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데자뷰
몇 시간 전, 벨리타는 황궁 근처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내란 중 다치거나 집이 부서진 경우
가 더러 있어 어제에 이어 오늘도 직접 시찰을 나갔다. 물론 데인 대공과 논의를 끝마친 후
움직인 것이다. 황도는 안전했으며 단단히 호위를 하면 문제없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것이 싫어 그녀는 황후로서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게 시녀들과 호위군을 대동하고 가 보았더니 생각보다 다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을
위로하고 치료와 수리를 빈틈없이 하라 명하며 한 집 한 집 둘러보면서 그들에게 힘을 실
어 주었다.
그렇게 어제와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어린 소년이 다가왔다. 다소 쭈뼛
거리는 모습에 벨리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엄마가… 집에 쓰러져 계시는데….”
바로 알아들었다. 어서 가 보아야겠다. 도움 요청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분명했다. 소년이
달려가는 곳으로 호위군들을 이끌고 서둘러 따라나섰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자 누군가 그녀의 입을 재빨리 틀어막으며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
서 호위군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고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입을 틀어막은 손수건에 약물이 묻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바로 기절을 해 버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아픔에 얼굴을 찌푸리며 가냘픈 신음 소리를 흘렸다. 서서히 깨어나
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저를 깨우는 소리가 자꾸 들려왔다. 억지로 억지로 눈을 뜨
고 보니 짙은 초록 눈동자에 잘생긴 금발의 남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거리
가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거의 얼굴이 닿을 것처럼 다가온 남자가 자꾸 제 이름을 부르
고 있었다.
데자뷰.
이런 일이 전에 또 있었다. 자신이 처음 이곳으로 빙의했을 때 그 상황과 똑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남자는!
에무르?
***
에무르는 카르탄 제국 해안가 마을을 앞두고 바다 위에서 명령하다 은근히 상황을 살폈다.
계속해서 절벽 위로 올라가고 있는 로카 왕국 군사들을 바라보며 승리를 장담했다. 저곳을
알아서 점령할 것이다. 에무르는 슬쩍 옆에 있는 충복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자신이 탄 배만 슬쩍 옆으로 빠져 다른 곳으로 상륙하고는 서로가 싸우고 있는 틈을 타, 옆
길로 몰래 빠져 싣고 온 명마를 타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따르는 자 20여 명. 직
접 뽑은 충복들이었다.
아마도 자신은 자리를 비우고 명령만 남긴 것을 두고, 같이 온 사령관들이 불만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이없어도 명령은 따라야 할 것이다. 어처구니없겠지. 전쟁이 뭔
지 하나도 모르는 게 명령이나 하고 있다 욕했겠지. 왕자인 자신이 그 자리에 있지도 않고
황도로 먼저 내뺐으니 미치고 환장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벨리
타뿐이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달려와 황도에 묻어 들어갔다. 약간의 변장을 하고는 흩어져 황도에
서 정보를 수집해 보니 황궁을 점령하고 있어야 할 쿠로가 실패했다는 걸 알아냈다. 그것
도 모자라 죽임을 당했다는 것도.
이런 개같은 경우가 다 있나.
쿠로가 죽거나 말거나 상관은 없는데 이렇게 되면 제 계획에 큰 차질이 벌어진다. 황궁을
점령하고 있어야 바로 당당히 들어가 벨리타를 데리고 나올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되면 계
획을 크게 수정해야 한다. 어떻게 벨리타를 데려갈 수 있나….
아. 그래. 땅굴이 있었다.
몇 달 전, 죽은 쿠로와 협상을 할 때 자신을 구출해 나온 땅굴에 대해 물어 자세히 설명을
들었었다. 몰래 잠입할 수 있는 방도가 생겼다.
에무르는 서둘러 같이 온 충복들 몇 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는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래. 어떻더냐? 정말 있더냐?”
말로만 들었기에 정말 그 땅굴 입구가 황궁 바깥에 숨겨져 있는지 정찰을 시켰다.
“그게… 입구는 있었는데 이미 그 일대를 기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어라?
이러면 안 되는데.
벨리타를 만나야 하는데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소리다. 막혔다. 여기
까지 잘 왔는데 바로 코앞에서 막혀 버렸다.
등신 같은 쿠로 새끼.
혼자 잘난 줄 알고 설쳐 대더니 이 꼴이나 만들고. 저나 잘할 일이지 얼마나 저한테 신신당
부를 하고 염병을 떨었는지. 꼴 좋다.
에무르는 피가 바짝바짝 말라 갔다. 벨리타가 가까이 있는데 보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
다니. 쿠로가 실패했어도 벨리타 하나는 갖고 말 테다. 벨리타만 가지면 된다. 오로지 벨리
타만 원하는 에무르는 거의 미쳐 있었다. 아니 완전히 미쳐 있었다.
이미 해안을 뚫고 로카 왕국 군이 황도를 향해 진군하고 있을 터. 승리하는 건 당연한데 군
사들이 황도까지 올라와 벨리타를 만나려면 그것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 하루라도 빨리 손
에 넣고자 미리 올라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개떡 같은 상황이 자신 앞에 펼쳐질 줄이야.
쿠로 넌 죽었어도 좋은 곳엔 절대 못 간다.
이를 갈면서 머리를 굴리느라 에무르는 바빴다. 몰래 변장이라도 하고 들어가 볼까 계획했
으나 황후궁이 불탔다는 정보를 얻고는 그것도 집어치웠다. 황후궁이 아니면 벨리타가 어
디 있는 줄 알고 그 넓은 황궁을 뒤진단 말인가.
어휴. 이것도 막혀 저것도 막혀. 환장할 노릇이었다. 눈이 뒤집혔다.
벨리타가 저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까, 그것만 생각하면 애간장이 타들어 갔다. 물론 저
도 그녀가 보고 싶어 속이 뭉그러졌다.
결국, 결론은 하나. 자신들이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벨리타가 황궁 밖으로 나오는
수밖에. 그게 언제가 될지 몰라 미치고 돌아 버리겠지만.
그런데. 하늘이 도우셨다.
그녀가 시찰을 나온 건지 황궁 근처 민가를 돌며 백성들을 살피고 돌아갔다. 첫날은 염탐
을 하느라 당장 실행하지 못했다. 계획도 짜야 했다. 다행히 다음 날도 시찰을 나온다고 하
니 실로 행운이 따라 주는 상황이었다.
벨리타가 이런 일까지 할 줄이야. 죽어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 벨리타
에게 적응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저렇게 하는 거겠지. 애쓰
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더더욱 그녀가 측은해 보였다. 마음에도 없는 이런 시찰까지 해야
하는 황후라니. 그래서 그는 더 편하게 놀고먹는 황후로 만들어 줘야겠다고 또 한 번 다짐
을 했다.
서둘러 몰래 어린 소년 하나를 구워삶았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었다. 어려서 그런지 옳
고 그른 일을 분간하지 못하는 소년은 시키는 대로 벨리타를 잘 유인해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년은 냅다 달려 어디론가 가 버리고 그는 벨리타의 입을 막아 잠
재운 뒤, 얼른 안아 들고는 준비해 둔 말에 태워 무작정 달려 나갔다.
뒤에서 충복들과 호위군들의 전투가 벌어졌지만, 안중에 없었다. 살아 돌아온 자만이 제
편이다. 몇 명이 살아남든 약속 장소에서 은밀히 만나기로 해 둔 상태였다.
지난번에는 기절시키는 물약 조절을 잘못했는지 한동안 벨리타가 깨어나지 않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너무 많이 쓰면 사망할 수도 있는 약이었다.
그때는 도망치기로 약속해 놓고 한밤중에 몰래 만난 벨리타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었다. 저
는 절실한데 벨리타는 무슨 놀이를 하는 듯, 다소 건성이었다.
꼭 오늘 도망쳐야 하냐며 좀 미루자는 식으로 말을 빙빙 돌렸다. 그렇게 하기 싫었다. 이미
산 아래 배 한 척도 매수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준비해 간 약으로 입을 틀어막은 뒤 기절한 그녀를 데리고 산속으로
도망친 것이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녀가 깨어나려고 신음을 했을 때 얼마
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벨리타가 잘못되는 건 아닌가 노심초사했었다.
기절해서 누워 있을 때조차 벨리타는 너무나 아름답고 요염했다. 깨어나기도 전에 그는 이
미 온몸이 뻐근해져 있었다.
그녀가 눈을 뜨는 걸 보고는 안심함과 동시에 자신의 욕구를 풀려고 덤벼들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꼬여 버려 환영하며 자신을 받아 줄 거라 생각한 벨리타가 도망을 쳐 버리고 살
벌한 황제에게 잡혀 버렸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의 벨리타는 이해가 되지 않았
다.
어찌 되었건 지금은 내 눈앞에 있다. 이제 나만의 것이다. 이렇게 만나기 위해 얼마나 애타
게 그 수많은 밤을 보냈는지. 이제는 그런 암울한 나날은 끝이다. 지금부터 황홀한 나날만
이 펼쳐질 것이다. 제자리. 지난번 못 한 것을 다시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다. 마치
그동안 헤어져 있던 일이 없던 것처럼 여기에서 다시 이어 나갈 것이다.
지난번보다는 약을 조금 사용했다. 그러니 조금 후 깨어날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먼
저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
에무르는 벨리타가 곱게 누워 있는 모닥불 앞을 떠나 산비탈 아래로 빠르게 내려갔다. 조
금 떨어진 곳에 살아 돌아온 십여 명의 충복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를 보고 벌떡 일어선 충복들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곤 들고 있던 검을 빼 들어 한 놈의
다리를 가차 없이 베어 버렸다.
비명을 지르려 입이 벌어졌지만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다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상태로 꿇어 앉아 버린 사람은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지?”
그의 살벌한 목소리에 피를 흘리던 이는 벌벌 떨며 얼굴이 시퍼렇게 탈색되어 갔다.
바다를 건너오던 도중, 에무르의 충복이 귓속말로 전해 주었다.
저놈이 첩자 맞다고. 저자의 짐을 샅샅이 뒤졌는데 독침이 든 통을 발견했다고 말해 주었
다. 대충은 짚어 냈으나 확신이 필요했다. 역시나였다.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표정 관리를
하며 슬쩍 첩자인 그놈을 흘겨보았다. 곱게 죽여 주마.
로카 왕국의 왕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 왕세자인 형님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니. 그러니 더더욱 왕의 자리는 양보할 수 없다. 왕이 되면 지금의 왕세자부터 처단하고 말
것이다.
하늘 높이 쳐들었던 그의 검이 빠르게 휘둘러졌다. 꿇어앉은 놈의 목이 그대로 떨어져 바
닥에 뒹굴었다. 몸뚱아리는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충복들이 산 아래로 몸뚱아리를 발로 밀어 굴려 버렸다. 깨끗이 처리했다. 승리는 시간문
제. 그 후에 독침으로 저를 죽이려 했겠지.
에무르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충복들에게 휴식을 명하고 벨리타에게로 서둘러 돌
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