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21화 (121/130)

121화 매일 사랑을 나눌 거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예전과 같은 말. 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

기대에 들떠 나른하게 변해 가는 그녀의 신비로운 눈동자에 취해 칼리크는 다시 입술을

내렸다. 꿀이 고여 있는 그녀의 달콤한 입술을 맛보며 두 사람은 서서히 비상할 준비를 시

작했다. 날고 또 날고. 더 높은 곳으로 날기 위해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세상에 두 사람만 남은 것처럼 그렇게 사랑을 하고 서로의 품 안에서 행복을 느꼈다.

***

“오늘부터 이제 여기서 나와 같이 자는 거요.”

아직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말은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어

떻게 매번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는지 그 황홀함의 여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다.

“매일 나와 자는 거요.”

그가 재차 확인을 했다.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눈빛에서 다 읽어 낼

수 있었다.

“매일 사랑을 나눌 거요. 그것도 여러 번. 당신을 사랑하고 또 사랑할 거요.”

오늘과 같은 일을 매일 경험한다고 생각하니 두 다리가 살짝 떨려 왔다. 그의 식을 줄 모르

는 열정과 욕망에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가슴 떨리게 좋았다.

“그러다가 못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걷지도 못하게.”

은근히 눈을 흘기는 그녀가 칼리크의 눈에 도발하는 듯이 보였다. 다시 가슴이 심하게 펄

떡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천국을 맛보고 내려왔는데도 또 올라가고 싶어 온몸이 불끈거렸

다.

“그럼. 내가 업고 다니겠소.”

뭔들 못 해 주리. 뭐든 다 해 줄 수 있다.

다시 그가 몸을 겹쳐 왔다.

“칼…리크?”

벨리타는 겨우 정상으로 숨을 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걱정 마. 벨리타. 내가 업어 줄게.”

못 말린다.

정말 황제의 등에 업혀 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황궁 안 모든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하니 얼

굴이 다 화끈거렸다. 그것도 잠시, 더 이상 생각이라는 걸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이내

그의 움직임 때문에 얼굴이 달아오른 채 그저 숨만 할딱거렸다.

헤어져 있던 동안 애타던 그리움이, 가슴 속 깊이 묻어 둬야 했던 안타까운 사랑이 봇물 터

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오늘을 지나 시간이 더 흘러야 그 애타는 불꽃이 진정될 듯싶

었다.

칼리크는 이제야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렇게 염원하던 대륙 통일을 이뤘을 때보다

지금이 더 가치 있게 느껴졌다. 벨리타를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대륙 통일도 제 안에서 의

미를 잃었다. 이렇게 그녀를 품에 안으니 통일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도 온전하게 꽉 찬

것처럼 가치 있게 느껴졌다. 벨리타가 있음으로 모든 것에 의미가 생겼다.

사랑하오. 벨리타. 내 목숨보다 더.

그가 온몸으로 보여 주는 절절한 사랑에 벨리타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여인이 된

것 같았다.

이 침대에서 유일하게 안아 보는 내 아내 벨리타. 칼리크는 숨을 고르며 기진맥진 누워 있

는 벨리타를 살뜰히 안으며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었다. 벌써 그녀의 눈꺼풀이 점점 아래

로 내려오고 있었다.

자신에게 이토록 시달렸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감긴 그녀의 눈두덩에 가만가만 입맞춤을 한 칼리크는 얼굴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또 있을까.

칼리크는 다시 제 품 안에 꼭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신 헤어지지 않을 거요. 떨어지지도 않을 거요.

우린 항상 같이 있을 거요.

절대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소.

칼리크는 그녀가 죽었다고 여겨졌을 때의 그 끔찍함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신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겪지 않을 것이다. 절

대 잃지 않는다. 그녀가 있어야 자신이 산다.

내 생명.

내 사랑.

내 사는 의미.

그의 입에서 흡족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를 꼭 안고 잠을 청하는 이 순간이 너무

나 행복하고 가슴이 꽉 찬 느낌이었다.

잘 자요. 벨리타.

앞으로 우린 더 행복해질 일만 남았소.

칼리크도 깊게 잠든 벨리타를 따라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잠이 들면서도

그는 벨리타가 제게서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안으며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었다.

***

“대장! 적들입니다. 적들의 군선들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에단의 주둔지인 파오가 발칵 뒤집혔다.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몰려

오고 있는 군선들을 마주하고 보니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나팔 소리가 난무하고 훈련을 받은 민간 사병들이 중무장을 한 채 속속 한자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슬쩍 산티노가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제 하인을 서둘러 불렀다. 시키는 대로 말

을 준비한 산티노의 하인은 전속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에 기회를 확실히 잡는다. 가장 확실한 공을 세울 기회다.

산티노는 어디가 가장 안전한 장소일지 미리 물색해 놓았기에 멀리 떨어진 언덕 사이 틈

새로 바삐 걸어가기 시작했다.

에단은 자칼단을 시켜 미리 연습한 대로 해안가 마을에 기거하고 있는 백성들을 우선 대

피시켰다. 간단히 짐을 꾸려 놓은 상태라 재빠르게 마을을 벗어나 절벽 위 계단으로 모두

피신했다. 그사이 황궁으로 전서구를 날렸다.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도 속히 지원을 받아야 한다. 시간이 없다.

“꼭 다들 살아남으세요.”

자칼단과 같이 있는 파오 안으로 레이나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오더니 느닷없이 거침없는

발언을 던졌다.

“나와 많은 여인들을 살려 준 분들입니다. 저의 기도에 신이 응답해 주신 겁니다. 여러분이

요. 그러니 꼭 사세요. 상처도 입지 마세요. 부탁드립니다.”

모두에게 말을 던지면서도 레이나의 두 눈은 에단에게 오래 머물고 있었다. 제 할 말을 마

친 레이나는 붉어진 얼굴로 후다닥 파오를 뛰어나갔다. 에단은 귀가 벌게진 채 서둘러 진

두지휘를 하기 위해 모두를 이끌고 파오 밖으로 나섰다.

적들의 배는 점점 해안가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투 준비.”

매일 점검한 덕에 계단 쪽 난간들 속은 액체로 꽉 차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채, 에단

과 지휘자들은 산티노가 파 놓은 땅굴로 향해 작은 창문으로 적의 동향을 살폈다.

가까이 정박한 군선들에서 개미 떼처럼 적들이 쏟아지듯 내려오기 시작했다. 곧 시작이다.

숨죽이고 지켜보는 에단 일행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

마을을 침범한 적들이 모든 가옥들이 텅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는 서둘러 절벽 쪽으로 달

려왔다. 그들은 중무장을 한, 무시무시한 해적의 모습과 같았다. 적들의 고함 소리와 떠들

어 대는 소리가 쩌렁쩌렁 해안가를 흔들었다.

절벽 바로 아래까지 밀려온 적들이 위를 향해 화살을 비처럼 쏘아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벽이 높아 위까지 닿지 못하고 절벽 상부에 화살들이 박히기만 했다.

병풍처럼 늘어진 절벽들에 걸쳐져 있는 수많은 계단으로 적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새까

맣게 절벽을 올라오려는 적들로 계단이 점점 채워지고 있었다. 올라오면서 다시 쏘아 대는

화살들이 이제는 절벽 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다다다닥.

절벽 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 둔 두꺼운 나무판 방어막에 수많은 화살들이 박히며

진동했다. 에단이 이끄는 병사들은 그 방어막 뒤에 숨죽이며 대기하고 있었다.

바짝 말라 있는 나무 계단들이 올라가기 수월하게 잘 설계된 것을 비웃으며 적들은 차곡

차곡 위로 계속 전진했다. 계단 안쪽에 가늘게 물이 고여 있는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해안가에 접근하지 않은 채 아직 바다에 떠 있는 배 위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에무르는 절

벽에 새까맣게 붙어 움직이고 있는 제 군사들을 바라보며 기대에 찬 눈빛을 던졌다.

어서 가거라.

다 쓸어 버려라.

아무도 우릴 막을 자 없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

의기양양한 에무르는 무방비 상태로 놓인 해안가를 흡족하게 바라보며 눈빛을 번쩍였다.

에단의 눈빛은 더 번쩍였다.

기다려야 한다.

되도록 많은 적들이 계단 위로 올라와야 한다.

에단은 작은 창으로 은밀히 적들의 상황을 확인하며 손을 들었다. 이제 거의 다 되었다.

이때다.

드디어 에단이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신호가 땅굴 밖에서 준비하고 있던 이들에게 전달되

자 곧바로 계단 난간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밧줄에 일제히 불이 붙었다. 그들은 옆에 놓인

나무통 뚜껑 위로 비죽이 나와 있는 밧줄에도 불을 붙여 절벽 쪽으로 굴렸다.

치지직.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기름을 칠한 밧줄에 붙은 불이 순식간에 난간 손잡이 봉 쪽으로

이동했다.

화르륵.

난간 속을 꽉 채운 기름에 불이 붙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계단 난간에 불이 붙으며 아래쪽

으로 불길이 쏜살같이 흘러내렸다. 계단 쪽으로 굴린 나무통들이 불길에 터지면서 그 안을

채운 기름이 쏟아져 내려 위쪽 계단부터 불이 물 흐르듯 빠르게 퍼져 나갔다.

으아아악.

적들의 고함 소리가 비명 소리로 바뀌어 해안가를 휩쓸었다.

손잡이를 잡고 올라오던 군사들의 손이 타들어 가고 난간에서 터져 나온 불길이 계단 쪽

으로 옮겨붙는 바람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식겁하고 다시 내려가려던 군사

들이 아래로 속절없이 무너지고 다급한 이들은 높은 곳에서 바로 뛰어내려 돌바닥에 떨어

져 즉사하거나 심한 부상으로 일어나지 못했다.

위에서 기름통을 굴려 계단 윗부분에 불이 붙어 난간을 따라 아래 끝까지 불이 타들어 가

고 바짝 마른 계단으로 옮겨붙으니 길고 긴 계단에 올라선 적들은 위에서부터 아래 단까

지 모두 불길에 휩싸였다.

활활 타들어 가는 계단 위에서 적들은 온몸에 불이 붙고 아래로 추락했다. 절벽 앞까지 밀

려온 군사들은 뒤로 뒤로 후퇴할 뿐이었다. 계단 위로 올라온 적들은 대부분 화를 면치 못

했다. 계단이 자연 소멸되고 나자 그들은 위로 올라올 방법이 없었다.

도끼로 절벽을 찍어 가며 올라오려고 시도를 하고 있었지만 어림없다.

아래에서는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 반면 위에서는 마구잡이로 화살을 쏠 수 있는 거리. 에

단 쪽이 유리하다.

에단의 병사들이 이제야 절벽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화살을 비 오듯 아래로 날

리기 시작했다. 해안가에 밀려오고 있던 적들은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자가 절반이었고 나

머지는 다시 배로 돌아가려고 바닷물로 뛰어들고 있었다.

에무르는 인상을 구겼다.

“뭐야? 저것들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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