.
주목적은 빅 배트의 정수를 얻는 거였지만, 부수입 좀 얻어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나는 힘센 이끼를 긁어 냈다.
“이게 다 얼마야.”
흐흐흐.
입가에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사회 체계가 유지되는 한, 돈도 힘의 일부다.
회귀 직후에는 돈이 없어서 곡괭이를 들고 티라노사우루스의 화석을 직접 캐지 않았던가.
지갑이 두툼하면 발품을 파는 대신 상태가 좋은 화석을 사 버리면 된다.
그러니까 돈도 모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모아 놔야지.
‘겸사겸사잖아.’
붉은 동굴의 구조는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시야가 차단되었다고 해서 길을 헤맬 일은 없다는 거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힘센 이끼 채집과 빅 배트 사냥을 동시에 진행했다.
[빅 배트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민첩 + 2]
[마나 + 2]
[스킬 - 초음파가 추가됩니다.]
[초음파]
등급: ★
분류: 액티브
초음파를 발산하여 주위의 지형을 파악한다.
소량의 마나를 소모한다.
*범위: 100미터
드디어!
붉은 동굴을 방문한 목적을 달성했다.
‘초음파가 있으면 공간 인지능력을 올릴 수 있어.’
인간이 정보를 받아들일 때 가장 많이 의지하는 감각은 ‘시각’이다.
한데, 여기에 초음파가 더해지면 ‘청각’도 공간을 읽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붉은 동굴처럼 어둠으로 가득 찬 곳도…….
[초음파를 사용합니다.]
[반경 100미터 안의 지형 구조를 읽어 냅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지.
초음파가 내 주위로 퍼져 나가면서 지형지물이 어떤 식으로 생겼는지 알려 준다.
음파의 시각화라고 해야 하나.
빛 한 줄기 없는 곳이라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초음파로 읽은 지형이 흑백 화면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이제 어둠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정말이지, [포식] 능력은 최고야.
난 몸을 돌이켜서 입구로 향했다.
붉은 동굴에서 볼일은 끝났다.
돌아가는 길은 전처럼 발을 더듬지 않았다.
[초음파]가 있으면 야간투시경을 쓴 것처럼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동굴 틈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이렇게 가까울 줄이야.’
몇 시간 정도 전진했던 것 같은데, 입구로 돌아오기까지는 20분이면 충분했다.
틈새 사이에 몸을 밀어 넣어서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뭐지?’
웅성웅성.
동굴 바깥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난 잠깐 걸음을 멈춘 채 바위에 귀를 붙였다.
튜토리얼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됐는데 붉은 동굴을 노린다……?
‘상위 길드 소속 유망주인가 본데.’
가시멧돼지는 튜토리얼 첫째 날에 상대할 만큼 호락호락한 적이 아니거든.
뭐든 조심하는 게 좋겠지.
난 [초음파]를 병행, 바깥 상황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여기에 누가 지나간 흔적이 있습니다.”
“유진호, 그자일 겁니다.”
“확신하시는 근거가 있는 겁니까?”
“놈은 늑대왕 서린을 사냥했어요. 다음으로 노릴 곳은 여기가 분명합니다.”
“박종원 플레이어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전 이번 튜토리얼에서 반드시 1위를 해야 합니다. 아시잖아요?”
“화랑의 유망주이시니, 당연한 말씀이죠.”
오호. 대화를 듣다 보니, 상황이 조금 파악되는군.
난 스테이지 현황판을 확인했다.
[당신은 현재 0층, 레인보우 아일랜드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필드 보스
거대 뱀 네스 - 생존
늑대왕 서린 - 사망(사냥한 플레이어: 유진호)
재생성까지 159:44:21
딥 슬라임 - 사망(사냥한 플레이어: 유진호)
재생성까지 151:32:09
분노 유인원 – 사망(사냥한 플레이어: 박종원)
재생성까지 155:39:21
…….
*포인트 획득
1위 - 박종원(207점)
2위 - 오지원(152점)
3위 - 정신호(137점)
4위 - 이도영(108점)
5위 - 장미지(96점)
박종원이라는 녀석, 내가 늑대왕 서린을 사냥한 걸 보고는 붉은 동굴까지 노릴 거라고 예측한 모양이다.
하루 만에 포인트도 제법 쌓았잖아?
귓가에 아른거리는 이름을 곱씹으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모르겠군.’
회귀 전에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유명 랭커들과 경쟁했던 몸이다.
박종원.
미래에서도 두각을 보였다면 내가 기억을 못 할 리 없는데. 그 정도까지의 인물은 아닌 듯했다.
어디, 그러면 불청객들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얼굴이나 보러 갈까?
나는 바위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 * *
붉은 동굴 입구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
박종원의 눈매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동굴에서 나오는 플레이어가 유진호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 1위를 해야 한다. 듣도 보도 못한 플레이어한테 질 수는 없어!’
꾸욱!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를 따라온 플레이어들도 긴장한 기색으로 병기를 쥐었다.
“박종원 플레이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설득해야죠.”
“만약 이야기가 잘 안 되면요.”
“당분간은 좀 쉬게 만들어 줄 겁니다. 영 안 되면 탈락시켜 버려야죠.”
박종원은 평범한 보상만으로는 만족을 못 했다.
‘화랑, 아니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플레이어가 될 거다!’
국내에서 부동의 1위 길드인 화랑에서 차기 유망주로 선출되었다.
마냥 불가능한 게 아닌 꿈.
박종원은 그 목표를 반드시 이루고 싶었다.
튜토리얼 스테이지 1위는 그 장대한 꿈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이다.
‘말이 안 통하면 팔이나 다리 하나 정도는 부러트려 놓는 수밖에.’
박종원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마침내 붉은 바위를 벗어난 진호가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박종원의 눈이 진호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원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버린 옷.
거기에 맨손이다.
저자가 정말로 랭킹 1위가 맞는 건가.
진호의 모습을 보자 의구심이 치솟았지만, 그 마음을 꾹 누르고 입을 열었다.
“당신이 유진호 맞습니까?”
“알고 왔으면서 뭣 하러 질문을 하는 건지 원.”
픽, 하고 실소를 내뱉는 진호.
박종원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수면 아래로 내렸다.
“그럼 이야기가 빠를 것 같군요. 당신에게 제안할 게 있습니다.”
“1위를 포기해라. 그런 거지?”
“맞습니다. 대신 레어 등급 아이템을 드리죠.”
“박종원 플레이어, 아무리 그래도 레어 아이템은 좀…….”
옆에 있던 플레이어가 박종원을 제지했다.
[레어] 등급 아이템은 최소 수억에서 많게는 수십억 단위로 거래된다.
1위를 포기하는 것치고는 과한 거래인 셈.
박종원은 그만큼 진심이었다.
“에이, 레어 하나는 너무 싸다.”
“그렇다면 제안을 거절할 생각입니까?”
“어.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몸으로 하는 대화를 해야겠죠.”
시잉- 박종원의 손에 들린 칼이 차가운 소리를 토해 냈다.
화랑에서 지급받은 유니크 등급 아이템, [소리장도]다.
“잘됐네.”
진호는 칼을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뭐가 말입니까?”
“몸으로 하는 대화, 나도 좋아하거든.”
박종원은 한발 늦게 진호의 말을 이해했다.
그 순간.
[민첩한 뒷발]
땅을 박찬 진호는 박종원이 서 있는 방향으로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