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짐승만도 못한 놈
에무르는 애당초 계획했던 대로 이 산 넘어 대기시켜 놓은 배에 올라타고 바다로 나가 유
람하면서 로카 군이 황궁을 점령하고 승리하면 그때 돌아올 생각이다. 지난번 실패로 끝난
계획을 벨리타와 같이 누릴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또다시 온몸이 뻐근해져 왔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벨리타에게 다가간 에무르는 그녀를 깨우기 시작했다. 이제는 일어날
때가 되었다. 벨리타… 어서 일어나 봐. 이제 우리만의 시간이야.
그녀를 안아 들고는 계속해서 속삭였다. 어서 일어나 이 뜨거워진 몸을 식혀 달라고. 당장
이라도 키스할 기세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는 뜨거워진 숨결을 그녀에게 흩뿌렸다. 드디
어 벨리타의 두 눈이 껌뻑거렸다.
지난번처럼 놀라 저를 밀쳐 내 버리지 못하게 그녀의 두 팔을 강하게 잡았다. 역시나 몸을
꿈틀대며 빠져나오려고 용을 썼다.
“벨리타. 나야. 에무르. 그러니 진정해.”
이제야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그녀의 몸이 잠잠해졌다.
“에…무르?”
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제 이름이 그렇게나 감미로울 수 없었다. 벌써 그녀를 쥐고
있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 사랑스러운 벨리타의 입술에 홀려 강하게 입술을 밀어붙였다. 벌꿀
을 머금은 듯 다디달았다. 황홀했다. 짜릿했다. 자연 엄청나게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우웩.
벨리타는 구역질이 나려는 걸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한 번의 더러운 키스로 단박에 정신
이 들었다.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게 고개를 흔들며 괴로운 숨을 헐떡거렸다.
“아… 미안. 벨리타. 아직 정신이 들지 않았을 텐데….”
안쓰러워하면서도 숨을 격하게 쉬고 있는 에무르를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끔찍했다. 그래도
입술을 떼 주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일단 에무르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척, 정신
이 든 척 몸을 움직였다. 옆에서 불안하다는 듯 제 팔을 꼭 잡아 주는 에무르를 떨구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이런 젠장.
그런데 여기가 어디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장소다. 완벽하게 그때와 똑같이 재현해 놓았다. 어두운 숲속,
그리고 모닥불까지.
이 세계로 빙의한 첫날, 눈을 뜬 그 장소.
어떻게 에무르가 이곳에 같이 있게 된 것인지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쳐들어오자마자 혼자서 여기까지 온 건가? 그렇다면 그 정도로 벨리타에게 미쳐 있다는
말이다. 완전 또라이라는 말.
큰일 났다. 어서 도망쳐야 하는데 아예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에무르… 마실 것 좀….”
그가 얼른 모닥불 근처에서 물을 한 잔 따라 가져왔다. 천천히 마시면서 궁리를 해 보았다.
조금 더 멀리 떨어져야 도망이라도 치겠는데. 그 전에 에무르를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
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억지로 상냥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놀랐을 거야. 약속한 대로 이렇게 다시 찾으러 왔어. 많이 기다렸지?”
미치겠다.
“혼자 온 거야? 위험하게.”
상황 파악 먼저 해야 한다.
“미쳤어? 지금 저 아래 내 충복들이 깔려 있어. 걱정 마.”
걱정해 주는 소리인 줄 알고 에무르의 입이 찢어졌다. 확 입을 꿰매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
다. 그 말은 도망치기 힘들다는 뜻이다. 미치겠다.
“이제 우리 둘이서 꼭 붙어 있자. 절대 떨어지지 말고.”
“그…럼.”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려니 목소리가 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친 에무르는 행복에
겨워 목소리가 떨렸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역시 또 입이 찢어졌다.
“우리 그때 못 했던 일. 마저 하자.”
소름이 끼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느니 죽는 게 낫다.
“그래. 우리 다시 시작해.”
점점 잘 비위를 맞추고 있는 자신이 놀라울 뿐이었다. 바로 옆에서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
가 아주 역겹게 들렸다.
“내가 너무 늦어서 화나진 않았어?”
지금 이렇게 다짜고짜 납치를 해서 화가 났다.
“이렇게 만났잖아.”
“어? 많이 너그러워졌는데?”
에무르의 고개가 슬쩍 옆으로 기울어졌다. 벨리타가 좀 달라진 것 같이 보였다. 어딘가 모
르게 낯선 느낌이 들었다.
벨리타는 에무르가 잠깐 긴장하면서 뭔가 의아해하는 것 같아 얼른 그의 팔짱을 끼며 무
마시키려고 했다.
“모닥불 너무 멋있네. 우리 저기 같이 앉을까?”
다행히 그의 얼굴이 풀어졌다. 나란히 모닥불 앞에 앉아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것저것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그의 경계심을 풀어 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에무르가 자꾸 몸을 부딪치며 성급하게 안으려고 들었다. 더 이
상 시간을 끌면 안 될 것 같았다.
“저… 에무르… 달링. 화장실에 가고 싶어.”
이 정도 애교는 떨어야 믿지 않을까. 아니 에무르에게는 이렇게 말을 했을 것 같았다. 역시
저놈의 입은 또 찢어졌다.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모닥불이 있는 장소에서 좀 떨어진 수풀 사이로
그가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서 주었다. 프라이버시는 지켜 주겠다는
건가? 그래도 너무 가까웠다.
“에무르. 조금 더 떨어져 주면 안 될까?”
“뭐 우리 사이에….”
“부끄럽잖아.”
목적을 위해 하는 수 없이 살살 구슬렸다.
뭐가 좋은지 싱글싱글 웃으며 그래도 조금 더 떨어져 줘서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다. 소
리 나지 않게 살금살금 뒷걸음을 치며 좀 더 거리를 벌렸다.
지금이다.
그녀는 한 번 도망친 전적이 있는 이 산속을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깜깜한 밤이고 길도 제
대로 나 있지 않은 산비탈을 미끄러지며 죽어라 도망쳤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허겁지겁 쫓아오는 에무르가 정말 지긋지긋했다. 똑같은 일을 두 번
하는 심정은 오죽하겠는가.
손으로 잔가지들을 쳐 내면서 그저 앞으로 내달렸다. 여기저기 긁히고 생채기가 나는 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로지 달빛 하나만 의지한 채 계속 달릴 뿐이었다.
어디까지 쫓아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젠 제 이름도 부르지 않으니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얼른 두리번거리다 잔가지가 엉켜 있는 곳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숨자.
이곳이라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지난번에는 칼리크와 키스하다 기절하는 바람에 이 산 아래로 어떻게 내려갔는지 기억이
없다. 원통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거칠어진 숨을 억누르며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조금 있으니 근처에서 풀과
떨어진 잔가지들을 밟는 발소리가 들렸다. 에무르다.
어서 지나가기만을 숨죽여 기다렸다. 웅크리고 앉아 있는 바닥이 젖어 있어서 오래 있지
못할 것 같았다. 여기가 왜 이리 축축한지 모르겠다. 산 전체가 바짝 말라 있는데 여기만….
땅을 짚고 있는 손에 물기가 묻었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그녀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희미한 달빛을 의지해 뭐가 묻었나 들여다보다 점점 두 눈동자가 굳어 버렸다. 물 같은 것
이 아니라… 뭔가 시커먼 것이 손바닥에 묻어 있었다. 그리고… 뭔가 비릿한 냄새도 나는
듯했다. 뭐…뭐지?
갑자기 이 공간이 음산하게 느껴지는 것이 등골이 싸했다. 고개를 천천히 돌려 양쪽 주변
을 살펴보다 이상한 걸 발견했다. 다리가… 보였다. 사…사람이 누워 있다…. 아니 미동도 하
지 않고 있는 것이… 죽은… 시체….
사시나무 떨듯 온몸이 떨리며 동공이 확장되었다. 몸이 보이고… 그 위로….
아악.
없다.
머리가 없다. 살해당한 시체 옆에 자신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찾았다.”
아악.
목이 없는 시체를 보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던 모양이다. 덜덜 떨면서, 그녀 위를 덮고
있던 잔가지를 치우는 에무르를 겁나는 시선으로 올려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하.”
에무르가 가지 사이로 드러난 벨리타를 보다 그 옆을 쓰윽 훑더니 음산하게 미소를 지었
다.
“저놈이 죽으면서 그래도 한 번은 내게 좋은 일 하나 하고 가네.”
벨리타는 누가 이자를 죽였는지 알아차렸다. 에무르를 다소 만만하게 봤었고 도망치기 전
까지는 그렇게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색이나 밝히는 왕자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 누구보
다도 무서운 존재였다. 악마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다.
“자꾸 이러면 내가 기분이 좋을까, 나쁠까?”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는 에무르가 너무나 두렵기만 했다.
“지난번도 지금도. 왜 나한테서 도망치지?”
충격과 공포로 입이 붙어 버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더는 도망치지 못하게 하면 되겠네.”
에무르의 말투에서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무슨 짓을 하려고….
콱.
으득.
“아악!!”
그녀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메아리치듯 그 소리는 날카롭게 산속을
흔들었다.
“이제 도망 못 칠 거야.”
아픔으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그녀를 에무르가 번쩍 안아 들었다. 그녀의 한쪽 발목이 뒤
틀려 있었다.
“안 걸어도 돼. 내가 안고 갈게.”
이자는…
미쳤다.
끔찍하게 올라오는 고통에 벨리타는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발목이 끊어져 나가는 것 같았
다. 에무르가 있는 힘껏 자신의 발목을 부서지게 밟아 버렸기 때문이다.
충격, 공포, 고통이 연이어 몰아치는 통에 벨리타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너무 아파….
칼리크….
다시 정신을 차린 벨리타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직 먼 곳에 있는 칼리
크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칼리크….
아무도 이곳에 있는 저를 구해 줄 사람은 없다. 아무도.
그것이 너무나 무섭고 서러워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벨리타. 많이 이상해졌어. 내가 다 고쳐 줄게. 걱정 마.”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저 얼굴을 보고 싶
지 않았다.
“스스로 벗을래, 내가 벗겨 줄까?”
억지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그는 벌써 겉옷을 벗은 채 아주 가벼
운 옷차림이었다.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머릿속에 든 거라곤.
짐승만도 못한 놈.
누워 있던 벨리타는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 보려 움직이다 다시 비명을 질렀다. 부러진
발목의 통증이 머릿속까지 날카롭게 찌르듯 올라왔다. 너무 아프고 두려워 아무것도 할 수
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이놈에게 꼼짝없이 당할 일만 남았다. 누구든… 제발… 날 도와주세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