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나는 자리를 벗어난 후, 상태 창을 확인했다.
연이은 전투 덕에 레벨을 2개나 올렸다.
탑 초입이라 그런지.
경험치 쌓이는 속도가 엄청났다.
추가 능력치가 10개라.
여태껏 포식으로 올린 능력치가 많다 보니 레벨 업 보상이 적게 느껴졌다.
회귀 전에는 이 좋은 걸 왜 늦게 활용했을까.
[레벨: 3]
[근력: 40.6 → 46.6]
[민첩: 34.2 → 38.2]
스텟을 분배하고 다음 사냥감을 물색했다.
“츄릅?”
슬라임 몇 마리가 보였지만 시선도 안 줬다.
너희 정수는 이미 다 빨아먹었거든.
슬라임의 사체는 포션 제작의 주재료 중 하나라서 꽤 비싼 값으로 거래된다.
마리당 50만 원.
근데 푼돈(?) 벌자고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난 걸음 속도를 올려서 슬라임들을 무시했다.
황무지를 얼마쯤 걸었을까.
“기르릉.”
“기릉?”
〔잊힌 신전〕을 찾던 중에 마주쳤던 철갑 아르마딜로가 무리 지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놈들도 마침 내 쪽을 바라봤다.
“안녕?”
손을 살짝 흔들어 주자.
“기르르릉!”
“기르릉!”
철갑 아르마딜로 무리가 그르렁거리더니 몸을 둥글게 말았다.
환영식이 꽤 격렬한걸.
“기르르릉!”
회색 공 10개가 회전을 개시했다.
저 녀석 이름 앞에 ‘철갑’이라는 단어가 괜히 들어간 게 아니다.
단단한 갑피.
튜토리얼 1일 차 플레이어의 수준으로는 몸을 둥글게 만 상태에서는 피해를 입히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적이냐고 한다면…….
약점은 있다.
철갑 아르마딜로의 갑피가 보호하는 부위는 정면뿐.
회전축인 옆구리는 무방비 상태다.
돌진 궤도를 읽고 옆으로 한 발자국을 걸었다.
한 치 차이로 스쳐 지나가는 철갑 아르마딜로.
타이밍을 노려서 훤히 드러난 괴물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기르릉…….”
철갑 아르마딜로가 한 줄기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디로 오는지가 뻔히 보이잖아.”
한번 돌진 방향을 정하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철갑 아르마딜로.
타이밍만 맞추면 쉽게 약점을 노릴 수가 있다.
연달아 쏟아지는 회색 공.
나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돌진공격을 흘려보냈다.
푸하학- 철갑 아르마딜로의 핏방울이 연달아 허공을 수놓았다.
“기르르릉!”
철갑 아르마딜로 하나가 시간 차를 두고 달려들었다.
오호라, 이 녀석은 학습 능력이 있구먼.
근데 말이야, 철갑 아르마딜로를 상대하는 방법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난 오른손을 힘껏 쥐었다.
[괴력을 사용합니다.]
근육 한 올 한 올에 실리는 힘.
꽉 쥔 주먹으로 철갑 아르마딜로의 갑피를 쳤다.
우드득- 갑피 일부가 우그러졌다.
주먹에 짓눌린 갑피 사이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쯧. 더럽게 아프네.”
오른손을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갑피의 방어력이 높아도 충격을 100% 흡수하진 못한다.
뚫을 수 없어도.
타격을 무효화하는 건 안 된다는 말!
강한 힘으로 가격하면 충격이 갑피 너머로 전달된다.
평범한 튜토리얼 1일 차 플레이어라면 정면 공략이 불가능하지만, 난 ‘평범’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거든.
[포식]으로 올린 능력치 총합만 놓고 보면 30레벨 수준의 플레이어와 비슷했다.
거기에 〔잊힌 신전〕 보상으로 얻은 목걸이, [용맹의 증표]까지.
철갑 아르마딜로의 갑피 안으로 타격을 입히기 충분했다.
‘괴력까지 안 쓰면 힘들지만.’
잘 벼려진 칼도 튕겨 내는 회전력이다.
일점에 힘을 집중시키지 않으면 역으로 내 팔이 꺾일 거다.
철갑 아르마딜로 무리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마른 바닥에 널브러졌다.
[철갑 아르마딜로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 등급 - 일반]
[포식한 정수: 3.5%]
[체력 + 0.1]
[맷집 + 0.2]
…….
무리 하나를 전멸시켰더니 정수 완성도가 1/3 가까이 올랐다.
이 기세면 20분 안에 철갑 아르마딜로의 능력을 얻을 수 있겠는걸?
꼬르륵.
배는 여전히 허기에 찬 듯, 요란한 소리를 냈다.
* * *
“기릉…….”
마지막 철갑 아르마딜로의 목이 푹 꺾였다.
나는 곧장 [포식]으로 사체의 정수를 빨아들였다.
[포식한 정수 - 100%]
[한 종의 정수를 완벽하게 흡수했습니다.]
[스킬 - 갑피가 추가됩니다.]
[갑피]
등급: ★
분류: 액티브
피부 위에 갑피를 생성한다.
한번 생성한 부위는 1분 후에 재생성이 가능하다.
소량의 마나를 소모한다.
시험 삼아 마나를 팔등 위에 불어넣었다.
드드드드!
갑피가 팔뚝을 뒤덮는다.
철갑 아르마딜로의 몸 대부분을 뒤덮었던 것과 동일한 색깔이다.
“효과 확실하네.”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갑피 스킬은 매직 등급 아이템에 비견되는 방어력을 제공한다.
[용의 심장] 덕에 마나도 넘쳐나겠다.
방어구를 걸칠 필요가 없어졌다.
갑피가 필요한 두 번째 이유.
‘용의 비늘을 얻으려면 갑피 개념 스킬이 필요해.’
용족은 최상의 방어력과 마법저항력을 지녔다.
그 방어력의 근간, 용의 비늘을 몸에 정착시키려면 관련 정수를 차근차근 쌓아 올려야 한다.
철갑 아르마딜로의 갑피는 그 첫걸음인 셈.
흐흐흐.
역시 정수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니까.
[용의 심장]
[용해]
[산성 피]
[갑피]
황무지에서 1차적으로 얻을 건 모두 얻었다.
앤트 라이온이야,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난공불락에 가까운 놈이라 당장은 제외해야 하고.
난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을 기준 삼아 방향을 가늠한 후, 남서쪽으로 걸어갔다.
〈화염 지대〉
↖
〈호수〉 ← 〈황무지〉
↙
〈평원〉
호수와 화염 지대는 아직 시기상조다.
특히 화염 지대의 경우, 온도가 무지막지하게 높아서 제대로 준비를 안 하면 화상을 입기 십상이다.
내 경우에는 불 저항 관련 장비도 없고.
결국 튜토리얼 스테이지를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정수를 마구 포식해야 진입이 가능하다.
‘평원에서도 얻을 정수가 있으니까.’
메마른 땅을 걷다 보니, 지면에 그어진 경계선 너머로 초록색 잔디가 보이기 시작했다.
[현재 당신의 위치는 평원입니다.]
페널티가 없는 유일한 지역.
탑 선발대의 공략에서 평원을 시작 지점으로 추천하는 데는 이유가 다 있다.
공기부터가 달라.
황무지에서는 숨을 쉬기도 텁텁했는데 말이지.
“거기! 어그로가 튀잖아!”
“확실히 막아요.”
“윈드 커터!”
플레이어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여긴 회귀 전의 기억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구먼.
과거의 나도, 저 초짜들 사이에 껴서 꾸역꾸역 괴물을 사냥했다.
“뿔토끼 녀석, 뭐가 이렇게 빠른 거야?”
“움직이는 걸 보고 반응하면 늦는다고 했어요.”
“저건 돌진을 미리 대비해야 효율적으로 사냥할 수 있다고.”
방패를 든 플레이어가 뿔토끼 근처로 다가갔다.
뿔토끼의 귀가 흔들거리더니.
“뀨삐잇!”
지면을 차면서 돌진했다.
철갑 아르마딜로보다 배 이상 빠른 속도!
통짜 쇠로 된 방패가 뿔토끼의 공격에 움푹 파였다.
윽- 비명을 흘리는 플레이어.
“지금이야!”
뒤에 있던 팀원들은 돌진 후유증으로 해롱거리는 뿔토끼를 쓰러트렸다.
‘요령만 알면 사냥하기가 쉽지.’
뿔토끼의 약점은 저 폭발적인 추진력이다.
일정 거리 안으로 접근하면 반드시 돌진하는데, 그 공격만 막으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평원이 초심자 추천 지역인 것도 그 까닭이다.
철제 방패만 들고 있으면 경험치를 쉽게 올릴 수가 있거든.
난 뿔토끼로 뒤덮인 평원으로 발을 디뎠다.
“저기요, 아저씨!”
누군가가 큰 목소리를 냈다.
뿔토끼가 음성에는 반응하지 않는다지만, 경솔하구먼.
이래서 초심자들이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 어깨 움직인 아저씨! 못 들은 척하지 말고 여기 봐요!”
……뭐야.
나를 가리키는 거였어?
소리의 진원지는 2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뿔토끼는 맨몸으로 위험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걱정해 주기는.
난 오른손을 휘휘 저었다.
“뀨삣!”
이마의 뿔을 내밀고 돌진하는 뿔토끼.
40에 달하는 민첩으로 놈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어 냈다.
[갑피를 활성화합니다.]
회색 갑피가 뿔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 * *
장수진은 평소에 오지랖이 넓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방금도 마찬가지.
짧은 머리의 사내가 무방비한 상태로 뿔토끼한테 다가가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저기요, 아저씨!”
장수진이 소리를 지르자, 동료들의 시선도 진호에게 쏟아졌다.
“방패도 없어.”
“뿔토끼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는 건 위험하다고 했잖아.”
“저 사람, 공략을 안 보고 온 거 아니야?”
걸어 다니는 총탄.
선발대가 뿔토끼에게 붙인 이름이다.
방패를 들면 쉬운 상대지만.
맨몸으로 정면 승부를 벌이면 날카로운 뿔이 눈 깜짝하는 순간 몸에 박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장수진의 비명 소리를 신호탄 삼아, 뿔토끼가 도약했다.
한데.
팅-! 피 대신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역시 쓸 만해.”
짧은 머리의 사내.
진호는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철판조차 우그러트리는 뿔토끼의 돌진.
걸어 다니는 총탄은 철갑 아르마딜로의 [갑피]를 뚫지 못했다.
돌진의 후유증으로 땅바닥에 쓰러진 뿔토끼.
진호는 일격으로 괴물의 숨통을 끊었다.
“어, 어떻게?!”
장수진은 동료의 방패와 진호를 흘겨보았다.
철제 방패의 표면에 새겨진 뿔토끼의 흔적.
반면 회색으로 물든 진호의 팔은 생채기 하나 없었다.
“저 팔이 철제 방패보다 단단하다는 거야?”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장수진.
놀라긴 아직 일렀다.
[갑피] 능력을 해제한 진호는 느긋하게 뿔토끼 무리 사이로 걸어갔다.
“뀨삐잇!”
“뀨삣!”
동시다발적으로 지면을 박차는 뿔토끼.
진호는 부분적으로 갑피를 사용해서 돌진 공격을 받아 냈다.
거의 동시에,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진호에게 달려들었던 뿔토끼들의 몸뚱이에서 솟구친 거다.
“대단하잖아.”
옆에 있는 플레이어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진아.”
“응?”
“너도 마음만 먹으면 흉내는 낼 수 있지 않아?”
장수진의 실력은 플레이어 군집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송장 치울 생각이라면 모를까.”
장수진은 진심으로 화를 냈다.
뿔토끼의 움직임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서 반격을 날리라고?
그런 건 무리였다.
숫자만 20이 넘는 뿔토끼 무리가 전멸하기까지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쯧, 아직 부족하군.”
진호는 혀를 차더니 평원 안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플레이어 군집.
“사체를 그대로 놓고 갔잖아?”
“뿔이라도 채집하자.”
“그래. 저 뿔은 무기 제작 원료로 사용돼서 비싸게 팔 수 있어.”
약삭빠른 몇 명이 진호가 방치한 뿔토끼의 사체로 다가갔다.
하지만.
“뿔이 가루가 되었는데?”
“몸뚱이도 거죽만 남았잖아.”
“이게 무슨 일이야?!”
그들이 보게 된 것은 [포식]의 후유증으로 말라비틀어진 뿔토끼의 사체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