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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24화 (124/130)

124화 위험하다

“에단은 어디 있느냐?”

급한 불은 껐다. 아직은 군선들이 멀리 포진되어 있지만, 현재 뭍으로 올라온 적들은 모두

전멸시켰다. 이제는 이 정도까지 막아 준 에단을 만나 볼 때였다.

“조금 전, 다른 무리와 옆으로 이동하는 걸 보았습니다.”

여기에 없다니. 이제야 본다고 생각했는데.

에단이 이동했다는 건 적들의 다른 움직임을 포착했다는 말.

안심하긴 이르다. 얼른 가 봐야겠다.

제 임무를 수행하고 절벽 위로 훌쩍 날아온 호랑이 신수에 다시 입을 벌린 채 멍해진 병사

들을 뒤로하고 칼리크는 재빨리 신수에 올라탔다.

다들 신기하고 믿을 수 없어 하는 눈빛으로 위로 날아오르는 신수를 바라보았다. 신성한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두 손까지 맞잡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많았다. 이런 존재를

처음 접하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저런 대단하고 위대한 신수의 주인인 황제

폐하에 대한 경외감은 한없이 드높아지고 있었다.

칼리크는 서둘러 날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이럴 줄 알았다. 더 빠른 속

도로 다가가면서 살펴보니 적들이 분산되어 침략할 줄 알았는데 저 멀리 떠 있는 건 달랑

군선 한 척이었다. 뭔가 갸웃거리게 만드는 상황이었지만 저들에게 힘을 보태 주는 것이

먼저였다.

아니나 다를까.

잘 막아 낸 병사들에게 적들이 아래에서 수많은 화살들을 쏘아 올렸다.

위험하다!

***

산티노는 입구를 막아 놓은 마른 수풀 사이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방금 어마어마한 호랑이가 하늘 위로 휙 지나가는 걸 보고는 자리에 주저앉았었다. 황제

다. 게다가 성체인 호랑이 신수까지 타고 황제가 나타난 것이다.

이젠 살았다.

안심과 동시에 그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신수가 발현되었다니.

역시 탁월한 판단이었다. 자신의 뛰어난 판단력이 지금 빛을 발휘하고 있다. 신수가 발현

된 지금의 황제가 앞으로도 계속 황제라는 말이다. 즉, 제 예상대로 쿠로는 끝났다. 아주

적당한 시기에 제대로 줄을 바꿔 탔다. 이건 하늘의 도우심이다. 제 가문을 위해 이렇게 도

와주시는 거다.

나는, 우리 산티노 가문은 살았다!

그는 너무나 벅차올라 계속 졸아 있던 제 가슴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조금은 여유가 생기자 산티노는 미친 맹수와 같이 이리저리 날뛰며 적들을 우수수 쓰러뜨

려 나가는 황제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폭군이라는 말이 괜히 붙여진 것이 아니다.

지금은 비록 적들을 쓰러뜨리는 것이었지만 황궁에서도 미쳐 날뛸 때가 많았던지라 한마

디로 무서운 존재였다.

대단한 활약을 벌이고 있는 황제를 빠짐없이 지켜보던 산티노는 점점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방팔방 황제의 신검 아래 피를 뿜으며 죽어 나가는 적들이 늘비했지만 산티노는 그런

건 안중에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신변과 미래만 안전하면 되었다.

이제 자신의 목표에 거의 다 왔다.

다시금 환호를 받으며 호랑이 신수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자 주저앉아 있던 산티노는 그

자리에서 들썩들썩 춤을 추었다. 이젠 끝났다.

황제가 왔다. 보았다. 이겼다. 야호!

산티노는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은근슬쩍 나가더니 흩어져서 휴전 상태로 쉬고

있는 수많은 병사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자신도 계속 여기서 싸운 것처럼 굴고 있으면 황

제가 더 달라지겠지.

산티노는 떨어져 있는 검을, 그것도 피가 묻어 있는 검을 들고 옷 모양새도 슬쩍 흐트러뜨

린 채 머리카락까지 손으로 헤집어 놓았다. 너무 말쑥하면 의심받을지 모른다. 황제의 눈

이 여간 매서워야 말이지.

산티노는 찢어지려고 하는 입술을 억지로 오므리며 들뜬 기분으로 황제가 다시 돌아오기

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기 시작했다.

***

“어서 돌아가자.”

우렁찬 함성으로 대답한 그들은 하늘 높이 올라 날아가는 황제를 뒤따라 진지 쪽으로 말

을 달렸다. 믿을 수 없는 존재를 둘이나 보았다.

신수와 황제 폐하. 자신들이 어찌 황제 폐하를 만날 수나 있겠는가. 멀리서라도 볼 수 있을

까 말까인데 폐하를 이렇게 가까이 모신 자신들은 앞으로 내리 3대에 걸쳐 행운이 깃들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만큼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주시러 손수 달려오셨다. 가만히 앉아서 지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움직이셨다. 이런 황제 폐하가 이 제국의 주인이시다. 우린 그 백성이고. 가슴

이 벙벙하여 뒤를 따르는 그들의 눈빛이 그 어떤 때보다도 반짝거렸다.

해안가 절벽 위 진지에 황제가 다시 내려오자 모두가 신을 모시듯 다들 숨죽이고 바닥에

일제히 엎드렸다.

“모두 일어나시오.”

목소리도 얼마나 우렁차고 울림이 있는지 레이나를 비롯해 부상자를 돕던 여인들은 벌써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감격스러워했고 다른 이들도 눈동자에 물기가 서렸다.

“폐하. 여기서 이렇게 뵈니 감개무량합니다.”

뜻밖의 인물이 나서며 다가오자 칼리크의 두 눈이 잠시 매서워졌다.

이자가 왜 여기에.

산티노는 굽신거리며 황제에게 다가가 아주 살갑게 말을 붙였다.

“폐하께서 저희 모두를 구해 주셨습니다.”

에단과 수하들이 다들 잘해 준 것이고 위험할 때 도와준 것뿐이다. 아부로 먹고사는 산티

노인데 쿠로가 아닌 자신에게 이리 나오니 위화감이 들어 소름이 돋을 뿐이었다. 여전히

칼리크의 두 눈은 냉랭했다. 반갑지 않은 인물이니 더했다.

산티노는 왜 빨리 에단이 오지 않나 싶어 목을 쭉 빼고 저 너머 길 쪽을 바라보았다. 옆에

서 공치사를 해 줘야 장단이 맞을 텐데 뭐 하느라 이리 늦나.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에단

놈이었다.

다가닥 다가닥.

이제야 오는가 보다.

한결 마음을 놓으며 산티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황제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기회를 재고

있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걸 이미 알고도 남은 칼리크는 탐탁지 않은 시선을 산티노에게 계

속 던질 뿐이었다.

에단이 돌아와 산티노가 황제 곁에 서 있는 걸 보고는 자세히 보고하기 시작했다. 방어막

이며 땅굴. 그리고 저 많은 사병들을 지원해 줬다는 것까지. 싸우느라 보진 못했지만, 공작

의 행색을 보니 같이 싸운 듯싶어 에단의 눈빛은 무척 호의적이었다.

산티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평정을 가장한 척, 표정 관리에 힘썼다.

“그만하오. 제국의 귀족으로서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소.”

에단을 만류하는 척, 제 공을 더 높이 치켜올리는 산티노였다.

묵묵히 듣고 있던 황제의 한쪽 눈썹이 위로 솟아올랐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약은 놈.

발 빠르게 잘도 움직였다. 무슨 변심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이

번 일에 큰 도움을 준 것만은 사실이다. 이래서 이놈은 살아남겠군.

쥐새끼처럼 재빠른 건 인정해 주었다. 그것으로 목숨을 구한 것도.

“내 참작하지.”

야호.

저 말 한마디면 되었다. 성공이다!!!

산티노는 팔짝팔짝 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두 발에 힘을 주었다. 지상에 발바닥

을 딱 붙이고 서 있도록 애를 써야 할 지경이었다. 공손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까지 숙였

다. 그동안의 노고를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니 적의 동태를 살펴라.”

황제가 등장하자 모두가 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경계 태세에 만전을 기했다.

***

로카 왕국 군선 위에 있던 사령관들은 모여 긴급회의를 시작했다. 이런 변수는 생각지도

못했다.

무방비 상태인 줄 알았다가 처음부터 많은 군사들이 불에 타 죽었다. 허를 찔린 덕에 허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우스웠다. 초반 발악은 인정해 주었다. 그 정도면 대단한 발

악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거의 모든 군사들을 상륙시켜 총공격에 들어갔는데 이럴 수

가.

호랑이 신수가 나타나 이 판을 싹 뒤집어 버렸다.

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바닷속에 묻힌 군사들이 불에 타 죽은 이들보다 더 많았다. 눈

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저 어마어마한 호랑이를 죽일 방법이 없었다. 입에서 나

오는 건 욕뿐이었다. 하지만.

신수가 나타났다는 건 그 근처에 황제가 있다는 소리. 황제를 죽일 기회다. 아직 카르탄 대

군이 도착하려면 열흘이 지나도 불가능하다. 유클로에서 이미 출발했다고 해도 어림없다.

그러니 그 전에 황제를 죽여야 한다. 어떻게 유클로와 전쟁 중인 황제가 이곳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기는 것만이 중요했다.

“신수가 발현된 황제는 죽이지 못한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다 헛소리. 저들이 일부러 그리 퍼트린 거겠지요.”

“맞소. 어떻게 그런단 말이오. 다 과장되게 부풀린 말일 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우후죽순으로 모인 사병 조무래기들로 겨우 막고 있나 본데 뚫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승산 있다. 문제는 신수인데. 군선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움직인 뒤, 다른 장소로 상륙하여

침략한다. 그렇게 되면 저들은 나뉘어 쫓아올 테고 그건 그만큼 숫자가 적어진다는 소리

다. 신수도 한쪽만 쫓아올 터이니 다른 쪽은 수월할 것이다.

양분 작전.

작전이 결정 나자 사령관들은 밤이 더 깊어지고 별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항해하기 위한

길잡이인 별이 뜨면 곧바로 군선을 움직일 것이다.

저들은 육로로 진군하기에 밤에는 군사들이 멈춰야 하지만 해상에서는 밤에도 움직일 수

있어 더 유리하다. 그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니 군사적으로 해상국이 더 강한 이유였

다.

아무리 지금 절반 가까이 군사를 잃었다고 해도 아직 저들보다는 몇 배 많다. 이제는 사령

관들까지 상륙하여 공격해 들어갈 계획이다. 그리고 빠르게 중앙으로 치고 올라간다. 서둘

러 황궁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유클로에서 지원군들이 돌아오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의 바람대로 빠르게 하늘이 캄캄해지고 있었다.

***

적들의 동향을 살피고 있는 진지 쪽은 여전히 긴장감이 돌았다. 다만 든든한 존재가 뒤에

버티고 있다는 믿음이 깔린 긴장감이었다.

“폐하. 적들의 군선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멀리서 보아도 작은 불빛만 보이는 군선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양쪽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그들의 작전이 한눈에 보였다.

“에단은 북쪽을 맡아라. 내가 남쪽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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