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만신전(萬神殿).
탑 100층, 여러 신들의 사회가 머무는 곳이다.
나는 만신전의 외곽에 지어진 커다란 신전 앞에서 멈췄다.
[황혼의 제단]
굳게 닫힌 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제야 도달했나.”
왈칵.
역류한 피가 입 너머로 튀어나왔다.
전신을 뒤덮은 상처.
독, 화상, 자상, 동상…… 그 외에도 온갖 흔적이 몸에 새겨졌다.
홀로 만신전으로 가는 길을 여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다.
그럼에도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내겐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제단으로 들어서는 문을 세게 밀었다.
구구구궁-!
좌우로 밀리는 문 사이로, 황혼의 제단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녹지 않는 얼음 - 이미르의 상징]
[고대 방첨탑 - 라의 상징]
[심판의 저울 - 테미스의 상징]
…….
고신들의 신격이 담겨 있는 강력한 유물들.
최상급 아티팩트, 성유물이다.
그중에서 금색으로 빛나는 곡물, 밀을 집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성유물에 비해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외형.
나는 이 성유물의 진정한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슈타르에게 바치는 첫 공물을 포식합니다.]
[정수 등급 - 신화]
[포식한 정수: 7%]
[포식한 정수: 12%]
[…….]
성유물에 깃든 신격이 몸으로 스며든다.
“윽.”
배가 요동친다.
만신전에 오르기까지, 여러 신들의 정수를 몸에 담아 두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정수.
원래대로라면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여서 흡수를 해야겠지만, 나한테는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조금만 더 톱니바퀴의 핵심 축인 이슈타르의 정수만 흡수하면……!
“여기까지다, 필멸자여.”
“달아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쥐새끼처럼 황혼의 제단에 숨어들 줄이야.”
만신전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하나둘씩 드리웠다.
태양신 히페리온.
해신 노데스.
마법의 신 루레인.
삼목산의 악마, 훔바바.
그 외에도, [이름]을 빼앗겼던 옛 신들이 수십이나 나타났다.
고신(古神)족.
이 사태를 일으킨 원흉이다.
“여럿이서 몰려오셨네?”
나는 입술을 비죽이며 고신들을 도발했다.
배 속이 울리지만 꾹 참았다.
이슈타르의 신격을 [포식]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끝이다.
“참으로 끈질기도다. 지구의 인간들이란…… 버러지 주제에 끝까지 발악을 하는구나.”
히페리온.
옛 태양신이 못마땅한 기색을 가득 담은 채로 나섰다.
교만함으로 가득한 눈빛.
몸만 멀쩡했어도 사지를 부러트려 주는 건데, 참으로 아쉬웠다.
“신에 대한 경의를 표하지 않는 천한 것.”
“그러는 너희야말로 옛 영광을 못 잊어버리는 퇴물들 아니냐.”
고신(古神)이란, 시대의 흐름에 밀려난 이들을 가리킨다.
올림포스 신들에게 밀려난 티탄 신족처럼.
오딘이 일으킨 대홍수에 휩쓸려서 춥고 황량한 요툰헤임으로 쫓겨난 베르겔미르처럼.
현세대의 신들에게 밀려나서 [이름]과 [격]을 잃어버렸던 구세대의 신들이다.
그들을 상징하는 물건, ‘성유물’을 한자리에 모아 둔 곳이 황혼의 제단이고.
“필멸자가 두려워서 이간질이나 한 주제에, 말은 잘해요.”
인류는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가 되지 못했다.
자신만의 영달을 찾아 신의 편에 선 플레이어들.
선택을 받지 못한 이들은 고신족의 침략에 하나둘씩 목숨을 잃었다.
그 수작질을 벌인 당사자 중 하나가 히페리온이다.
“불경한 필멸자 따위가!”
손을 위로 올리는 히페리온.
이글거리는 화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왼손을 꽉 말아 쥐었다.
“그만하시구려, 태양신이여. 그럴 자격이 있는 존재요.”
“지구에서 여섯뿐인 군주급 플레이어. 필멸자가 우리의 영역에 들어선 것은 대단한 일이지.”
“그보다 포식 군주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내는 게 먼저입니다.”
포식 군주란 나를 일컫는 말.
해신 노덴스와 마법의 신 루레인, 그리고 훔바바가 히페리온을 제지했다.
난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꿍꿍이는 무슨.”
마법의 신 루레인이 앞으로 나섰다.
“당신은 전 인류에서 여섯뿐인 군주급 플레이어잖아요.”
“그랬었지.”
“인류의 결사대가 최후의 승부를 걸었을 때, 왜 그들과 함께하지 않은 거죠?”
“알려 주면 목숨이라도 살려 줄 거야?”
나는 루레인에게 되물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네요.”
루레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박정해라.”
“당신이 죽어야만, 바벨탑이 세계의 흡수를 완전히 마친답니다.”
고신족의 목적은 하나다.
여러 세계를 흡수.
바벨탑에 통합시켜서 빼앗긴 힘과 이름, 그리고 권위를 되찾는 것이다.
바벨탑이 세계를 집어삼키려면 기존의 인류가 모두 죽어야 한다.
저 가증스러운 고신족의 말인즉슨…….
“내가 최후의 인류라는 말이군.”
“맞습니다. 당신이 이 지구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입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미래, 아니 과거를 바꾸는 건 너한테 달려 있어.
-잘 부탁해, 포식 군주.
-부디 우리의 발악이 가치가 있기를.
최후의 인류, 일명 ‘결사대’는 고신족들에게 정면 승부를 걸었다.
승리할 가능성이 1%도 되지 않는 전쟁.
전면전을 최대한 피해 왔던 최후의 생존자들이 공격 태세로 전환한 건…….
‘내가 황혼의 제단에 도달할 때까지 시선을 끌기 위해서다.’
모두, 이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목숨을 내던졌다.
절망적인 상황을 뒤엎을 방법은 이것뿐이었으니까.
고맙다,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겠어.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두 ‘군주’를 떠올렸다.
성공하기만 하면 너희들도 내 덕에 두 번째 기회를 얻는 것이니.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거다.
기억하는 건 오직 나뿐이겠지만 말이야!
[포식한 정수 - 100%]
[스킬 - 수확의 시간 스킬이 추가됩니다.]
[시간의 개념을 지닌 신의 정수가 이슈타르의 정수에 공명합니다.]
좋아.
마지막 조각이 채워졌다.
짧은 상념을 멈추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드드드드-!
거세게 휘몰아치는 마나 폭풍.
그와 동시에, 전신을 뒤덮고 있던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고신족들의 눈가에 긴장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내가 만전의 상태라면.
저 고신족 중 하나 정도는 길동무로 삼을 정도의 힘은 있다.
나는 [군주]의 위를 얻었으며,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인류 최강의 플레이어였으니까.
히페리온이 두 눈을 부릅떴다.
“네 숨통은 내 손으로 끊어 주마!”
열기를 휘감은 창이 히페리온의 손을 떠나 빛살처럼 쏘아졌다.
한계까지 응축된 신력.
태양을 이 세상에 현현시킨 것 같은 존재감이다.
“필멸자여, 널 소멸시키는 데는 1초면 충분하다.”
틀린 말이 아니다.
저 창에 닿는 순간, 금세 내 몸뚱이가 녹아내리겠지.
그래.
내가 노리는 건 바로 저 막대한 ‘신력’이었다.
푸우욱! 히페리온의 창이 심장을 꿰뚫었다.
내 입에서 커흑 하고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히페리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냥 맞아 줬냐고?”
난 씩 웃었다.
상처가 치유된 걸로 보였겠지.
어디까지나, 겉으로는 말이다.
그 잘난 고신족이 전력을 발휘하게끔 보이기만 하면 됐다.
“히페리온, 그 창을 어서 회수하세요!”
“저 작자가 무슨 짓을……!”
다급히 외치는 고신들.
그건 좀 곤란하지.
양손을 뻗어서 히페리온의 창을 꽉 잡았다.
“마침 에너지가 좀 필요했거든.”
네놈이 말한 1초.
그 정도면 충분했다.
왼손에 쥐고 있던 붉은 돌을 히페리온의 창대에 충돌시켰다.
[여명의 보석이 강한 신력을 감지했습니다.]
[신력을 사용자의 마나로 치환합니다.]
어마어마한 마나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히페리온 녀석, 내 숨통을 끊으려고 전력을 끌어올린 모양이다.
덕분에 지금까지 쌓아 올린 ‘신화’를 발동시킬 충만한 마나를 얻었다.
탑 끄트머리까지 올라오느라 마나가 바닥에 가까웠거든.
[크로노스의 정수가 시간에 간섭합니다.]
[아트로포스의 정수가 현 시간대를 잘라 냅니다.]
[클로토의 정수가 새 시간을 땋습니다.]
[라케시스의 정수가 다시 쓰인 시간을 엮어 냅니다.]
[이슈타르의 정수가 새로이 기록된 과거를 현재로 고착합니다.]
…….
철컥-! 철컥-!
지금까지 [포식]으로 쑤셔 넣은 신들의 격이 히페리온의 신력을 바탕 삼아 무수히 맞물렸다.
인류의 결사대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긁어모은 ‘시간’ 관련 유물.
모든 정수를 몸 안에 받아들였지만, 쇠약해진 몸으로 가동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히페리온의 신력은 몸에 쌓아 올린 [시간] 개념을 가동시킬 만큼 충분한 에너지였다.
역행하는 시간.
몸이 떠오르는 부유감과 함께 히페리온을 포함한 고신들의 형태도 희미해졌다.
“미래, 아니 과거에서 다시 보자.”
나는 중지를 들면서 인사했다.
* * *
붕 떠오른 감각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명멸된 검은 시야 너머로,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나는 몇 번이고 눈꺼풀을 깜빡였다.
샛노란 천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낯설면서도 익숙함이 느껴지는 모순된 느낌.
젊은 시절을 보낸 자취방이었다.
성공인가?
볼을 잡아당겨 봤다.
쭉 늘어나는 살.
아낌없이 힘을 줬더니, 눈물 날 만큼 아팠다.
“하, 하하하.”
안면이 통증 때문에 찌릿찌릿한데도 웃음이 튀어나왔다.
시간 역행.
최후의 도박은 성공했다.
빌어먹을 고신족들조차 할 수 없는 이적.
[시간]과 관련된 신들의 정수를 흡수하여 과거로 돌아왔다.
“언제로 돌아온 거지?”
손을 뻗어서 탁자를 더듬거렸다.
휴대전화가 손에 잡혔다.
[2025년 10월 9일]
[AM 07:06]
휴대전화에 찍힌 숫자를 보니, 회귀한 시점을 기준으로 30년 전이다.
23살.
막 군대를 전역한 때다.
뒤통수에 손을 올려 보니, 머리카락이 꽤 짧았다.
쩝.
군 시절 때로 안 돌아간 게 어디냐, 안도감에 입맛을 다셨다.
“회귀는 성공적인 것 같은데.”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인터넷 기사를 살폈다.
<러시아의 플레이어 세르게이, 탑 49층에서 엘릭서 발견!>
<미국 랭킹 1위 플레이어인 엘렌이 전 세계 최초로 바벨탑 57층 돌파에 성공…….>
<로얄 로드 길드의…….>
바벨탑과 관련된 기사들.
개중에는 낯이 익은 이들의 이름도 보였다.
엘렌, 세르게이.
먼 미래에 【군주】에 오르는 플레이어들이다.
또한, 멸망해 가는 세계에서 어깨를 마주하고 싸웠던 전우이기도 했고.
고신족들이 나서기 전까지는 치고받고 싸웠지만.
나는 과거, 아니 미래가 된 일을 떠올리면서 실실 웃었다.
그나저나.
“저 빌어먹을 탑은 그대로 있구나.”
나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물을 바라봤다.
전 세계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솟아오른 커다란 구조물.
일명 바벨탑(Babel Tower)이다.
바벨탑이 지구에 나타난 것은 10년 전.
어떤 전조도 없이, 전 세계 각 나라의 수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솟아났다.
‘처음에는 탑이 축복이라고 불렸지.’
각종 금은보화.
희귀 질병을 치유해주는 엘릭서.
제3의 에너지원으로 불리게 된 마나 스톤까지.
탑에서 나온 막대한 재화는 전 세계의 경제에 영향을 끼칠 만큼 대단했다.
플레이어들의 인기도 하늘을 찔렀고.
탑의 초청을 받은 이들, 일명 [플레이어]는 새 인기 직업군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 엄청난 재화가 파멸의 전초인 것도 모르는 채로.
‘탑의 보상이 풀려 나갈수록, 차원 동기화도 빠르게 진행된다.’
바벨탑은 지금까지 여러 차원을 집어삼켰다.
시련을 극복할 때마다 나오는 보상은 먹이를 꾀는 미끼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탑을 안 오르면 세계를 지킬 수 있을까?
‘이미 동기화가 시작된 이상, 시간문제일 뿐.’
결국, 고신족들을 쓰러트려야 한다.
싸움을 피할 생각이었으면 회귀를 하지도 않았다.
적당한 신 하나를 성좌로 섬기고 지구를 떠나면 되는 일.
나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두 번이나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음성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바벨탑에서 당신에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부귀영화와 힘, 그리고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곳.]
[목숨을 걸고 도전하십시오.]
[이제부터 당신은 플레이어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날이었구나.
2025년 10월 9일은 탑의 초대장을 받고 [플레이어]가 된 날이었다.
당시에는 세상을 모두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입가에 쓴웃음이 감돌았다.
“상태 창.”
나는 수도 없이 불렀던 명령어를 중얼거렸다.
플레이어 - 유진호
나이: 23
레벨: 1 / 종족: 인간
등급: 언랭크 / 직업: 없음
능력: 포식
힘: 7
민첩: 6
체력: 7
맷집: 6
마력: 1
[능력 - 포식]
생명이나 사물에 깃든 정수를 포식합니다.
*특이 사항
튜토리얼을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레벨을 올릴 수 없습니다.
회귀 전의 상태 창과 비교해 보면 조촐했다.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쌓아 올린 능력은 모두 초기화.
‘제일 중요한 건 그대로다.’
난 미소를 지었다.
포식.
먼 훗날, 나를 최강의 플레이어로 우뚝 서게 해 준 능력이다.
처음에는 저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지.
포식이라는 개념. 나는 그걸 단순히 쓰러트린 괴물의 ‘사체’의 힘 일부를 빼앗는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가까이에 있는 컵을 집었다.
[포식을 사용합니다.]
[대상에게는 어떤 정수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정수 흡수에 실패합니다.]
컵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내 입가에 감도는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난 처음 능력을 얻었을 때만 해도, 쓰러트린 괴물의 사체에서만 정수를 추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포식] 능력의 대상은 유‧무형을 가리지 않았다.
‘정수는 생물체만 품고 있는 게 아니거든.’
넓은 범위로서의 정수는 격과 개념, 그리고 권능까지도 포함한다.
올림포스의 신왕, 제우스에게 바친다는 의미의 올림픽 성화(聖火)를 포식하면?
제우스의 신화 일부를 ‘포식’하는 게 가능했다.
‘전 세계에는 포식이 가능한 정수가 꽤 있단 말이야.’
나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바벨탑 입구가 열리는 건 매월 1일이다.
탑 입장까지는 20일 정도가 남았다.
시간도 있겠다.
철저하게 준비해야겠어.
나는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포식할 수 있는 정수가 무엇이 있을지.
그 정수들을 흡수해서 어떻게 강해질 것인지 차근차근 계획을 세울 시간이다.
고신족들아.
복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