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상회에서 필요한 건 다 구했다.
나는 곧장 몸을 돌려서 호수로 향했다.
“이보게, 그 월석만 사고 가는 건가?”
드워프 상인이 앞을 막아섰다.
“예. 그게 목적인데요.”
“그러지 말고 무기도 좀 보고 가게나. 드워프가 제작한 검은 최고의 성능을 자랑한다고!”
“튜토리얼에서는 상처를 입기도 할거예요. 포션 하나 사 가세요.”
드워프와 엘프 상인이 나를 붙들었다.
하긴, 호구가 제 발로 걸어왔는데 놓치고 싶지 않겠지.
본래 [미드론 상회]는 탑 저층을 오르는 플레이어들에게 외면을 받는다.
상회에서 물건을 구매하려면 해당 층계에서 얻은 포인트를 지불해야 하거든.
당연하게도, 상회를 자주 이용하면 보상 질도 떨어진다.
[유진호 – 27점]
[획득 포인트가 낮아서 랭킹에 집계되지 않습니다.]
봐라.
월석을 구매하면서 포인트를 소모하니 랭킹에서도 튕겨 나 버렸다.
플레이어에게는 양날의 칼 같은 게 상회다.
‘솔직히 초반에는 상회를 이용할 필요도 없어.’
바벨탑이 지구 곳곳에 등장한 지 10년이나 되었다.
하급 포션 같은 건 제약회사에서 개발한 지 오래였고.
탑에서만 나오는 괴물의 갑피나 광석 같은 걸로 장비를 제작하는 기술도 꽤 발달했다.
탑 중반 이후에 비빌 정도는 아니다만.
튜토리얼에서 상회를 이용하기보단 바깥에서 장비나 소모품을 사는 편이 훨씬 나았다.
“난 거지니까 호객 행위 하지 마십쇼.”
“그러고 보니 그러네.”
“아니, 왜 그 월석 같은 쓰레기 아이템에 포인트를…….”
두 상인은 울상을 지으면서 투덜거렸다.
너희야 모르겠지.
이 아이템의 진가가 어디에 있는지 말이야.
“다음에 봅시다. 볼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면서 호수에 몸을 담갔다.
* * *
스네인 호수에서 나온 직후.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하릴없이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현재 당신의 위치는 산지입니다.]
[산지 – 마나 소모량 10% 증가]
에미리트산 초입으로 진입했다.
제대로 된 산행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페널티가 적용되었다.
‘여긴 페널티가 까다로운 게 아니야.’
갓 바벨탑에 들어온 플레이어들은 평균적으로 스킬을 한두 개 보유한 상태다.
소모량이 10% 늘어나는 것쯤은 피부에 크게 와닿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산지의 지형 그 자체다.
암석으로 된 산.
잘 닦인 등산로와 달리, 에미리트산은 발 디딜 곳을 찾아서 올라가는 것부터가 고역이다.
플레이어를 괴롭게 하는 건 하나 더 있다.
“저기 있네.”
난 달빛에 비쳐서 어슴푸레 보이는 실루엣을 가리켰다.
바위만 한 크기의 괴물.
가시멧돼지다.
“크웅!”
콧김을 내뱉는 가시멧돼지.
놈은 그 이름대로 피부에 가시를 박아 놓은 괴물이다.
공격 패턴은 돌진 하나뿐.
평원에서 마주쳤던 뿔토끼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상대하기는 훨씬 까다롭다.
그 이유는 전신에 박혀 있는 가시다.
돌진 궤도에서 아슬아슬하게 회피해도 가시에 긁혀서 상처를 입기 일쑤다.
뿔토끼보다 돌진 속도가 느려도, 피하려면 훨씬 많이 움직여야 한다.
‘지형도 문제고.’
가시멧돼지의 서식지는 산.
그것도 암석으로 된 험준한 곳이다.
놈은 제집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데, 플레이어의 운신 폭에는 제약이 걸린다.
실버 팽과는 다른 의미로 까다로운 괴물.
“크으으응!”
가시멧돼지가 뒷발을 차면서 앞으로 튀어나왔다.
정면 승부는 무리.
그렇다면.
‘당연히 옆을 노려야지.’
나는 가시멧돼지와 충돌하기 직전에 왼쪽으로 뛰었다.
동시에 회색 갑피가 옆구리를 감쌌다.
카가가각! 멧돼지의 피부에 붙은 날카로운 가시가 옆구리를 긁었다.
충돌 부위를 중심으로 나오는 크고 작은 불꽃.
갑피와 가시가 맞닿으면서 생긴 마찰열이 빚어 낸 광경이다.
소모된 갑피의 내구력은 7%.
지나가듯이 스친 것 치고는 꽤 많이 깎여 나갔다.
뭐, 이 정도면 할 만하군.
‘뿔토끼보다는 빨라도 공격 방향을 전환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갑피를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갑피를 전신에 둘렀다.
가시멧돼지를 공격하려면 저 가시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야 한다.
창이나 화살, 혹은 원거리 공격 스킬을 보유했으면 모를까.
근접 격수가 가시멧돼지를 쓰러트리려면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날카로운 손톱을 사용합니다.]
20센티 정도로 튀어나온 손톱.
나는 손톱에 날을 세운 채, 천천히 몸을 돌리는 가시멧돼지의 등에 올라탔다.
등 위에도 박혀 있는 가시가 갑피를 찔렀다.
아니, 이 경우에는 내가 가시로 달려든 꼴이구나.
[갑피의 내구도가 1% 소모되었습니다.]
[갑피의 내구도가 1% 소모…….]
여러 부위에 생성한 갑피가 동시다발적으로 깎여 나갔다.
흐흐흐.
철갑 아르마딜로의 정수가 없었으면 가시멧돼지를 사냥할 시도조차 못 했을 거다.
난 추켜세운 손톱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괴력을 사용합니다.]
푸아악!
허공으로 솟구친 붉은 피가 달빛과 만나면서 은은하게 빛났다.
“뀌익.”
고개를 지면으로 숙이는 가시멧돼지.
갈기갈기 찢긴 목덜미에서는 연신 피가 솟구쳤다.
[경험치 7.5%가 올랐습니다.]
놈의 약점인 목덜미를 공격, 일격으로 승부를 냈다.
실버 팽의 정수, [날카로운 손톱] 덕분이다.
가시멧돼지의 살가죽이 꽤 두껍거든.
[괴력] 사용 유무를 떠나서 손톱을 강화하지 않은 상태로는 가시멧돼지와 실랑이를 더 벌였을 거다.
사전에 여러 정수를 흡수한 보람이 있구먼.
물론.
포식한 정수의 능력을 여럿 발휘할 수 있는 건 마나 회복 능력을 늘려 주는 [용의 심장] 덕분이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가시멧돼지의 정수를 포식했다.
[가시멧돼지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정수 등급: 일반]
[포식한 정수: 2.8%]
배를 채우는 감각.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처음 맛보는 정수의 맛에, 뱃가죽이 꼬르륵- 하고 요동을 쳤다.
‘어차피 밤은 기니까.’
나는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등산을 시작했다.
* * *
크고 작은 바위를 밟으면서 나아가다 보니, 가시멧돼지를 종종 마주쳤다.
밤이라서 그런가?
가시멧돼지의 활동 영역이 내 기억보다 더 넓었다.
‘오히려 좋아.’
성을 내면서 달려드는 가시멧돼지를 보자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포식해야 할 정수가 품 안에 안기는데 얼마나 기분 좋아.
[가시멧돼지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에미리트산을 오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정수가 50% 이상 찼다.
사소한 단점을 하나 꼽자면 걸치고 있던 옷이 넝마가 되었다는 점?
“이것까지는 생각 못 했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갑피]로 보호할 수 있는 건 내 피부뿐이다.
실버 팽 무리를 사냥할 때에도 아슬아슬했지만.
가시멧돼지의 몸에 촘촘히 박혀 있는 가시는 옷가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다른 플레이어를 만나면 곤란하겠는데.
그때는 갑피로 전신을 가려야지.
난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일어난 일. 해결 방법이 없는 걸로 고민해 봐야 쓸데없지.
“붉은 바위가 어디에 있더라?”
난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능선을 탔다.
보름달이 뜨기 전에는 굳이 정상으로 갈 필요가 없다.
그 전에 얻어 놓을 수 있는 건 모두 취해 둘 거다.
-에미리트산을 오르다 보면 중턱에 붉은 바위가 있는데, 뒤로 돌아가면 동굴이 있다. 동굴에는 상급 포션을 만드는 재료인 힘센 이끼가 있다.
힘센 이끼는 한 뿌리당 1천만 원 정도 하는 고급 재료다.
바벨탑 3년 차에 알려진 숨겨진 공간.
이번 회차 플레이어들이라면 모두 공략을 보고 숙지했을 거다.
경쟁이 붙기 전에 조금 캐 놓는 게 좋겠지?
‘겸사겸사 정수도 좀 얻고.’
나는 입맛을 다시면서 붉은 바위 수색을 이어 갔다.
달빛을 등불 삼아 산자락을 타다 보니, 가시멧돼지가 연달아 달려들었다.
[가시멧돼지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근력 + 3]
[맷집 + 3]
[스킬 - 가시가 추가됩니다.]
[가시]
등급: ★
분류: 액티브
날카로운 가시를 피부에 생성한다.
소량의 마나를 소모한다.
붉은 바위 탐색 과정에서 가시멧돼지의 정수를 100% 채워 버렸다.
오히려 좋아.
밤이라서 튜토리얼 점수도 배로 올라가니, 일석삼조였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구먼.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철갑 아르마딜로의 정수가 가시멧돼지의 정수에 반응합니다.]
[두 정수를 융합하여 새로운 스킬을 만들 수 있습니다.]
스킬 융합.
성질이 비슷한 정수의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된 모습이다.
이미 예상했던 일.
난 당황하지 않고 입을 떼었다.
“융합한다.”
[가시 갑피]
등급: ★★
분류: 액티브
가시 달린 갑피를 피부 위에 생성한다.
소량의 마나를 소모한다.
나는 시험 삼아 [가시 갑피]를 팔뚝에 전개했다.
드드드드!
오른팔을 뒤덮은 회색 갑피.
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날선 가시가 갑피 위를 빼곡하게 덮었다는 점이다.
“좋은데?”
나는 가시로 뒤덮인 팔뚝을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가시길이는 줄어들었지만, 관통력과 내구도가 원본보다 더 올라갔다.
퉁, 왼손으로 가시 갑피를 가볍게 쳤다.
‘충격 흡수율이 더 올라갔어.’
한층 상승한 내구도.
근접한 적에게 상처를 입히는 가시도 추가되었다.
회귀 전에는 몸을 사리느라 튜토리얼에서 이런 능력들을 얻지 못했는데.
미래를 안다는 건 정말이지.
‘최고야.’
나는 미소를 지었다.
* * *
붉은 바위를 찾은 건 새벽쯤이었다.
난 공략을 떠올리면서 큼지막한 바위 뒤로 돌아갔다.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틈.
도대체 이런 걸 어떻게 발견하는지 모르겠다.
“실례합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바위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바위 안쪽은 빛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붉은 바위 동굴은 직진 코스로 되어 있다.
-동굴에는 빅 뱃이 머문다. 빛을 비추거나 소리를 크게 내면 플레이어를 공격하니, 자극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을 추천한다.
-힘센 이끼는 발광체라서 찾기가 쉽다.
바벨탑이 열리고 3년째인가에 밝혀진 공략법.
당연히, 이 시점의 플레이어라면 대부분 숙지한 지식이다.
정석적인 방법은 발에 힘을 빼고 느린 속도로 전진, 힘센 이끼를 채집하는 거다만…….
내 목적은 힘센 이끼 말고도 하나 더 있거든.
저벅- 저벅- 선명한 발소리가 붉은 동굴을 요란하게 울렸다.
열 걸음째를 내디뎠을 때.
파닥거리는 소리가 동굴을 가득 메웠다.
“키이이이!!”
귀청을 울리는 괴성.
붉은 동굴의 주인, 빅 뱃의 울음소리였다.
“거참 화끈하게 반겨 주네.”
나는 전신에 갑피를 두른 채, 괴성이 들리는 방향으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