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이제 시작이다.
“그냥 가만히 누워 있어도 돼. 어서 벗고.”
싫어. 나한테 이러지 마.
벨리타는 누운 채로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이젠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
어 버렸다. 에무르를 저지할 힘조차도 없다. 이렇게 당하긴 싫다. 정말 싫다. 죽기보다 싫
다.
“내가… 아직도 벨리타로 보여?”
덜덜 떨리는 이를 악물고 대항했다.
“무슨 말이야. 당연히 벨리타지.”
진실을 알려 주지. 믿지 않겠지만. 여기까지 몰렸는데 못 말해 줄 건 없었다.
“나 벨리타 아냐.”
그녀를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에무르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심장 마비였는지 뭐였는지. 그때 이 자리. 여기서 바뀌었어. 그러니 네가 알고 있는 그 벨
리타가 아니라고.”
처음보다 에무르의 표정이 점점 기괴해져 갔다. 그러더니 그녀 가까이 가만히 앉으며 다가
왔다.
자신에게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 이무기에게 머리부터 잡아 먹히기 직전인 것처럼 공포
스러웠다.
“황제한테 맞았어? 그래서 이렇게 이상해진 거야?”
에무르의 손이 측은하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내렸다. 손 떼. 만지지 마.
“그놈이 폭군이라 제 아내도 팼나 보네.”
이렇게 미친놈인 줄 몰랐다. 이런 놈한테… 고작 이런 놈한테 당할 순….
아악.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지르며 그를 밀어 냈다. 이미 에무르는 그녀에게 몸을 겹치며 옷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저리 가. 날 놔둬. 이 미친놈아.
서늘한 산바람이 훤히 드러난 다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에무르의 손이 더 다급하게 움직이
며 그녀의 옷을 벗겨 냈다.
“안 돼!”
있는 힘껏 저항하며 소리를 질렀다. 싫어! 안 돼!
쿵.
눈물범벅이 된 벨리타는 순간 두 팔과 몸이 자유로워진 걸 느꼈다.
크아앙.
아니. 이 소리는.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여기에.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칼리크가 왔다.
***
그곳이다.
그곳밖에 없다.
칼리크는 신수를 타고 정신없이 그 숲속으로 날아갔다. 제발… 무사하기를.
그녀에게 이따위 짓을 한 에무르를 죽여 버리고 말겠다.
그 산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두 눈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갔다.
아악.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산 쪽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자 눈이 뒤집혔다. 벨리타다!
벨리타가 위험에 처했다. 안 돼! 벨리타.
에무르 이놈. 손가락 하나만 건드렸어도 넌 죽은 목숨이다.
신수가 소리가 난 곳으로 하강하기 시작하자 칼리크의 눈에도 점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
했다. 누워서 저항하는 벨리타와 위에 올라타고 겁탈 직전인 미친놈.
신수에게서 미끄러지듯 내려서자마자 발로 그놈의 머리통을 걷어차 버렸다. 순식간에 저
멀리 나가떨어진 놈에게 다가가 사정없이 짓밟아 버렸다.
시끄러운 소리에 달려오던 적들이 호랑이 신수를 보자 죽어라 도망치기 시작했고 칼리크
는 자신의 신검을 그들에게 날렸다. 비명 소리가 낭자하게 들리더니 신검이 그에게 다시
돌아왔다. 순식간에 처리한 것이다. 캄캄한 숲속이니 더 간단했다. 검 한번 휘둘러 보지 못
하고 적들은 모두 쓰러졌다.
벨리타를 보호하러 호랑이 신수가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을 감싸듯 가까이 온 호랑이 신수
에게 얼굴을 묻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지금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기쁨의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죽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뻗어 칼리크의 공격을 받던 에무르는 있는 힘껏 저항했다. 그러
나 칼리크에겐 역부족이었다.
더 이상 이런 놈은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쿠로 있는 곳으로 보내 주지.”
칼리크는 검을 살벌하게 뽑아 들었다.
***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벨리타는 두 눈을 꼭 감고 신수에게 파묻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오로지 호랑이 신수와 그 주인, 칼리크의 존재만을 느끼고 싶었다. 더러운 이곳에서 그만
이 오아시스 같았다.
두 손으로 귀도 막았다.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비명 소리.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눈도 귀도 꼭꼭 틀어막았다.
“벨리타….”
귀까지 틀어막은 두 팔을 살며시 잡는 손길에 벨리타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손길만으로
도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흐어엉.
칼리크의 품에 안기며 대성통곡하듯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소리 내어 엉엉 울어 버렸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래서 지금 얼마나 고마운지.
칼리크….
“옷에 피가….”
“내… 피… 아니에요.”
울음 섞인 벨리타의 대답에 그제야 안도한 칼리크는 있는 힘껏 그녀를 안았다.
아….
그녀를 안고 이제야 안도하는 칼리크 역시 눈가가 촉촉해졌다. 잃는 줄 알았다. 그녀를.
벨리타를 어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다.
그는 그녀를 안아 올리려다 크게 비명을 지르는 통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다쳤
다. 살펴보니 발목이 거의 두 배로 퉁퉁 부어올랐다. 저 죽일 놈. 아니다. 이미 죽었다.
어서 황궁으로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칼리크는 주변에서 두툼한 나뭇가지 둘을 가져와 다친 발목 양쪽에 대고는 자신의 망토를
찢어 그 주변을 단단히 감싸서 묶었다. 이렇게 하면 황궁에 갈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
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 고통이 극심할 테니.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어서 황궁으로 가자.
***
평화로웠다.
황궁도 제국도 다시 평화와 안정을 되찾았다. 물론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벨리타의 발
목은 부목을 댄 채 붕대로 감아져 있었다. 그거 하나 빼고는 칼리크에게 큰 걱정거리는 없
었다.
돌아와서도 계속 벨리타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대신 어디건 그가 안고 다녔다.
그녀의 손과 발이 되겠다며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옆을 지켰다. 업무도 그녀를 집무실 소
파에 안아다 앉혀 놓고 해 나갔다. 그래야 안심이 되었다.
벨리타는 그의 부탁대로 맘 편히 휴식을 취했다. 발은 다쳐서 그런다고 해도 손은 멀쩡한
데 아무것도 못 하게 한다. 먹는 것도 다 떠먹여 준다. 마치 아기가 된 것 같았다.
“마마. 누리세요.”
유모의 조언이다. 그냥 눈 딱 감고 누리라면서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회복에 집중하라 잔
소리도 했다. 그럴까? 칼리크가 딱 붙어서 모든 수발을 다 들어주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사실 무지 아팠다. 다행히 부러지진 않았지만, 퉁퉁 부은 발이 두 배로 커져 있었다. 조금
만 움직여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빠른 회복을 위해 누리기로 했다.
칼리크에게 지극정성으로 돌봄을 받는 것도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 같아
흔쾌히 즐겼다. 뭐 이런 맛도 있어야지.
딱 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하더니 그 말을 지켰다. 한시도 저와 떨어지
지 않으려 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다시 잠들 때까지 시선이 닿는 곳에 있었다. 이런 것도
나름 즐거웠다.
발목이 나을 때까지 사랑을 나누지 못하지만 칼리크는 더 성심성의껏 그녀를 돌보았다. 그
래서인가 주치의가 놀랄 정도로 회복이 빠르다고 좋아했다. 흐뭇했다.
이런 날만 가득할 거라는 기대감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칼리크가 그런 그녀에게 이보다
더 좋은 날이 가득할 거라 말해 주어 더 행복해졌다.
그래.
이젠 나도 누려야겠다.
누릴 자격이 있다.
창가로 가득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황제 집무실 소파에서 나른한 고양이처럼 평
온하게 꼬박꼬박 졸았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칼리크의 얼굴에 근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
다. 자신 앞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벨리타 모습이야말로 그를 가장 행복하게 했다.
우린 더 행복해질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
칼리크는 내란을 일으킨 자들을 처리해 나갔다. 내란과 로카 왕국이 쳐들어온 것이 연장선
에 있기에 몇몇은 사형을 집행했다.
황궁 감옥에 갇힌 베를루스 공작과 옌슨 공작이 황제 앞으로 끌려왔는데, 아주 가관이었
다.
서로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기 바빴다. 모함이라고 울부짖었다.
쿠로파 귀족들에게 서신을 증거로 내밀었을 때도 서로 제 이름은 없을 거라 자신하며 결
백하다 우겨 댔다. 그래서 가관이라는 것이다.
반란을 주도하면서 보낸 서신을 서로 상대방 이름으로 보냈으니 말 다 했다. 서로에게 덮
어씌우려는 생각도 어떻게 저리 똑같이 했는지. 아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저런 것
들이 한편이라고 반란을 도모했으니 죽은 쿠로도 어지간히 보는 눈이 없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꼴은 또 어떻고.
“두 가문의 영지와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두 사람은 3일 후 처형한다.”
칼리크가 명하자 그제야 두 사람은 울며불며 살려달라 애원했다. 이미 늦었다.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추한 모습은 다 보이며 사라졌다.
반란에 가담한 다른 귀족들도 감옥에 가두었다. 영지와 재산, 지위를 몰수하고 천민으로
강등시켰다. 목숨이나마 살려 준 것을 감사히 여기며 그 가문 사람들은 노역으로 평생 죄
를 갚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약삭빠른 쥐새끼 같은 산티노 공작.
개인감정이야 어떻든 간에 공을 세운 건 사실이다. 에단을 돕고 나라를 이롭게 했다. 물론
안다. 그런 깊은 뜻이 있었던 건 절대 아니라는 걸. 제 한 목숨 살리려고 꾀를 낸 것이라는
걸. 그래도 처형을 명한 이 두 공작보다는 훨씬 나은 꾀를 부렸다. 그 공을 참작해 상을 내
렸다.
“산티노 공작은 지금 가진 영지에서 이동해 이번에 큰 공을 세운 해안가 영지 전체를 맡는
다. 영지 규모가 3배로 커진 만큼 더 성실히 관리해줄 것을 믿는다.”
산티노 공작이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목숨 하나 살려 준 것만으로도 아무 불만을 제기할
수 없을 터. 어디 잘해 봐라.
그다음, 에단을 비롯해 자칼단에게 큰 상을 내렸다. 그들에게 자작의 지위를 하사하고 벨
리타가 그들에게 약속한 대로 그 지위에 맞는 저택과 영지를 상으로 내려 주었다.
그리고 에단을 따르며 적들을 잘 막아 준 민병들과 평민들에게도 상을 내렸다. 비옥한 땅
을 적절하게 나누어 주었고 부과되어 있는 세금들을 면제해 주었다. 필요한 곡식들 또한
풍족하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치안 부대를 만들어 그곳에서 에단과 같이 일할 수 있게 자
리도 마련해 주었다.
그렇게 이번 일을 마무리를 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