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찬란한 무지개
산티노는 팔딱팔딱 뛰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말이야 3배 넓은 영지를 하사하는 거지.
지금 가지고 있는 영지는 이 지역에서 노른자 중의 노른자인 비옥한 땅이었다. 그런데 지
금 옮기라고 하는 해안가 전체 영지는 반 이상이 척박한 땅이었고 몇몇 귀족들의 고리대
금업으로 영지 백성 대부분이 못사는 곳이었다.
좌천된 거나 다름없었지만 뭐라 찍소리도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이 영지에 치안
부대가 들어서며 그 사령관이 에단이라고 한다.
이러니 더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자신은 그저 꼭두각시다. 말이 이곳 영주지 실세는 사령관인 에단이라는
말이다. 황제가 이곳 모든 행정을 사령관과 합의 하에 진행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통에 저
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게 생겼다. 에단이 누구인가. 뒤로 뭐라도 빼돌리려 하면 칼을 빼
들 놈이다.
그래도 뼈와 살이 뒤틀리는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듣기론 마통단 두 공작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가문도 박살이 나고 모두 천민이 되어 노역
장에 끌려갔다고 한다. 가만히 있었다면 저도 그 꼴이 났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니 이거라도 어디냐.
배알이 꼴리고 머리통이 터질 것 같았지만 죽으면 다 소용없다. 이렇게 살아 있고 지위도
재산도 몰수당하지 않은 것만 생각하련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씩씩거리며 제 끓어오르는 화를 삼키려 안간힘을 써 보지만 열통이 터져 여전히 팔딱팔딱
뛸 뿐이었다.
***
유모의 특제약 덕분에 나날이 벨리타의 발목은 나아 가고 있었다. 매일 세 번씩 특별하게
만든 약물에 발을 30분씩 담그고 찜질도 계속해 주었다. 누가? 당연히 칼리크가 다 했다.
부목은 2주 만에 풀고 깨금발로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절대 하지 못했다. 왜? 이것도 당연
히 칼리크 때문이다. 땅에 발도 못 딛게 했다. 이러다 다 나으면 걷는 법을 잊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웃음이 나왔다. 물론 좋아서 웃는 거다.
붓기는 벌써 다 빠졌고 통증도 사라진 지 오래다. 다만 아직 걷는 것은 무리다. 그녀 역시
절대 무리하지 않았다. 지금 저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극정성인데 그러면
양심도 없다.
몇 주를 온종일 붙어 있는데도 그저 좋기만 했다. 하긴 칼리크는 더 좋아했다.
드디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날이 되었다. 사실, 더 일찍도 가능했지만 칼리크가 겁을 먹었
다.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그가 자제했다. 살짝 서운하기도 했지만 존중해 주었
다. 자칫, 못 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비칠까 신경도 쓰였기 때문이다.
주치의에게 여러 번 묻는 칼리크 때문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지만.
정말 사랑을 나눠도 되겠냐고 직접 물어볼 줄은 몰랐다. 황제가 직접 그런 걸 묻다니. 달아
오른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못 말린다.
“그래도 절대 움직이지 마시오.”
그녀 몸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단단한 몸을 겹치면서도 계속 걱정만 하길래 먼저 키스를
해 버렸다. 입을 봉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다.
인고의 시간을 보낸 칼리크는 신음을 연거푸 흘리며 이내 빠져들었다. 미치도록 그녀를 사
랑했다. 열렬히 사랑했다. 조심조심 자신의 열정을 그녀에게 모두 쏟아부었다. 황홀했다.
아주 공들여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며 저 높은 곳에 함께 올랐다. 그의 온몸
이 부르르 떨며 희열에 몸부림쳤다.
너무 행복했다. 눈물이 다 날 정도로 행복하고 또 행복했다.
“사랑해. 벨리타.”
언제 이 말을 들을 수 있나 속으로 점쳐 보았었다. 이제야 들어 본다. 물론 말이 중요한 것
은 아니지만 그래도 듣고 싶었다. 사랑의 고백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해 꼭 받아 보고 싶
었다. 그렇게 제 소원을 풀었다.
그녀가 듣기만 하고 그 말을 되돌려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칼리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자신
의 사랑이 더 크니 그것으로도 만족하는 듯 보였다.
지금 말고 나중에.
나중에 해 줄 것이다.
그날.
그날이 언제인지는 비밀이다. 하지만 곧이다.
서로를 보듬고 잠이 드는 두 사람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 보였다.
***
그렇게 몇 주가 흐르자 드디어 칼리크의 서른 번째 생일이 돌아왔다. 중요한 일들이 많아
유클로 왕국은 그 이후에 가기로 결정했다. 아직 그곳에서 정리하지 못한 일들이 많았다.
아무도 올 수 없는 유클로 왕국만 제외하고 각국에서 국왕 내외와 중요 대신들이 참석하
느라 황궁이 들썩거렸다. 며칠 전부터 속속 도착하는 그들이 각 별궁에 묵느라 황궁 안 사
람들이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물론 펠론국에서도 국왕 내외가 도착했다. 그
런데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얼마나 식겁했는지.
기억에 없는 이 몸의 부모님을 처음 만나는 자리라 많이 긴장했다. 무사히 잘 넘어가야 했
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리크의 품에 안겨 부모님이 기거하는 별궁으로 향하면서도 입 안이 마를 지경이었다. 사
실 이제는 살살 걸어 다녀도 되는데도 칼리크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안
고 들어가 소파에 앉혀 주고는 편한 시간 가지라고 자리를 피해 주었다. 매너까지 완벽하
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국왕인 벨리타의 아버지는 칼리크가 나가자마자 달려와 끌어안
고 눈물을 흘리셨다. 역시 다정다감한 아버지셨다. 그녀의 얼굴을 만져 보고 쓰다듬고 아
주 난리가 나셨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천천히 다가오셨다. 어머니의 외모도 눈부셨다.
그런데… 자꾸 고개를 갸웃하시며 세심히 그녀를 훑어 내리셨다. 더 긴장되었다.
공손히 인사를 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날아오는 첫마디가.
“넌 누구냐?”
벨리타의 파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들켰나? 어디서 어떻게 알아보신 거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완전 얼어 버렸다.
“여보. 왜 겁을 줘요? 우리 아가가 떨고 있잖아요.”
아버지의 말투가 예상을 뒤엎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뒤바뀐 느낌이었다. 이런 분이셨구
나.
“내가 알고 있는 벨리타가 아니어서 그렇죠.”
하하. 그…렇죠?
인정한다. 개망나니 그 벨리타가 아닌 것을.
“된 사람은 이렇게 알아서 잘 변하는 법이오. 우리 딸이 당신을 닮아 현명하다는 증거요.”
공처가이자 애처가이심을 의심하지 않으련다.
“그런가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고. 어머니께서 바로 의심의 싹을 지우셨다.
“네가 새로 태어난 듯 보여 정말 안심이구나. 그래. 이래야지. 그래야 내 딸이지.”
그제야 어머니께서 벨리타를 안아 주셨다. 등까지 토닥거리시며 매우 흡족해하셨다.
휴… 십년감수했다.
어찌 되었건 두 분과의 첫 만남을 그렇게 잘 넘겼다.
***
날씨도 너무 좋았다. 거대한 야외 연회장에 모든 축하 손님들이 착석하고 흥겨운 축제가
벌어졌다. 몇 날 며칠 이곳을 꾸미느라 황궁 사람들이 땀을 흘렸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제 손으로 연회장을 꾸미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여겼다.
카르탄 제국 황제의 서른 살 생일을 축하하며 모두가 대연회를 즐겼다. 축하의 선물이 지
루할 정도로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다들 왜 단상에 황제 혼자 앉아 있는지 조금씩 의아해
하기 시작했다.
우와.
황제 폐하 만세.
모두가 황궁이 떠나갈 듯 외쳤다. 황제가 신수를 그들에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늠름하
고 웅장한 호랑이 신수가 많은 이들의 머리 위를 유연하게 날아 제 존재를 과시했다.
황제의 위엄을 보인 것이다.
함성이 잦아들 무렵 연회장으로 마차 하나가 천천히 다가왔다. 순백색 마차가.
다들 고개를 기울이며 그 마차에 집중했다.
문이 열리고 근사하게 갖춰 입은 안톤이 마차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두 눈에는 존
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살포시 내려선 그녀를 보고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모두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천사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사.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보고 있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순백색의 천사,
아니 신부였다. 그녀의 뒤로 날개가 펴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뒤이어 모두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일제히 일어나 박수까지 치기 시작했다.
반짝이며 풍성하게 퍼진 순백색 드레스, 곱게 땋아 올린 붉은 머리 위로 빛을 내고 있는 앙
증맞은 티아라, 아름답게 수놓아진 레이스 면사포가 그녀 뒤로 길게 늘어져 있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습에 모두의 박수 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칼리크 역시 넋이 나가 있었다. 며칠 전 그녀가 처음으로 부탁을 해 오길래 흔쾌히 들어줬
더니 모두의 혼을 다 빼놓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며칠 전.
“사실 제가 기억이 잘 안 나는 부분들이 많아요. 특히 결혼식이요.”
웨딩드레스 한번 못 입어 보고 이대로 살게 되나 싶어 그것 하나가 아쉬웠다. 자신도 별수
없는 여자인가 보다. 하지만 꼭 한번 입어 보고 싶었다. 기억에도 없는 결혼식을 이미 치르
고 부부인 상태에서 빙의를 했으니 좀 억울하긴 했다.
제 결혼식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욕심 한번 내 보았다. 뜬금없다 여겨 반기지 않으면
접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칼리크가 누구인가. 벨리타라면 껌뻑 넘어가는 남편이다. 원하는
대로 다 해 주겠다고 바로 약속을 했다.
그다음부터 바빴다. 만들기엔 시간이 없어 가장 예쁜 웨딩드레스를 고르느라 유모와 시녀
들까지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늘도 곱게 단장해 준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두고두고 다
보상해 줄 것이다.
모두의 찬사를 받으며, 특히 저쪽에 앉아 계시는 어머니께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는 걸
보며 한발 한발 칼리크에게 다가갔다.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런 축복받은 날까지 온 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다. 이런 또 다
른 삶을 주신 신께도 감사드렸다. 더 잘하고 살 것을 맹세하며 조심조심 걸어갔다.
벌떡.
저 앞에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던 칼리크가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나 단상을 내려오고 있
었다. 그리고는 다가왔다. 아직 더 걸어가야 하는데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아예 달려오고
있었다.
“아직 걸으면 안 되오.”
다가오기 무섭게 번쩍 안아 들었다. 이 많은 축하객 앞에서.
더한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칼리크는 오로지 제 팔에 안긴 벨리타만 눈에 보
였다. 모두의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다시 연회장은 조용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칼리크가
큰 소리로 외쳤다.
“가장 큰 선물이 이제야 왔습니다.”
기껏 잦아든 박수 소리와 환호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정말 못 말린다.
자신이 한 말대로 가장 소중한 선물을 경배하듯 안고 걸어가는 칼리크의 얼굴이 눈부셨다.
그의 마음이, 저에 대한 사랑이 더 눈부셨다. 가슴이 벅차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랑해요. 칼리크.”
잠시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은 채 그녀에게 못 박혔다. 어리둥절한 눈빛이었다. 그러
나 곧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너무나 행복해했다.
그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밀려오는 감동에 몸을 맡겼다.
“사랑하오. 벨리타.”
“알아요.”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사랑이 꿀처럼 뚝뚝 떨어졌다.
“내가 더 행복하게 해 주겠소. 평생.”
자신의 말을 맹세라도 하듯이 그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왔다.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만났다.
두 사람의 사랑과 행복을 축복하듯 하늘 위로 찬란한 무지개가 나타났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아지기만 했다.
칼리크는 단상까지 뿌려진 꽃잎을 밟으며 천천히 나아갔다. 두 사람의 축복받은 미래를 향
해.
모든 이들의 얼굴엔 행복과 희망만이 가득 차올랐다.
제국 모든 백성들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사랑과 행복 그리고 희망이 제국 전체를 가득 뒤덮었다.
그들이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