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여기가 뚫리면 이 제국이 뚫린다
“뭐야? 저것들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
무방비 상태의 마을임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런데 저게 뭔가?
높은 절벽에 온통 불이 붙은 것처럼 난리가 나더니 절벽 위에 갑자기 많은 병사들이 나타
나 화살을 벌집 쑤시듯 날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든 올라서라. 그리고 다 죽여 버려.”
에무르는 지휘관들에게 단호히 명령했다. 허를 찔린 듯싶었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비
록 화공을 쓰는 바람에 몇만의 군사들이 죽어 나갔지만, 아직 남아 있는 로카 왕국 군사들
이 막강하다. 밀어 버리면 된다. 모든 군선들은 이미 군사들을 풀어놓은 상태였다.
로카 왕국 군사들은 절벽 위로 올라갈 방법을 고심하느라 멀찍이 후퇴한 상태였다. 다가갔
다간 화살 세례가 이어지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깎아 세운 절벽뿐이라 저 위로 올라갈 방
법이 없다. 미치겠다.
에단은 땅굴 안에서 작은 창문을 닫았다. 1차 작전은 성공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런
큰 전쟁은 처음이지만 시작부터 성공이었다. 황후마마가 맨 처음부터 지시한 것들이 놀라
울 정도로 성공을 끌어냈다.
해안가를 절벽으로 둘러싸이게 만들 것. 계단을 많이 설치하되 난간 손잡이 안은 뻥 뚫어
그 안에 기름을 채울 것. 계단 안쪽에 가늘게 홈을 파 그곳에도 기름을 채워 놓을 것. 언뜻
물처럼 보일 터. 난간에 불이 붙으면 계단 쪽으로도 불길이 번지게 할 것.
황궁에서 처음 황후마마를 만났을 때, 여기까지 지시받았다. 무조건 황후마마의 뜻을 따르
고 있었지만 어떻게 적들이 쳐들어올 장소로 이곳을 지명하신 건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치 예언자 같은 혜안이었다.
믿고 맡겨 주셨으니, 이리 미리 방비하게 하셨으니 잘 해내야 한다. 이 제국의 앞날이 우리
에게 달렸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대장. 지금 적들이 다시 올라오고 있습니다.”
얼른 다시 작은 창문으로 아래를 정탐했다.
이런. 저것들이 방패를 머리에 이듯이 방어하며 쏟아지는 화살들을 피해 절벽에 한 발 한
발 대못을 박으면서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러면 저들이 이 위로 올라오는 건 시간문제다. 남아 있는 기름통들을 모조리 올라오는
적을 향해 불을 붙여 굴렸다. 하지만 이건 시간을 조금 지체시키기만 할 뿐, 적들은 불타고
있는 군사들을 밟고 다시 대열을 짜며 올라오고 있었다.
병력이 모자란다.
지금 여기 모여 있는 병사들은 다 합쳐서 2만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어서 빨리 지원을 받
아야 할 텐데. 에단도 중무장을 하며 양손에 검을 쥐었다.
그때였다.
함성 소리가 에단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에 서둘러 땅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
카르탄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수많은 병사들이 눈에 보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지금 이곳에 있는 병력보다 더 많은 병사들이 언덕을 넘어오고 있었다. 벌써 황궁에서 지
원병이 올 리가 만무한데 이 많은 병사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의아했지만 반가움이 더 먼
저였다.
“에단. 내 사병들일세.”
산티노 공작.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산티노 공작을 바라보는 에단의 눈에서는 감동의 물결이 일렁거렸
다. 저 방어막을 세우는 데 필요한 목재보다, 땅굴을 만들어 준 것보다 지금 이 사병들을
끌고 온 것이 가장 감사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말이 이어지지 않을 정도로 감동한 에단을 바라보는 산티노는 너무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둘러 보낸 하인이 아주 시간 맞춰 제 사병들을 잘 이끌고 와 주었다. 미리 대기
시켜 놓았기 때문에 연락을 받고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이미 여기까지 읽고 산티노가 모
두 준비시킨 것이다.
“지금 전쟁 중이니 꼭 싸워 이기도록. 나중에 폐하께 잘 말씀드려 주게.”
그래. 이것만 잘하면 된다. 모든 걸 다 쏟아부었으니 이젠 면책만이 남았다.
에단이 굳건한 눈빛으로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는 산티노는 다시 뒤로 물러났다. 대단위의
병사들이 전투 대열을 갖추는 동안 그는 또다시 안전한 장소로 후다닥 달려갔다. 이 위험
한 곳에 자신이 있을 필요는 없다. 싸움은 저들이 다 할 것이다. 산티노는 같이 쫓아온 하
인들과 함께 그곳으로 몸을 피했다.
곧 적들이 올라오면 이곳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될 것이다. 무시무시해질 것이다. 산
티노는 틈새로 쏙 들어가 숨을 죽였다.
드디어 적들이 하나둘씩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올라서려는 그 순간, 에단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이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직은 유리하다.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간혹 올라온다 해도 더해진 병사들이 함께 전투를 하기 시작했다. 민병들보다
강한 산티노 공작의 사병들은 거의 용병에 가까운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적들의 시체가 올라오고 있는 대열을 무너뜨리면 그들은 다시 처음
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형의 특성상 지키는 쪽이 훨씬 유리하지만, 부상자들도 생겨나
고 있었다. 아직은 버틸 만하다. 공작의 사병들 덕분에 힘을 얻었다.
에무르는 절벽 위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고 있는 로카 왕국 군사들
을 바라보며 승리를 장담했다. 저곳을 알아서 점령할 것이다. 에무르는 슬쩍 옆에 있는 충
복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절벽 위에 빽빽이 진을 친 에단의 병사들과 공작의 사병들이 힘을 합쳐 적들을 막아 내고
있었다. 에단도 자칼단과 함께 치열하게 싸워 나갔다.
“여기가 뚫리면 이 제국이 뚫린다. 우린 해낼 수 있다!”
에단의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가 대단한 함성을 지르며 적들과 맞섰다.
다들 잘해 주고 있었다.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기만 했다.
그때 에단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저 멀리 바다에 떠 있던 가장 큰 배 하나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해안가로 다가오는 것이 아
니라 옆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간다. 이곳이 아닌 다른 해안가로 가는 것임을 알아챈 에단은 자칼단과 일부
병사들을 데리고 그 배를 막기 위해 말에 올랐다.
다행히 움직이는 군선은 단 한 척뿐이었다. 왜 한 척뿐인가 의아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다
행이었다. 군선들이 싣고 온 군사들은 거의 내려선 상황이라 저 배 한 척에서 내릴 군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행이었다. 자신들이 막을 수 있을 테니.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에단과 백여 명의 별동대는 말을 타고 달렸다.
***
산티노는 틈새 입구를 가려 놓은 완벽한 은신처에서 몰래 눈만 빼꼼 내밀고 밖의 동향을
살폈다.
앗.
절벽 위로 올라오는 적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이쪽에서도 잘 싸워 주고 있었지
만, 적들이 끊임없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끔찍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창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낭자했다. 자꾸 밀리고 있
다. 이러다간 모두가 다 개죽음당할 것만 같았다.
더 멀리 갈 걸 그랬다. 이런 제기랄.
산티노는 안일하게 생각하고 이곳에 숨은 자신을 탓하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거 이러다
여기서 다 죽는 거 아냐. 죽으면 지금까지 한 일이 무슨 소용이 있어. 환장하겠네.
그는 두려움에 몸을 계속 떨며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이 다 막혔다.
우와!
와아아!
갑자기 밖에서 환호성 같은 함성이 들렸다. 기어코 적군이 이긴 건가 싶어 깜짝 놀라 덜덜
떨며 다시 한번 눈만 빼꼼 내밀었다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
에단 일행이 한참 옆길을 따라 말을 달렸을까, 그들이 추적하는 배가 서서히 다른 해안가
로 접근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쪽으로 들어오려는 속셈이다. 이곳은 진지를 만들어 놓은
곳의 전투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뚝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생각보다 많지 않은 적의 수에 안심하며 이곳을 사수하기 위해 그들이 올라올 길 양옆 숲
에 매복하고 기다렸다.
백여 명이 올라오자 기습적으로 에단의 별동대가 달려들어 전투를 시작했다. 눈에 불을 밝
히고 싸우는 자칼단의 실력은 막강했다. 도망친 몇 명을 제외하고는 사병들과 힘을 합쳐
적들을 모두 처단했다. 그러나 도망친 몇 명이 다시 백여 명을 대동하고 쳐들어왔다.
여길 통과하는 건 불가능하다. 죽을 각오로 막아 낼 것이다.
이번에도 많은 수의 군사들이 쓰러지고 또다시 소수만이 해안가로 도망쳐 내려갔다.
피웅. 피웅. 피웅.
이 소리는!
“피해라!!!”
언덕 아래에서 아직 이쪽으로 올라오지 않은 적들이 화살을 쏘아 올렸다. 상당히 많은 수
의 화살이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생각보다 저 군선에 더 많은 군사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
다.
큰일 났다. 가지고 있는 방패로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따라온 이들 중 방패를 지니고 있지 않은 병사들이 꽤 많았다. 몸을
피신할 나무들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사이 수많은 화살들은 그들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그
런데 불화살이었다.
아악!!!
그들은 모두 땅에 엎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죽을 수도 있다. 박힐 수도 있다. 타 죽을 수도
있다. 아악….
비명 소리와 어딘가 박히는 소리, 방패에 튕겨 나가는 소리가 난무해야 하는데 아직도 조
용했다. 눈을 감고 있던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는 조금 위를 겁나는 시선으로 올
려다보았다.
아니 이런.
눈동자가 얼어붙고 숨이 멈췄다. 심장만 거칠게 쿵쾅거릴 뿐이었다.
그 많은 불화살이 자신들의 조금 위 허공에 멈춰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둑해지는
밤하늘에 선명하게 불붙은 화살들이 공중에 멈춰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런 광경이 현실
에서 일어날 리 없어 이미 죽어 영혼이 되었다 여기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바로 그들의 입에서 다시 한번 비명 같은 외침이 쏟아졌다.
멈춰 있던 불화살이 땅으로 우수수 떨어지더니 거대한 호랑이가 공중에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유클로와의 전쟁을 치를 때는 더한 규모의 화살도 막아 낸 신수였지만 이들은 그런 사실
을 모르니 지금 상황만으로도 기절할 듯했다.
에단 역시 놀라서 크게 떠진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언덕 아래에서 적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저벅거리는 무수한 발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적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저 앞에 떡 버티고 있는 거대한 호랑
이 신수 때문에. 무섭도록 치켜뜬 사나운 눈과 마주친 그들은 바로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당장이라도 한입에 삼켜질 것만 같았다.
“다들 움직이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