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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으로 레벨업하는 군주님-4화 (4/300)

4화

검게 물든 시야.

바다에 들어간 것처럼, 혹은 무중력 상태를 체험하듯 몸이 둥실 떠올라서 허공을 맴돌았다.

[바벨탑 - 0층]

[튜토리얼 스테이지에 입장하셨습니다.]

[미션 - 생존]

레인보우 아일랜드는 여러 자연환경이 섞여 있는 신비한 공간입니다.

탑에 처음 발을 디딘 플레이어는 각 환경에 적응해서 생존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곳에서 이룩한 업적들은 바벨탑을 오르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 목표: 14일 동안 살아남기.

▶ 0층의 시련은 중복해서 도전할 수 없습니다.

▶ 사망 시 실패로 간주하고 플레이어 권한을 박탈당합니다.

‘튜토리얼 스테이지라.’

두 번은 올 수 없는 장소.

새삼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았다.

[레인보우 아일랜드는 일곱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플레이어는 시작 지점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위험도가 높은 지역은 고를 수 없습니다.]

평원: 위험도 下

삼림: 위험도 下

황무지: 위험도 中

산지: 위험도 中

회귀 전의 나는 평원을 선택했다.

‘그게 일반적인 공략법이니까.’

바벨탑이 지구에 모습을 드러낸 지 10년이 지났다.

튜토리얼을 거쳐 간 플레이어만 천만 단위.

-평원 남쪽으로 내려가면 인내심 스킬을 얻을 수 있다.

-에미리트산을 오르다 보면 중턱에 붉은 바위가 있는데, 뒤로 돌아가면 동굴이 있다. 동굴에는 상급 포션을 만드는 재료인 힘센 이끼가 있다.

-삼림 지역에는…….

튜토리얼 스테이지는 이미 정석적인 공략법이 세워져 있다.

‘전에는 나도 그 공략법을 따랐다.’

시작 지점은 평원.

같이 탑에 입장한 사람들과 파티를 맺고 괴물을 사냥했다.

당시만 해도 그게 옳았다고 생각했지.

큰 실수였다.

레인보우 아일랜드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 많이 숨겨져 있다.

특히 [포식]의 재능을 가진 나한테는 숨겨진 보고나 마찬가지다.

‘튜토리얼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정수.’

앤트 라이온.

네시.

혈산군.

모두 레인보우 아일랜드에서만 서식하는 희귀종이다.

그 외에도 튜토리얼에서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과 호칭들이 가득했다.

‘이번에는 모든 걸 취한다.’

나는 망설임 없이 [황무지] 지역을 눌렀다.

[황무지를 시작 지점으로 선택했습니다.]

[플레이어의 무운을 빕니다.]

시스템 음성과 함께 온몸의 감각이 점점 희미해졌다.

* * *

메마른 벌판.

물기 하나 안 느껴지는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현재 당신의 위치는 황무지입니다.]

[황무지 - 체력 소모량 10% 증가]

휘이잉-! 둥근 모양으로 휘말린 엉겅퀴가 지면을 굴러다닌다.

서부극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다.

기억대로야.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과거의 기억과 별반 차이가 없는 풍경이다.

번쩍! 번쩍!

푸른빛이 황무지 곳곳에서 솟구친다.

탑에 첫발을 디딘 플레이어가 레인보우 아일랜드로 진입하는 모습이다.

의외구먼.

시작 지점으로 황무지를 선택한 도전자가 꽤 많았다.

도전심이 강한 별종이거나.

아니면 괜찮은 능력을 부여받아서 자신이 있는 플레이어겠지.

‘그래 봐야 숨겨진 요소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엉겅퀴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황무지의 바람이 모이는 곳으로 가보니까 이상한 현상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탐험가 로렌트.

바벨탑 안에 숨어 있는 온갖 요소들을 찾아낸 기인이다.

레인보우 아일랜드의 숨겨진 공간, 〔잊힌 유적〕을 발견한 것도 로렌트였다.

2025년이니까…… 5년 뒤구나.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써먹으마.’

정보 선점은 회귀자의 특전이다.

이때가 아니면 어느 때에 먼 미래에서 왔다는 장점을 누리겠나?

급등하는 주식 목록은 기억 못 해도 바벨탑 내부 정보는 어느 누구보다 빠삭했다.

느린 발걸음으로 메마른 벌판을 거닐었다.

황무지에서는 공기에 감도는 먼지 때문에 숨이 빨리 찬다.

전투가 아니라면 체력을 보존해두는 게 필수다.

데구르르- 둥글게 뭉쳐진 엉겅퀴가 하나둘 대열에 합류했다.

얼마 정도 황무지를 걸었을까.

“키이이이.”

낮은 숨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황무지 곳곳이 깔때기(▽) 형태로 푹 파여 있다.

앤트 라이온.

먹잇감을 구멍으로 유인, 빨아들여서 잡아먹는 괴물의 서식처다.

“기르릉?”

황무지에서 사는 동물, 철갑 아르마딜로가 나를 인식했다.

눈가에 감도는 적개심.

모래 구덩이 너머에 있는 철갑 아르마딜로가 이를 드러내면서 그르렁거렸다.

“아서라. 나한테 오다가는 죽을걸?”

“기르르릉!”

철갑 아르마딜로가 몸을 둥글게 말고는 내 쪽으로 튀어 올랐다.

몇 번 바닥과 부딪치면서 속도를 올리던 녀석은 구덩이로 몸을 던졌다.

스르르, 가만히 있던 모래 구덩이가 맹렬한 속도로 회전했다.

철갑 아르마딜로는 소용돌이치는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구덩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말했잖아. 오다가 죽는다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주어를 말 안 했구나.

철갑 아르마딜로의 숨통을 끊는 건 내 몫이 아니다.

“키이이이!”

모래 구덩이의 주인, 앤트 라이온이 커다란 집게 턱을 드러냈다.

콰지직! 철갑 아르마딜로의 단단한 갑피도 저 흉악한 턱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철갑 아르마딜로는 순식간에 잘 다져진 고기로 화했다.

“살벌한 건 여전하구먼.”

내 신체 스펙은 레벨 20대의 플레이어와 비슷했다.

평범하게 튜토리얼 스테이지를 지난 플레이어가 딱 이 정도.

문제는 그 스펙 가지곤 앤트 라이온하고 한판 붙었을 때 절대로 못 이긴다는 거지.

‘잡으라고 만든 괴물이 아니니까.’

바벨탑 공략 초창기에는 앤트 라이온의 함정에 빠져서 여러 플레이어가 탈락했다고 한다.

현시점에서도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상종하지 말아야 할 괴물.

다행인 건 함정 속으로 발을 딛지 않으면 공격당할 일도 없다는 거랄까.

나는 앤트 라이온의 함정을 피해 가며 움직였다.

“여기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커다란 모래 구덩이 앞이었다.

한곳에 모인 엉겅퀴 수백 개가 회전하는 모래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앤트 라이온의 함정과 동일한 형태.

하지만.

로렌트는 소용돌이를 보고 다른 걸 관찰했다고 한다.

<엉겅퀴가 찢기거나 튕겨 나는 게 아니라 어딘가로 사라지는 거였습니다.>

앤트 라이온은 엉겅퀴를 먹지 않는다.

커다란 엉겅퀴가 구덩이에 들어가도 빨아들이지 않는 게 증거다.

한데, 황무지에서 부는 바람의 중심부인 곳은 엉겅퀴를 삼킨다고 한다.

‘정말이군.’

나는 로렌트의 지식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안으로 내려가면 레인보우 아일랜드의 숨겨진 장소, [잊힌 신전]이 나온다.

철갑 아르마딜로가 찢겨지는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리지만.

두려움은 없다.

회귀 전에는 그보다 더한 광경을 수도 없이 마주했다.

내 몰골이 더 험했던 적도 있고.

그러니 망설일 이유 같은 건…….

“나한테는 없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면서 모래 구덩이에 발을 디뎠다.

[앤트 라이온의 함정에 발을 디뎠습니다.]

[마찰계수가 80% 감소합니다.]

푹 빠지는 발.

철갑 아르마딜로가 괜히 못 벗어난 게 아니다.

[스킬]로 보정된 효과.

나야, 마음만 먹으면 괴력 스킬이라도 사용해서 모래 구덩이를 떨쳐 낼 수 있다.

‘지금은 참아야 해.’

연신 울려 대는 본능의 경고음을 무시했다.

모래 구덩이의 중심부에 다다른 순간.

앤트 라이온의 집게 턱 대신 딱딱한 무언가가 밟혔다.

양손으로 모래를 파헤치니, 쇠로 된 문이 보였다.

나는 고리를 쭉 당겼다.

그 순간, 환한 빛이 망막을 강타했다.

[전쟁신의 제단을 발견했습니다.]

* * *

[현재 당신의 위치는 전쟁신의 제단입니다.]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처음으로 전쟁신의 제단을 발견했습니다. 근력과 민첩이 2 상승합니다.]

역시 숨겨진 공간이구먼.

발견한 것만으로도 스텟 4가 올랐다.

‘여기까지는 알던 대로인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사각형 형태의 방.

넓이는 100평 정도 되어 보이고, 눈에 띄는 건 역수로 솟구친 글라디우스 하나다.

전쟁신이라는 이름.

그리고 글라디우스.

로렌트의 정보가 아니더라도, 신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

“아레스.”

신왕 제우스의 적자.

전쟁을 주관하는 신이다.

올림포스 신족 중에서 꽤 높은 위계에 있지만, 현대인에게는 그다지 인식이 좋지 않은 신이다.

‘제우스의 안 좋은 부분을 많이 배웠거든.’

난봉꾼, 혹은 양아치.

아레스는 제힘만 믿고 날뛰는 철부지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직접 봤을 때도 반쯤은 맞았고.

그 대신 허영심도 강해서 비위만 맞춰 주면 보상을 퍼 주는 허당 기질도 있었다.

나는 글라디우스에 손을 얹었다.

[전쟁신의 제단]

[전쟁을 주관하는 신격인 아레스를 섬기는 제단입니다.]

[아레스는 피와 폭력, 그리고 투쟁을 큰 가치로 여깁니다. 당신이 아레스를 만족하면 합당한 보상을 얻을 것입니다.]

[아레스의 시험에 응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튜토리얼 스테이지에 숨겨진 신의 제단.

시험을 극복하면 엄청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만에 하나 실패해도 튜토리얼 스테이지기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내가 실패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말이야.

▶ 히든 퀘스트 - 아레스의 시험을 승낙했습니다.

▶ 목표: 용아병(약화)과의 전투에서 승리.

금색 풀 플레이트로 무장을 한 기사.

드러난 부위는 눈뿐인데, 붉은 안광이 이글거린다.

용의 이빨로 빚어낸 병사, 용아병은 전쟁신의 상징인 글라디우스를 쥐었다.

닭살이 팔뚝을 뒤덮는다.

날선 기세가 용아병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약화된 용아병은 레벨 50대의 도전자와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저는 한계까지 검을 휘두르다가 겨우 인정만 받았죠.>

음, 스펙은 모르겠다만 저 기세만큼은 원본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은 것 같다.

글라디우스가 원체 커서 그런지, 용아병은 양손으로 글라디우스를 쥐었다.

저 정도면 그냥 투핸드 소드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대가 대전자인가?」

“맞아.”

「전쟁신께 영광을 바칠 만큼의 실력이 되었으면 하는군.」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지.”

나는 용아병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풀 플레이트 갑주.

언뜻 보기에는 파고들 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다면.

내가 직접 만들면 된다.

「빈틈을 노리려 하느냐?」

용아병은 귀신같이 몸을 돌렸다.

내 살기에 반응, 손에 쥔 글라디우스를 종으로 휘둘렀다.

정수리로 쏟아지는 칼날.

“아니. 노리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지.”

용아병이 살기에 반응해서 공격하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글라디우스의 범위.

놈의 스텟 수치에 비례한 속도.

반응속도까지 모두 계산해서 움직인 거다.

나는 종베기의 범위 직전에서 발에 제동을 걸었다.

캉! 바닥을 후려치는 글라디우스.

활짝 열린 용아병의 가슴팍을 향해 재차 돌진했다.

「대전자여, 너 정도는 무기가 없이도 쓰러트릴 수 있다.」

글라디우스를 놓고 어깨를 살짝 낮추는 용아병.

풀 플레이트의 방어력을 믿고 들이받겠다는 생각인 것 같은데.

실수한 거다.

[괴력을 사용합니다.]

[사용자의 근력 수치 + 300%의 피해를 입힙니다.]

아기장수의 설화를 포식하면서 얻은 스킬.

4배까지 증폭된 힘으로 어깨와 견갑이 이어지는 곳을 후려쳤다.

콰앙- 연결 부위가 강한 힘에 찌그러졌다.

[괴력]으로 증폭시킨 힘을 모두 해소하지 못했는지, 용아병은 10미터 뒤로 밀려났다.

「방금 그 힘은 도대체…….」

“왜, 뭐가 잘 안 돼?”

아기장수 우투리의 정수.

효과는 확실했다.

한 번에 거력을 쥐어짜 낸 후유증으로 팔이 후들거렸지만.

약화된 용아병을 쓰러트리기에는 충분했다.

「제법이구나, 대전자여.」

용아병은 연신 글라디우스를 휘둘렀다.

날선 기세.

한 번이라도 삐끗했다가는 곧장 치명상으로 이어지는 공격이다.

방어구 하나 걸치지 않았기에, 매 순간이 위험했다.

뭐.

이런 싸움이야 회귀 전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다.

무공을 익혔으면 훨씬 효과적으로 용아병을 밀어붙였을 텐데.

현시점에서는 회귀 전의 경험을 활용해서 전투를 이끌어야 했다.

나는 쏟아지는 참격을 회피하면서 [괴력]으로 2타를 넣었다.

「우연인가? 아니면…….」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용아병.

공세가 잦아들었다.

“덤벼. 아레스가 만족할 만한 싸움을 보여 줘야지.”

나는 입술을 비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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