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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6화 (6/300)

6화

딥 슬라임은 황무지 북쪽에 위치한다.

하늘 위에 떠오른 해를 나침반 삼아서 쭉 걸었다.

지금쯤이면 딥 슬라임이 나올 때가 됐는데…….

“이건?”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무지에 새겨진 발자국 여러 개.

자국 길이와 보폭으로 짐작해보건대, 사람이 분명했다.

‘숫자는 다섯. 남자 셋 여자 둘이라.’

우연일 리는 없겠지.

딥 슬라임을 노리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보스 몬스터는 한번 사냥하면 10일 후에 재생성된다.

튜토리얼 스테이지의 룰.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딥 슬라임 하나 때문에 황무지로 돌아오기는 좀 그렇잖아.

퍼어엉-! 폭음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벌써 딥 슬라임을 찾아낸 건가?

다리에 힘을 주면서 족적이 새겨진 방향으로 뛰었다.

“츄릅!”

“츄르릅!”

슬라임 몇 마리가 달려들었지만 무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투 현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슬라임 무리에게 포위당한 플레이어 다섯.

“저 녀석들이네.”

쳇- 나는 혀를 찼다.

황무지에서 경쟁자가 있을 줄은 생각 못 했다.

한데, 전황은 그다지 안 좋았다.

“슬라임이 너무 많다.”

“딥 슬라임을 사냥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쓰러지겠어!”

탱커 역할을 맡은 플레이어 둘이 비명을 질렀다.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갑주 곳곳에는 슬라임의 점액질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용해액에도 안 녹는 걸 보면 꽤 괜찮은 장비를 착용한 듯했다.

그래 봐야 시간문제지만.

슬라임 무리의 숫자를 줄이지 못하면 결과야 뻔했다.

“파이어 볼트!”

“파이어…….”

“라이트닝!”

벼락 한 줄기와 화염 화살 두 발이 슬라임을 강타했다.

펑- 슬라임의 몸체가 부풀어 오르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폭발했다.

탱커 둘에 원거리 딜러 셋이라.

‘슬라임 무리는 정리할 수 있겠네.’

뒤에 몸을 사리고 있는 딥 슬라임까지 사냥하는 건 무리겠지만.

불쌍한 친구들 구제해 주는 셈 치고 딥 슬라임은 내가 사냥해야겠다.

전투가 한창인 곳으로 다가가자, 플레이어 팀이 나를 힐끗했다.

“거기! 슬라임은 1일 차 플레이어가 상대하기 어려우니 다가오지 마십쇼!”

탱커 하나가 고함을 외쳤다.

내 행색을 보고 아무 준비도 갖추지 않은 플레이어라고 오해한 모양이다.

“걱정 안 해 줘도 돼.”

나는 슬라임 무리 쪽으로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딥 슬라임이 있는 방향이다.

“츄릅!”

슬라임 하나가 몸뚱이를 넓게 펼쳤다.

“파이…….”

원거리 딜러 한 명이 급히 화염 마법을 준비했다.

그러니까.

“걱정 안 해 줘도 된다니까.”

한 말 또 하게 하네.

나는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펑! 넓게 몸을 펼쳤던 슬라임이 북 두드리는 소리를 내면서 터져 버렸다.

“어……?”

플레이어 하나가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 * *

오지원은 역도선수 출신 플레이어다.

각성 능력은 [철인].

레벨을 올릴 때마다 부가 스텟을 추가로 받고 방어 스킬에 옵션이 붙는 희귀한 능력이다.

그 덕에 국내 10대 길드 중 하나인 ‘불사조’에게 섭외되었고, 탑에 도전장을 내밀기 전에 특수훈련까지 받았다.

한데.

‘저 사람은 뭐지?’

오지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를 경악케 한 주인공, 진호는 시종일관 딥 슬라임을 압도했다.

오지원은 [불사조] 길드 동기인 김미진에게 시선을 옮겼다.

“딥 슬라임은 화염이나 번개 공격에만 피해를 입지?”

“그렇지. 일반적으로는 말이야.”

“혹시 저 손에 인챈트라도 걸은 걸까?”

딥 슬라임은 황무지의 슬라임보다 물리 방어력이 훨씬 높았다.

이론상으로는 레벨 50대의 근접 계열 헌터도 저 점액질에 상처를 주기가 힘들었다.

화염 계열 각성자인 김미진은 고개를 저었다.

“마법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저건 순수한 물리력이야.”

“허허.”

“지원 팀장. 딥 슬라임을 공략할 방법이 하나 더 있잖아.”

“몸에 박혀 있는 코어를 노리는 거?”

딥 슬라임의 몸뚱이에는 코어 5개가 붙어 있다.

이론상으로는 점액질 속에 있는 코어를 모두 부수면 딥 슬라임을 쓰러트리는 게 가능했다.

“교관님도 그건 불가능하다고 확언하셨다.”

오지원은 고개를 좌우로 젓고는, 말을 이었다.

“찰나의 순간을 노리는 정확도, 그리고 강한 힘이 동반되어야 딥 슬라임을 죽일 수 있다.”

“그걸 하는 사람이 저기에 있는 거 같은데?”

김미진의 지적이 옳았다.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두 번째 공략 방법이 아니라면 진호가 딥 슬라임을 패퇴시키는 모습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딱 한 사람. 길드에서도 1일 차에 딥 슬라임을 사냥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누군데?”

“양정수 길드장님.”

국내 랭킹 2위.

전 세계의 플레이어 랭킹에서도 수위권에 드는 실력자다.

“에이, 딥 슬라임 하나 잡는 거 가지고 길드장님하고 비교하기는 좀 그렇잖아.”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하는 김미진.

“또 모르지.”

오지원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예비 불사조 길드원들이 놀라든지 말든지.

“이놈은 예나 지금이나 더럽네.”

진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손등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

슬라임은 코어 하나를 부수면 용해액이 사라졌다.

하지만 딥 슬라임은 코어가 많은 탓에 용해액에 닿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진호의 손에 화상 자국이 생길 때마다 코어가 하나씩 파괴되었다.

“이제 하나 남았네?”

“츄르르릅!”

딥 슬라임이 애처롭게 울었다.

꾸물거리면서 움직이는 슬라임 무리.

오지원이 방패를 들고 진로를 막아섰다.

“너희는 못 지나간다!”

[도발의 함성]

슬라임들이 움찔거렸다.

위협을 느끼게 하는 도발 스킬.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슬라임한테 효과만점이었다.

“지원아, 아니 지원 팀장?”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김미진.

오지원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우리 팀은 저 플레이어가 딥 슬라임을 쓰러트릴 수 있게 돕는다.”

“불사조 길드에서는 딥 슬라임의 사체를 가져오라는 과제를 내려줬잖아.”

“저 플레이어가 아니었으면 우린 어차피 전멸이었다. 다음을 노리는 게 나아.”

“그거야……. 하아, 난 모른다.”

입술을 꾹 깨무는 김미진.

순식간에 화염 화살을 만들어내더니 슬라임의 뒤꽁무니를 찔렀다.

“츄르릅!”

“츄릅!”

앞에는 오지원이.

등 뒤에서는 원거리 딜러들의 공세가 쏟아졌다.

“츄르르릅!!!!”

“덤벼라!”

애처로운 딥 슬라임의 비명과 오지원의 외침이 한데 뒤섞였다.

슬라임 무리가 오도 가도 못하고 있을 때.

“시끄러우니까. 이제 좀 자라.”

진호의 주먹이 딥 슬라임의 마지막 핵을 강타했다.

* * *

콰직!

선명하게 느껴지는 타격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자식이. 사람 귀찮게 하네.’

슬라임의 점액질에 손을 담그고 있어도.

더 이상 익어 버릴 것 같은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보스 몬스터 - 딥 슬라임을 사냥했습니다.]

[뛰어난 업적을 세웠습니다. 유진호 플레이어의 이름이 탑에 기록됩니다.]

[튜토리얼 종료 시 보상이 추가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1개.

그리고 튜토리얼 보상이 상향되었다.

회귀 전에는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멘트.

큰 감흥은 없었다.

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플레이어 무리를 흘겨보았다.

“이 녀석의 사체는 내 몫이다.”

“그렇게 하시죠.”

“생각했던 것보다 인정을 순순히 하는데?”

의외다.

플레이어 집단은 유력 길드의 신예들일 터.

지급된 장비만 봐도 안다.

최소 레어 등급. 현금으로는 억 단위 병장기와 갑주를 둘렀으니까.

원래부터 부자거나.

아니면 길드의 서포트를 받았거나.

튜토리얼 시작부터 팀 단위로 움직이는 걸 보면 뻔하지.

“당신이 아니었으면 우리 팀은 여기서 모두 죽었을 겁니다.”

“그건 맞아.”

“튜토리얼에서 어이없이 떨어질 뻔했는걸요. 은혜를 입은 건 이쪽입니다.”

담담한 투로 말하는 사내.

아까 보니,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데도 움직임이 제법 괜찮았다.

“이름이 뭐지?”

“오지원입니다.”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기억에 없는 이름이다.

저 정도 배포와 인성, 그리고 잠재 능력을 지닌 플레이어라면 후일 꽤 이름값을 올렸을 텐데.

아니면 무리하게 딥 슬라임을 사냥하려다가 탈락했을 수도 있다.

튜토리얼에서 사망하면 플레이어 권한도 박탈당하니.

“당신네들.”

“예?”

“너무 무리하지 마.”

검지로 오지원의 팀을 가리켰다.

“뭐, 뭐라고? 이 아저씨가. 보자 보자 하니까!”

화염 마법을 사용했던 여인이 얼굴을 붉힌 채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 무시하는 건 아니고.”

“당신이 내뱉은 말이 무시가 아니면 뭔…… 읍읍.”

“방금 한 충고는 잊지 않겠습니다.”

오지원이 나서서 여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호오, 자존심을 굽힐 줄도 아는군.

만약에 내가 회귀를 하면서 플레이어 하나를 구제한 거라면, 저 사내가 어떤 식으로 성장할지 궁금해졌다.

‘너무 감성적인 건가.’

쓴웃음이 입가에 감돌았다.

탑의 배후.

고신족들은 막강했다.

후일 [군주]라고 불린 정상급 플레이어들조차, 고신족 하나를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엉뚱한 곳에서 죽지나 않았으면 좋겠네.

나는 오지원에 대한 생각을 끝냈다.

의지해야 할 건 나 자신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야 할 일이나 하자.

딥 슬라임의 몸뚱이에 손을 푹 집어넣고는 [포식]을 사용했다.

쪼그라드는 딥 슬라임의 몸뚱이.

[딥 슬라임의 정수를 포식합니다.]

[포식한 정수: 100%]

[체력 + 4]

[마력 + 3]

[스킬 - 산성 피가 추가됩니다.]

[산성 피]

등급: ★★

분류: 액티브

사용자의 피를 산성으로 바꾼다.

마나 소모량에 따라 산성 수치가 달라진다.

얼핏 보면 [용해]처럼 애매한 스킬이다.

하지만 저 산성 피는 혈액의 성질을 바꾸는 ‘개념’ 자체에 의의가 있다.

‘신혈로 가는 첫걸음을 뗀 거지.’

초월의 경지를 가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신혈이다.

일반적으로는 신의 가호를 받거나 넥타르, 황금사과 같은 걸 먹어야 신혈을 얻을 수 있다.

근데 말이야.

난 신들의 애완동물이 될 생각은 1도 없거든.

‘고신족들도 나쁜 새끼들이지만, 신들도 관망하는 건 마찬가지야.’

신의 축복을 받으면 탑이 지구를 침식할 때 관여할 수 없다.

약속된 구원?

엿이나 잡수라고 해라.

그렇기에.

[포식]을 십분 활용해서 초월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회귀 전에도 했던 일이잖아.

어려울 것 없다.

이미 한 번 갔던 길.

해답을 알고 수학 문제를 풀면 과정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딥 슬라임의 사체가 쪼그라들었어.”

“마나 회복 포션의 주재료라서 엄청나게 비쌀 텐데.”

“어차피 우리 게 아니었다.”

예비 불사조 길드원들이 중얼거리는 게 훤히 들렸다.

회귀하기 전의 이명인 ‘금을 쓰레기로 만드는 능력자’가 떠올랐다.

“불만 없지?”

“당신에게 권한이 있으니까요.”

“10일 뒤를 노리라고. 나도 이제 이 녀석은 필요 없거든.”

희귀종은 한 번만 포식해도 정수를 100% 흡수할 수 있다.

10일 뒤에 다시 레이드를 시도할 땐 훨씬 강해졌을 테니.

이번처럼 요단강이 눈앞에 아른거리지는 않겠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지?”

“당신의 이름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이름을 물어보기만 하고 통성명을 안 했구나.

“유진호.”

“기억해 두겠습니다.”

“이번 일을 보복하려고?”

“아니요. 유진호 플레이어처럼 강해지고 싶어서입니다.”

오지원은 굳건한 의지를 불태웠다.

저 눈빛, 나쁘지 않다.

그래 봐야 미래에서 이름도 못 남기고 죽은 녀석이지만.

“비명횡사나 하지 마라.”

담담하게, 하지만 나름대로의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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