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환상의 늪 속으로
칼리크가 멀리 출타 중이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만날 수가 없었다. 아침에 같이 식사를 하
지 않았으면 오늘은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하고 흘러갈 뻔했다. 먼 지방이라 그 정도 거리는
신검과 떨어져 있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신검을 대동하고 갔지만 불안한 얼굴로 그녀가 머
무는 곳에 겹겹이 기사단을 배치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들어오지 못하게 해 놓고 갔다.
늦은 저녁이 되자 그녀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그녀의 방에 준비된 욕조에 유모가 장
미 꽃잎을 띄워 주었다. 이것도 오래간만이다.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향기 그윽한 곳에 몸을 담갔다. 마음이 풀어지고 안정이 되어서 그
런지 예전 일이 많이 떠올랐다.
이 세계로 와서 처음 욕조에 들어갔을 때, 이상한 시녀가 들어와 옷을 벗자 남자임이 밝혀
지던 사건이 생각나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놀랐던지. 이제는 웃을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다. 좋은 현상이다. 맨 처음 칼리크를
산속에서 만나고 그 무서운 상황에서 키스를 하다 기절까지 한 일도 떠올랐다. 엄청난 키
스였다.
향기로운 물을 휘저으며 제 몸을 쓸어내리자 손끝에 스친 가슴 끝이 저릿했다.
아… 칼리크는 언제 돌아오려나. 좀 쉬어야 할 텐데.
벨리타는 느긋하게 이 시간을 즐기면서도 생각은 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똑똑똑.
유모가 가벼운 가운을 입혀 주고 있을 때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핀핀이 달려가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문을 다시 두드리려고 손을 올린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칼리크였다.
날아온 것이 아니라 달려온 것 같았다. 숨을 거칠게 내쉬며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에 가슴
이 다시 저릿했다. 호랑이 신수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으로 바로 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유모가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가 주었다.
한발 한발 다가오는 그에게서 바람 냄새가 풍겼다. 신선하고 청량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까이 다가가던 칼리크는 그녀가 심호흡을 하는 듯 하자 또다시 주춤, 그 자리에서 멈추
었다.
[냄새난다고 싫어했어. 땀에 쩐 지독한 냄.새.]
죽은 놈의 목소리가 자꾸 떠오르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은 또다시 그를 옥
죄었다.
되도록 빨리 돌아오기 위해 강행군을 했더니 땀에 절어 버렸다. 보고 싶은 마음에 바로 뛰
어오느라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불찰이다. 먼지를 뒤집어쓴 자신이
신경 쓰였다.
벨리타가 싫어할 텐데….
그의 방황하는 시선 속에 그녀 뒤로 욕조가 보였다. 다행히도 욕조에는 미지근한 물이 찰
랑거렸다. 잘되었다. 욕조를 반쯤 가리고 있는 파티션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그는 바로
훌훌 옷을 벗어 던지고는 욕조에 쑥 들어갔다.
하아….
물속에 몸을 담그니 절로 심신이 풀리며 탄성이 흘러나왔다. 다시 고개를 돌려 파티션 너
머로 벨리타를 찾으니 그녀가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도 부끄러워한다. 뭘 해
도 귀엽다.
“언제까지 눈을 감고 있을 거요?”
벨리타는 그 소리에 바로 눈을 떴다. 달아오른 얼굴로 물에 젖은 칼리크를 바라보는 그녀
의 두 볼은 점점 더 붉어지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들리고 그가 예고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후다닥 다시 두 눈을 꼭 감은 벨리타는
자신 앞으로 물 내음을 풍기는 그가 천천히 다가오는 걸 느꼈다. 심장이 제멋대로 빨라지
며 마구 두근거렸다.
쪽.
이마에 그의 입술이 살짝, 아주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살며시 눈을 떠 보니 뒤돌아서 멀어져 가는 그의 허리춤에 수건이 둘려 있었다. 구릿빛으
로 물든 그의 등 근육과 뒷모습에 온 살이 다 떨렸다. 숨이 점점 가빠 왔다.
실망했다. 키스라도 해 주지. 자꾸 욕심이 올라온다. 공백 기간이 있어 그런지 선뜻 내색은
못 하겠는데 긴장은 되었다.
떨어진 옷을 줍느라 움직이는 그의 우람한 팔 근육과 단단한 다리, 살짝 가려진 엉덩이가
사람을 들쑤셔 놓았다. 심장이 계속 널을 뛴다.
이쯤 되면 먼저 말을 해도 되지 않을까. 벨리타로서는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이제 그 정도
는 요구해도 될 듯싶었다.
“칼리크. 이걸로 끝이에요?”
그가 동작을 멈추고 몸을 폈다. 그러나 그녀를 향해 뒤돌지는 않은 채 그대로 가만히 서 있
었다. 한참 동안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는 그의 어깨가 들썩이며 움직이는 잔근육이 그녀
를 홀렸다.
꿀꺽.
저도 모르게 긴장한 벨리타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벨리타….”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더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소.”
단호하면서도 어딘가 안타깝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그녀를 휘감았다.
“왜요?”
키스 하나 해 주는 게 그리 어렵나?
“만약… 더 이상 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요.”
아… 그런 거구나. 그제야 벨리타는 그가 왜 애써 자신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지 이해했다.
그래도….
“아직 이른 것 같소. 당신 마음을 더 얻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오.”
그 정도로 깊게 생각하고 있구나. 가까워진 것 같다고 바로 안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였다.
그의 모든 근육들이 팽팽하게 수축하며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아니 억제하고 있는
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의 뜻은 충분히 알겠다. 하지만.
이제 그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아야겠다. 허송세월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 서로가 이
렇게 원하는데.
지금 그에게 안겨도 누가 뭐라 하겠는가. 내 맘이다.
여전히 뒤돌아선 칼리크는 펄쩍 놀라며 손에 들려 있던 옷가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의
드러난 등 뒤로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벨리타는 조용히 다가가 그의 거칠게 보이는 등에 살며시 손을 갖다 대었다. 그가 움찔할
때, 또다시 수축하는 근육을 손바닥으로 고스란히 느껴 보았다. 보는 것보다 더 섹시한 감
각이었다. 손에 닿는 그의 모든 곳이 유혹적이었다.
어루만지듯 애틋한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칼리크는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왜 안
고 싶지 않겠는가. 안고 싶어 돌아 버릴 것 같은데. 하지만 절대 강요할 생각은 없다. 이대
로 더 있다간 더 이상 자제할 수 없을 것 같아 얼른 나가려 했다. 지금 이 정도도 선물이라
여기려 했다. 사실 그러했고.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유혹한다. 안고 싶다.
그녀의 뜻을 거스를 생각은 절대 없다. 안 된다고 하면 그냥 다시 떠나면 된다. 그래도 괜
찮다. 그녀를 품으려고 이렇게 달려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자
꾸 욕망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벨리타가 너무 사랑스러운 탓이다.
“벨리타… 이러면 내가… 멈추지 못하고….”
“왜 멈춰야 하는데요?”
칼리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말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그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날 안고 싶지 않아요?”
바닥을 딛고 있는 그의 두 다리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그걸 말이라고 물어? 지금 미치기
일보 직전인데.
대답은 하지 않아도 그의 눈빛과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벨리타, 당신을 안
고 싶다고. 사랑하고 싶다고. 그의 두 눈동자가 뜨겁게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럼 사랑해 줘요.”
칼리크의 입술이 벌어지며 점점 넋이 나가기 시작했다. 온몸의 에너지가 하나로 응축되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정…말이오?”
그래도 확인해야 했다. 벨리타도 정말 원하는지.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도 원하는지.
반드시 알아야 했다.
벨리타는 대답 대신 조용히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을 풀어 내렸다.
스르륵.
칼리크는 가운이 벌어지며 보이는 그녀의 환상적인 굴곡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정신을 차릴 필요가 없다. 그냥 빠져 버렸다. 그 환상의 늪 속으로.
그녀에게 한걸음에 다가가 그대로 안아 버렸다. 보드라운 그녀와 강인한 그의 속살이 만나
부딪히며 서로를 자극했다. 맞닿은 곳이 불에 덴 듯 뜨겁게 타들어 갔다. 온몸에 경련이 다
일었다.
칼리크는 터질 것 같은 가슴으로 그녀의 입술을 다급하게 찾았다. 아….
얼마나 닿고 싶었는가. 이 입술에. 그리고 다른 모든 곳에.
다시 만나 서로의 입술을 탐닉하는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방 안에 온통 흩뿌려졌다.
두 사람 사이로 흐르는 공기까지 후끈 달아올라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절절
끓고 있었다. 다 녹아 흐물흐물해질 정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벨리타….
칼리크….
다시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는 연인처럼 서로를 안다가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해일처럼 서
로를 가졌다. 침대 위에서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이 되어 서로를 덮쳤다.
모두가 다 타는 것 같았다. 다 쓰러지는 것 같았다. 다 흔들리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빙글
빙글 돌며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를 정도로 칼리크는 벨리타의 안에
서 황홀함에 탄성만 가득 쏟아 내며 포효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너무나 오래간만에 천국을 다시 맛보았다.
***
땀으로 젖어 있는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빙빙 원을 그리듯 만지며 벨리타는 행복한 미
소를 지었다. 방금 나눈 사랑의 여운을 서로 느끼며 서서히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
시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 그 느낌이 너무 행복했다.
“아프지 않았소?”
칼리크는 너무 간절해 둑이 무너지듯 그녀를 가진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방금 전은 거의
미친 듯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이렇게 연약한데. 자신이 미쳤다. 그건 사실이다. 벨리타에
게 미쳐 있는 건.
그녀는 고개를 얼른 저었다. 괜찮아요.
걱정이 되어 떨리는 눈동자로 쳐다보던 칼리크가 안도하며 고개를 베개 위로 떨구었다.
“내가 더 조심하겠소.”
소중히 여겨지는 게 싫을 리 없다. 그녀의 미소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벨리타가 있는 이곳이 천국이었다.
사실, 수건 하나만 두르고 그녀를 유혹할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벨리타가 허락해 준다면
그녀를 숭배할 정도로 받들 것이다. 하지만 유혹할 마음을 먹진 않았다. 키스 한번 못 하고
돌아설 때는 마음이 무거웠다. 이것만으로도 만족하자 다독였지만, 자꾸 욕심이 생겨났다.
하지만 자신이 표현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