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25화 (125/130)

125화 똑똑히 보여 주마

“에단은 북쪽을 맡아라. 내가 남쪽으로 간다.”

남쪽으로 향하는 군선의 수가 조금 더 많았다.

에단은 황제의 명령을 받들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이내 두 눈이 커져 버렸다. 그의 손

에 황제가 신검을 쥐여 주었기 때문이다.

“내 신검과 같이 가라. 나한테는 신수만 있으면 된다.”

이 정도 거리는 신수도 신검도 주인인 황제와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아!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신검을 믿고 맡겨 주시다니.

에단의 고개가 더 깊숙이 숙여졌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이 한 몸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비

록 얼마 되지 않는 병사들을 이끌고 적과 대항하는 상황이지만 죽을 각오로 싸우겠습니다.

에단은 마음 깊이 충성을 맹세하며 전의를 다졌다.

진지 안이 불을 밝혀 대낮처럼 환해져 있었다. 모든 병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에단의 지시

대로 양분되고 있었다.

모두가 중무장을 한 채 황제 폐하의 출발 명령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황제는 손을 들어 잠

시 기다리라 명했다. 군말 없이 기다리면서도 그들은 조금 의아하긴 했다. 시간이 급할 텐

데 왜….

그때였다.

두두두두.

미세하게 들리던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지축이 울리고 땅이 진동했다.

아!

갑자기 장관이 펼쳐졌다. 저 멀리 언덕을 넘어 기마 병력이 셀 수 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폭포수가 쏟아질 듯 밀려오는 모습이었다. 모두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혀 갔다. 천군만

마를 얻은 것 같았다.

모두의 입에서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고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기뻐했다. 지금 상황

에서 숫자상으로 적들보다 열세인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는데.

황제 폐하….

에단은 어떻게 이리 빨리 기마 병력을 도착하게 만들었는지 폐하의 능력에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역시 황제 폐하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자리. 바

로 신의 영역이다.

자신들의 황제가 어떤 존재인지 모두가 다 뼈저리게 새기었다.

아. 위대하고 고귀하신 황제 폐하!

그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 모두의 입에서

‘황제 폐하 만세’라는 함성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지금 막 도착한 기마 병력까지 그 소

리에 가세해 절벽 위 공기마저 진동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가슴 벅찬 광경에 레이나와 여인들은 그치지 않는 눈물을 훔치며 그들도 같이 구

호처럼 황제 폐하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쳐 댔다.

***

드디어 에단이 이끄는 군단이 먼저 출발했다.

칼리크는 기마병 중 가장 발 빠른 자 두 명에게 명령했다. 지금 뒤따라오는 대군에게 지금

상황을 알리라고 지시했다. 두 명의 기마병을 출발시키고는 칼리크도 나머지 군단을 이끌

고 에단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에단 쪽은 계속 높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전투상 유리한 지형이다. 반대로 남쪽은

점점 평야로 이어지는 곳이라 적들이 침투하기 더 유리한 지형이다. 그렇기에 칼리크가 맡

았다. 이쪽이 더 치열한 전투가 예상된다. 적들의 수도 더 많다. 하지만 그에겐 신수가 있

다.

얼마나 해안선을 따라 움직였을까. 아침이 밝아 오고도 한참을 더 배는 남하했다. 그리고

는 멈추어 섰다. 애가 타게 만들려는지 곧장 상륙하지 않고 몇 시간이 지나도록 군선들이

바다 저 멀리에 정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피 말리려는 작전인가.

칼리크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 방법은 얼마 전 유클로를 정복할 때 써먹은 전술이었

다. 굳이 저러고 있는다는데 우리 쪽에서 피가 마를 이유는 없다. 오히려 이쪽도 시간을 벌

어야 하는데 더 잘되었다.

적들의 생각과는 달리 해안가 너머 평지에 진지를 세운 카르탄 군은 느긋하게 그들이 움

직이기만을 기다렸다. 한 번 유클로에서 같이 싸웠던 군사들이라 익숙하게 대응하고 있었

다. 따라온 사병들만이 조금 긴장을 했지만 많은 수의 군사들 분위기에 동화되어 갔다.

이쪽은 조용한 것이 바로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 분위기였다.

칼리크는 신수를 에단 쪽으로 보냈다. 대신 투명한 상태로 그들을 도와주고 오라 명했다.

보이지 않으니 더 뒤집어질 것이다. 에단 쪽은 상륙을 시도하고 있을지 모른다. 호랑이 신

수는 하늘을 날고 땅 위는 그 어디건 갈 수 있어도 깊은 바다까지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

니 해안가에서 어제처럼 위협을 가하고 돌아오면 된다.

신수가 떠나고 계속 시간이 흘러갔다. 무슨 배짱으로 시간을 이리 끄는지 모르겠다. 시간

을 끌수록 불리해질 텐데. 아니다. 그들은 모르니 저리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카르

탄 대군이 회군하여 바로 코앞까지 오고 있다는 걸 알 턱이 없다. 여전히 유클로에 있다고

생각할 테니 저럴 수 있는 것이다.

미련한 것들.

어디건 변수는 있는 법.

전쟁을 하면서 어찌 그런 변수를 생각지 못하나. 그러니 너희들은 안 된다. 로카 왕국을 이

정도로 미개하고 어리석게 보진 않았는데 생각보다 아주 멍청한 족속들이었다. 섬나라라

해상력만 믿고 덤비는데 육지전에서는 과연 그리 강할지.

머리도 안 돼, 육지전도 밀려. 참으로 미련한 섬나라다. 전쟁이 끝나면 저 섬나라를 완전히

고립시켜 버려야겠다. 상선부터 막으면 무역도 성립하지 않을 터. 가장 큰 무역 대상인 카

르탄 제국이 그 길을 막아 버리면 나라가 아예 흔들릴 것이다.

아주 본때를 보여 줄 것이다.

와라.

내가 누군지,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똑똑히 보여 주마.

칼리크의 두 눈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

로카 왕국의 군선들은 다른 이유로 지체하고 있었다.

에무르 왕자의 군선에 오른 사령관들은 왕자가 내린 명령을 받들자니 서로의 머리를 맞댈

수밖에 없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빌어먹을 명령이니 할 수 없었다.

죽을힘을 다해 황도로 향할 것.

물론 안다. 최종 목표가 황도라는 것을.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저 어처구니없을 뿐이었다.

왕자가 명령한 날짜까지 황도에 도착하기엔 무리가 있다. 지금 상황에서 그건 날아가야 가

능한 일이다.

지금 왕자가 보여 준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아 머리가 아픈 것이었다. 이건 마치 전쟁이

뭔지 전혀 모르는 이가 명령을 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러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나는 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겠소.”

이 발언을 한 사령관을 다른 사령관들이 미친놈 쳐다보듯 노려보았다. 이 무슨 개소리인

지.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 왕자가 하는 행태도 그렇고. 우린 여기 죽기 위해 온 것이 아

니오.”

“누가 그런다고 했소?”

다른 사령관은 가뜩이나 화가 나 죽겠는데 이 미친놈이 이상한 말이나 떠들고 있으니 목

청이 터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우리가 놀러 나왔소? 돌아간다 만다 소리를 하게?”

“그러고도 당신이 사령관이오?”

나머지 사령관들이 한 사람을 향해 일제히 마구 퍼부었다.

“사령관이니 이러는 거요. 내 군사들을 허무하게 죽일 수 없소. 앞서 너무 많은 병력을 잃

었지 않소. 그 호랑이 하나만으로도 지금 우린 절반 이상이 또 물귀신이 될 것이오.”

“겁쟁이가 따로 없군.”

“그래서 지금 도망치겠다는 소리요?”

“미쳤군. 죽는 게 그리 겁이 나?”

모두가 달려들듯이 몰아붙이고 계속 싸워 대는 통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왕자님이 승리 후 돌아가면 자넨 바로 사형이오.”

“돌아가면 그렇게 두려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오히려 그게 낫소. 내가 죽는 것이.”

반대하는 사령관은 단호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되면 나 하나 죽고 내 군사들은 다 살아남을 것이오. 여기서 진군한다면 다 죽을

것이고.”

“눈물겨워 못 들어주겠네. 군사들이 가족이요, 뭐요? 그리 생각해 주면 누가 알아준답니

까?”

“군사들 핑계로 도망칠 궁리를 하다니. 사령관 자리 내려놓고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낫겠소.

그들의 싸움은 과열되어만 갔고 점점 치열해져 갔다. 그래도 그 한 사람은 제 뜻을 굽히지

않고 열변을 토했다.

이 개자식.

쿵.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던 사령관 하나가 검을 빼 들어 야멸차게 미친 사령관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들이 모인 작전실 나무 벽에 온통 피가 튀어 피바다가 되어 버렸다. 전쟁을 하기도 전에

이 안에서 전쟁을 한 차례 치러 냈다.

남은 사령관들은 미친놈 하나 제거했다는 속 시원함을 드러내며 이제야 작전대로 실행하

기 위해 움직였다. 왕자에 이어 저 미친 사령관까지, 아주 이번 전쟁은 이 갈리게 더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어서 빨리 끝내고 돌아간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에무르 왕자가 차기 왕이 되고 나면 자신

들은 더 높은 명예를 얻을 수 있다. 그것 하나를 위해 눈에 불을 밝힌 그들은 무서운 목소

리로 상륙 명령을 내렸다.

또다시 거대한 호랑이한테 당할까 봐 군선을 해안가에서 더 먼 바다에 정박한 상태라 노

를 저어 가려면 시간이 더 걸리는 상황이었다. 어제 해안가에서 군선들이 뒤집혀 몇십 척

을 잃었는지 모른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당하지 않는다. 사령관들은 명령을 한 채, 뒤에

남아 거대한 군선 위에서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

드디어 군선에서 내려진 돛단배가 새까맣게 밀려오기 시작했다.

칼리크는 신수의 눈을 통해 에단 쪽 상황을 파악했다. 신수 덕에 초반을 제압하고 싸우기

시작하는 그들이 잘해 주고 있었다. 깜깜한 밤이 오면 적들도 후퇴하고 숨을 고를 터. 조금

만 더 버티면 될 것 같았다. 에단 곁에서 신검도 대활약하며 적들을 베어 나가는 것까지 보

고는 신수에게 돌아오라 명령했다.

빠르게 돌아온 신수는 또다시 투명한 채로 해안가로 내려가 같은 일을 반복했다. 다시 해

일처럼 큰 파도가 밀려갔고 적들이 탄 작은 배들이 휘청거리며 전진하는 데 애를 먹었다.

기우뚱하며 뒤집히는 배들도 속출했고 헤엄쳐 다가오는 군사들로 바다가 시끄러워졌다.

호랑이가 보이지 않는데 어제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니 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되

었건 그 넓은 바닷가로 파도와 해일을 넘어선 적들의 일부가 상륙해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물에 젖고 몸이 무거워진 적들은 헤엄쳐 오느라 힘도 빠진 상태였다. 잠복해 있던 기

마 병력이 먼저 출동하고 나머지 군사들이 뒤를 이어 적들을 상대했다. 상대적으로 말 위

에서 공격하는 카르탄 군이 더 유리했다.

갑자기 기마 병력까지 나타나고 생각보다 더 많은 수의 군사들이 보이자 적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그들은 해적처럼 양손에 도끼를 들고 거칠게 덤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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