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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23화 (123/130)

123화 잘 버텨 주었다

“다들 움직이지 마라.”

에단 무리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신성하고 고고한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마자 적들에게 홀

로 돌진하는 위대한 존재를 목격했다. 또 한 마리의 맹수가 빠르게 지나간 것만 같았다. 무

서운 속도였고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크아앙.

때를 맞춰 사납게 울부짖는 호랑이 신수의 소리에 적들은 꽁지가 빠져라 다시 되돌아 도

망치기 시작했다. 호랑이 신수가 훌쩍 날아오르며 도망치는 그들을 위협적으로 몰아갔고

호기롭게 앞으로 덤벼드는 적들은 칼리크 혼자 다 처리해 나갔다.

에단을 비롯해 나머지 병사들도 합세를 하려 했으나 조금 전, 저 신비로운 존재가 던진 움

직이지 말라는 명령에 어중간한 자세로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걱정과 우려는

잠시, 혼자서도 수십 명의 공격을 거뜬히 막아 내고 물리치는 존재를 보며 감탄하기 바빴

다. 저희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몇 남지 않은 적들은 호랑이에게 쫓겨 바다로 뛰어들어 도망치는 데 정신이 없었고 검을

들고 달려드는 적들은 신비로운 존재의 손에 살아남지 못했다.

빠르게 정리된 이곳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줄기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땀에 절어 있던

그들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가슴속은 더 시원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위인이 저희

를 구해 주고 적들까지 다 물리쳐 주었다.

영웅이다.

“잘 버텨 주었다.”

깊이 있는 울림이 그들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어둑해진 언덕 끝에서 저희 쪽으로

저벅저벅 거침없이 걸어오는 존재가 신처럼 보였다.

아!

에단이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다. 검은색 군복에 새빨간 휘장을 두르고 다가오는 모습에

바로 몸을 낮추었다. 입고 있는 정복 때문이 아니라 아예 주변 공기부터 달랐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분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고귀하고 고귀하신 분. 이분이

바로 황제 폐하라는 걸 알아차린 에단은 크게 외쳤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히끅 다들 놀라는 가운데 빠르게 수긍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정도의 존재라면 황제 폐

하 말고 누가 있겠는가. 모두가 한뜻으로 에단의 뒤를 이어 바닥에 엎드리기 시작했다.

“자네가 에단인가?”

황제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에단이라는 자가 누구인지.

평민치고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직접 만나 보니 왜 이자에게 벨리타가 중요한

임무를 맡겼는지 알 수 있었다. 왕족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대단한 힘을 가진 지도자와 같

은 분위기였다. 인재임을 그도 한눈에 알아보았다.

“지금은 일단 피신하라. 무모한 공격은 죽음을 부를 뿐이다. 되도록 많은 이가 살아서 승리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신수가 시간을 벌어 주었다.

적들은 잠시 후퇴한 것뿐, 이내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힘을 비축하고 다음을

기약할 때다.

황제의 말을 듣고 감동하는 병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무조건 나가서 죽을 때까지 싸우라

는 말이나 하는 사람이 높은 양반들인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폐하께서 살아남으라 하신

다. 무모하게 싸우지 말라 하신다.

이런 분이 우리 제국의 황제 폐하이시다. 그 감동으로 눈시울을 적시는 병사들도 생겨나고

있었다.

“어서 돌아가자.”

황제의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의 얼굴이 어둠을 밝힐 정도로 환히 빛나기 시작했다.

***

몇 시간 전.

칼리크와 벨리타의 황홀하고 행복한 밤이 지나갔다. 그리고는 눈 부신 태양이 떠올랐다.

그런데 점심 때쯤 황궁 안이 발칵 뒤집혔다. 전서구 때문이었다.

칼리크와 벨리타가 먼저 와 있는 집무실에 데인이 황급히 서신을 가지고 뛰어 들어왔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지금 해안가 마을에서 육안에 보일 거리에 수백 척의 군선이 나타났

다 합니다. 로카 왕국이 드디어 침략을 시작했습니다.”

역시 올 것이 왔다.

칼리크와 벨리타가 서둘러 그 서신을 읽어 보니 그건 에단이 다급하게 보낸 서신이었다.

지난번, 기사들을 보낼 때 긴급한 상황이 생기면 전서구를 사용하라고 몇 마리 같이 보냈

는데 그중 한 마리가 도착한 것이었다.

전서구가 여기까지 오는 시간을 생각해 보면 이미 적들은 해안가 더 가까이 침범하고 있

을 터였다. 시간이 없다.

또다시 위급 상황이다.

칼리크는 데인과 머리를 맞대었다. 유클로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을 이때를 노리는 건 침략

자의 정석이다. 하지만 로카 왕국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 전쟁이 너무 일찍 끝나 버린 것.

게다가 승리하고 이미 대군이 회군하고 있었다는 것. 소식이 거기까지 전해지지는 않았을

터.

또 하나, 에단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해안가 마을에 정착해 정비 사업을 벌이고 있을 때도

그냥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 여겼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정확히 적이 쳐들어오는

장소가 그 마을임을 알았을 때는 황후의 혜안에 다시 한번 놀랄 뿐이었다.

그녀에게 할 말도 물어볼 말도 많았지만 그건 나중이다. 지금은 이곳을 막아 내는 것이 더

급하다.

“지금 회군하는 군단들은 어디까지 왔지?”

지도 위에서 한 곳을 가리키며 데인이 눈을 빛냈다. 황궁에서 병력을 이끌고 가기에는 시

간이 터무니없이 모자란다. 다행히 회군하는 많은 군단이 해안가 마을에 근접해 있다. 실

로 신의 가호라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여기쯤입니다. 여기에서 이 해안가 마을이 황도보다 훨씬 가깝습니다. 3일 정도면

해안가 마을로 도착할 듯싶습니다.”

“기마 병력이 먼저 도착하게 하면 되겠군.”

칼리크는 서둘러 서신을 써 내려갔다.

“벨리타. 금방 갔다 오겠소.”

“조심하셔야 해요.”

벨리타는 다시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칼리크에게 신검을 챙겨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벨리타 옆에 두고 싶었지만, 자신과 신검이 그렇게나 멀리는 떨어져 있을

수 없는 이유도 있었고 어서 빨리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그는 벨리타가

건네준 신검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신검 끝에 방금 쓴 서신을 단단히 매달았다.

누구보다 빨리 도착할 사람은 단 한 명뿐.

신수와 황제.

칼리크는 서둘러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호랑이 신수에 올라탔다.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그

는 높이 날아올랐다.

신수와 신검까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벨리타는 속으로

빌었다.

에단이 시킨 대로 잘해 놓고 있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빨리 쳐들어왔다.

그래도 군사들이 서둘러 해안가 마을에 도착해야 할 텐데. 그동안 그들이 잘 버텨 주기만

을 바랐다.

칼리크….

에단….

황궁에 황제가 없으니 더 빈틈없이 해야 한다. 그녀는 데인에게 자신이 본 땅굴 이야기를

전했다.

다시 궁정으로 나온 그녀는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황궁 안을 순례하듯 걷기

시작했다.

***

칼리크는 바람보다 더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아예 박살을 내 주고 말 테다. 이번으로 이

대륙에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킬 것이다. 어딜 감히. 넘볼 걸 넘봐야지.

대군이 회군하는 지점까지 빠르게 날아간 칼리크는 공중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신검을

아래로 내려보냈다. 신검은 황제의 뜻대로 대군을 이끄는 사령관에게 다가가 땅에 꽂혔고

그들은 폐하의 신검임을 한 번에 알아차렸다. 신검 끝에 매달려 있는 서신을 서둘러 읽어

본 그들의 얼굴빛이 확 달라졌다.

막아야 한다. 이 땅을 지켜야 한다.

사령관은 대군의 방향을 틀었다. 우선 20만의 기마병 군단부터 해안가로 출발시켰다. 뒤를

쫓아가는 대군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제 임무를 다한 신검은 더 멀리 앞서가고 있는 황제의 곁으로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호랑이 신수는 더 박차를 가했다. 시간이 급하다. 이미 해안가로 적들이 올라오고 있을 것

이다.

막아야 한다.

대군이 올 때까지 신수가 활약해야만 한다.

신수. 빨리 더 빨리.

칼리크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

칼리크가 거대한 호랑이 신수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니 싸우던 적들이 제일 먼저 놀랐고

그다음 등지고 싸우고 있던 에단의 병사들까지 놀라 펄쩍 뛰었다.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 퍼지고 황제를 내려 준 호랑이 신수는 절벽 아래로 훌쩍 뛰어 넘

어갔다. 그 거대함에 정신이 나가 버린 적들은 도망치느라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해안

가에 몰려 있던 적들 역시 도망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어 모두 군선으로 돌아가려 했다.

개미 떼처럼 새까맣게 바다로 뛰어든 적들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호랑이 신수가 포효했다. 해안가를 날려 버리듯 거대한 소리에 모두가 혼비백산 헤엄치기

바빴다.

호랑이 신수가 바다로 뛰어 들어가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 몸짓에 파도가 거칠게 일

고 높은 해일이 만들어져 군선 쪽으로 밀려갔다.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던 적군들도 속수무

책으로 바다 멀리 떠내려갔다. 수많은 군선까지 거대한 파도의 힘에 어지럽게 뒤뚱거리며

뒤로 밀려갔다.

뒤이어 호랑이 신수는 점점 더 바다 쪽으로 들어가면서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더 큰 해일

이 일어 아예 멀찌감치 군선들을 죄다 밀어 놓는 바람에 바다에 떠 있던 적군들은 갈 곳을

잃고 헤맬 뿐이었다.

살기 위해 헤엄치던 적군들은 휘몰아치는 파도와 해일에 떠밀려 빠져 죽거나 바다 깊숙이

밀려 나갈 뿐이었다. 겨우 절반만이 간신히 휘청이는 군선에 오르고 나머지들은 거의 물귀

신이 되어 갔다.

칼리크는 지상에 내리자마자 신검을 들고 종횡무진 적들을 쓰러뜨렸다. 여기저기서 ‘황제

폐하’라는 말이 쏟아져 나왔고 엄청난 힘을 얻은 병사들은 절벽 위에 올라와 있는 적들을

물리쳐 나갔다.

모두가 무시무시한 황제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혀를 내둘렀다.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와 주

변을 제압하는 표정에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힘을 보았다.

불꽃이 일렁이는 신검을 들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적들을 일망타진하는 황제의 모습에

입이 쩍 벌어졌다. 혼자서도 이 적들을 다 상대하고도 남을 모양새였다.

“황제 폐하!!”

“황제 폐하!”

적들이 모두 쓰러지자 병사들의 입에서 칭송과 경외감을 담은 함성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

고 그들은 처음 보는 황제의 풍모에 넋을 놓으며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에단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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