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한발 한발 천천히
“배 안 고파요?”
칼리크는 입에 하나 들은 고기를 물과 함께 꿀꺽 삼켜 버렸다. 이제 조금씩 먹어야지. 한꺼
번에 다 넣고 씹지 말아야겠다. 좀… 돼지처럼 보일 수도 있을 거다.
“고프오. 당신도 어서 드시오.”
영문을 모르겠다. 어디 아픈가? 잘 먹지도 못하는 칼리크가 이상함을 넘어서 염려스러웠
다.
그녀가 벌떡 일어서자 칼리크가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같이 안 먹고 나가는 건가 싶어 긴
장이 되었다.
그런데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한테 다가왔다.
아….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벨리타가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대고는 염려하는 눈빛으로 안색을 살폈다. 이것만으로도 가
슴이 뜨끈해졌다. 이런 눈빛을 한 벨리타라면 솔직히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좀 많이 먹어 싫소?”
벨리타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뭘 묻는 건지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돼지처럼 먹는 것 같지는 않소?”
그녀가 저를 싫어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다 미움받기까지 한다면 세상 못 살 것
같다.
“난 잘 먹는 사람이 좋아요.”
벨리타는 그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녀는 제가 좋아하는 걸 사실
대로 말해 주었다.
“당신처럼요.”
칼리크의 입술이 귀까지 찢어질 듯 벌어졌다. 눈도 거의 풀리려고 했다. 정말이지? 나처럼.
그놈이 거짓말을 한 거였다.
그는 다시 맛있게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원래 먹던 방식대로 음식을 하나 가득 입에 넣고
씹었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 벨리타가 이렇게 먹는 것이 좋다고 하니 더 맛있다.
마구 먹고 있는 자신에게 벨리타가 살짝 미소까지 지어 주었다. 식사 하나 가지고도 그녀
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세상 살맛 나게 기운을 준다.
게다가 벨리타도 잘 먹는다. 밥맛 떨어져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잘 먹는 모습이 그에게
안도와 기쁨을 선사했다.
고마워, 벨리타.
칼리크는 그녀만 앞에 있으면 마냥 행복해졌다.
벨리타는 다시 잘 먹고 있는 칼리크가 참 잘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그에 대한 감정
과 느낌을 외면해 왔었다. 하지만 이제 그 빗장을 풀고 나니 다시 그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거칠게 잘생겼다.
이건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그를 보는 모든 이가 그리 생각할 것이다. 이제 그
와 다시 마음을 키워 나가면 된다. 한발 한발 천천히.
그녀는 그와 미소를 주고받으며 오래간만에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산티노는 흡족했다. 자신만 사용할 수 있는 작은 개인 파오를 할당받았다. 지금까지는 커
다란 파오 한쪽을 사용했었다. 다른 사람들의 코 고는 시끄러운 소리와 뒤척임 때문에 곤
욕이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대우를 해 주었다.
아무리 처음에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스스로 이곳에서 묵는다고 했지만 개인 파오가 아닌,
귀퉁이 한 곳을 배당해 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참았다. 황제에게 잘 말만 해 준다면.
그런데 역시 공작인 자신한테 이렇게 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너무 늦게 대우를 해 준 것이었지만 지금이라도 만족하기로 했다. 여기서 잘 대우받는 것
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건 이를 악물고 참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제 공
을 높이 사 이렇게 개인 파오를 할당받고 보니 이제야 제대로 잘 수 있게 되었다.
이참에 제 저택에서 하인 두 명도 불러들였다. 그것도 에단에게 허락을 받는 시늉을 했다.
참 내. 내가! 이런 일조차 일일이 평민인 에단에게 허락을 구하는 척을 하다니. 속이 뒤틀
렸지만, 분위기 파악은 제대로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에단이 대장이니 겸손
하게 구는 척을 했다.
그 진가가 점점 발휘하고 있는 셈이었다. 역시 인내가 답이었다. 탁월한 판단력이 한몫했
다. 이번 일만 잘 끝나면 다신 볼 일 없는 인간들이고 보더라도 확실히 군기를 잡아 버릴
것이다. 어딜 감히.
그날도 머지않았다.
하인이 떠다 주는 물로 세수를 하고 씻으니 여간 편한 것이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 가지고
오는 음식을 먹고 좀 더 편한 생활이 이어지자 산티노는 얼굴이 다 펴기 시작했다.
이제 기다리는 사람만 오면 이 생활도 끝이다.
황제.
언제 돌아오려나….
기다림에 지쳐 몸이 다 뒤틀린다. 시원하게 씻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리기까지 했다. 다른
이들은 아래쪽 냇가에서 잘도 씻어 댔지만, 공작 체면이 있지. 이게 제일 곤욕이었다.
모든 걸 꾹 참고 앞으로도 무슨 공을 더 세울까, 그 궁리를 하느라 산티노의 머릿속이 바쁘
게 돌아갔다.
***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그런지 벨리타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로 정한 별궁에서 생
각보다 쉽게 잠이 들었다. 그만큼 피곤한 탓도 있었다.
자신이 일찍 곯아떨어져 칼리크가 찾아왔다 쓸쓸히 되돌아간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칼리크는 아무리 해도 제 침대에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물론 이젠 그녀가 안전하게 있다
는 것도 안다. 잘 자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자신은 잘 못 자겠다.
서둘러 일을 끝내고 별궁에 있는 벨리타를 찾아갔는데 벌써 잠이 들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많이 피곤했겠지.
어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는 정신이
아찔했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이건 정말이지 신의 은총이 아니라면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까딱 잘못했다면 불길 속
이나 땅속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녀에게 신수라도 나타나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했었다. 그럼 불안함이 줄어들 텐데. 할
수 없다. 신검을 계속 그녀 옆에 둘 수밖에. 이젠 전쟁도 끝났고 그리 큰 위험은 없을 것이
다. 생기더라도 제 안에 신수가 있으니 자신은 괜찮다.
지금도 그녀 옆에 있을 신검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손을 안 잡아도 좋으니 어제처럼 이 침
대에서 같이 잤으면 좋겠다. 그녀를 보고 존재를 느끼기만 하면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
은데.
자꾸 한숨만 내쉬어졌다. 어제처럼 그녀가 극적인 순간에 짠, 하고 등장하지도 않을 테고.
그녀가 마음을 열어 주었으니 하루하루 노력하며 천천히 가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이는 조바심이 저를 괴롭힌다.
이래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다른 건 다 다스릴 수 있는데 보고 싶은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유클로에 있을 때는 멀어
서 보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바로 코앞에 있는데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에 애가 탔
다. 그냥 옆에 꼭 데리고 다니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그렇다고 그럴 수도 없고. 벨리타가
싫어하는 일을 해서도 안 된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는 그리움이 담긴 눈빛으로 밤하늘에 떠 있는 둥근 달만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있었다.
***
어제 저녁 식사 이후 만나지도 못했기에 아침 식사를 같이했다.
벨리타는 푹 자고 일어나 개운한 기분으로 생기 있게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저 멀리 미
리 와서 앉아 있는 칼리크는 눈 밑이 어둡고 얼굴빛이 과히 좋지 않았다.
너무 일이 많았나 보다.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닌지. 옆에 가까이 가서 조금 챙겨 줘야겠
다.
벨리타는 종을 울려 뒤에 대기하고 있는 시종을 불렀다. 그리고는 황제 옆자리로 모든 식
기와 음식들을 옮기게 했다. 그 과정을 놀란 눈으로 보고 있는 칼리크의 얼굴빛이 좀 전보
다는 나아 보였다.
“너무 멀어요. 이제 우리 이렇게 먹어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크 때문에 미소가 지어졌다.
바로 옆자리에서 같이 식사를 하니 더 좋았다. 공백기를 더 빨리 메꿀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서로 부딪히는 시선이 잦아졌고 살짝 긴장도 하며 때로는 불꽃이 탁 터지다 사
라지곤 했다.
이렇게 살짝 떨리는 긴장감이 서로를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내쉬는 숨소리가 기
분 좋게 떨리고 있었다.
벨리타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그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으로 떨어졌다. 칼리크의 숨소리
가 슬쩍 거칠어졌다.
그녀는 예전 식사를 하다 말고 그의 손에 이끌려 그의 침실로 달려갔던 일이 떠올랐다. 얼
굴이 달아오르고 이곳 공기마저 살짝 덥게 느껴졌다.
스르륵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 그의 시선이 다시 꽂혔다. 점점 뜨거워지는 시선에 입술마저
뜨거워졌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는 걸까.
칼리크는 같은 생각이 아니라 더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온실 비밀의 방에서 얼마나 격렬
하게 서로를 탐했는지 그 순간이 떠올라 숨이 거칠어졌다. 수건 하나만 두르고 온실을 같
이 누비던 일까지 떠올라 몸속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더웠다.
어젯밤 너무 간절하게 그리워했더니 이른 아침부터 제 몸이 말썽이다. 테이블 아래이니 망
정이지 서 있었다면 벨리타가 알아차릴 뻔했다. 칼리크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에 자신의 욕
망을 잠재우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안고 싶었다. 아내인 벨리타를 사랑하고 싶었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젠 제대로
알게 하고 싶었다. 활활 뜨겁게 불태우고 싶었다.
하지만.
벨리타가 허락해 줄 때까지 절대 내색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은 조심스러운 것이다.
다른 오해나 실망을 주고 싶지 않다. 그녀가 사랑스러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지 몸만 탐
이 나 안고 싶은 것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잘못하면 그런 오해도 받을 수 있기에 신중해야
한다.
그녀가 먼저 원하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칼리크는 미묘한 긴장감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벨리타와 헤어졌다. 모든 것을 그녀가 정하
는 대로 할 것이다. 꼭 그럴 것이다.
오늘은 지방으로 날아가 반역에 동참한 귀족들을 처리하고 돌아와야 한다. 이미 그들은 가
까운 거리에 있는 충성스러운 귀족들에 의해 감금 상태로 있고 도망친 자들도 추적하고
있다.
하나하나 제대로 매듭을 지어야 한다. 반역을 저지른 귀족들은 죗값을 치를 것이다. 호랑
이 신수가 있으니 모두 끝내고 오늘 밤 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큰 일을 직접
처리하고 올 것이니 앞으로는 데인과 충성스러운 귀족들이 해결하면 된다.
벨리타. 잘 다녀오겠소.
호랑이 신수를 타고 황궁을 떠나면서도 칼리크는 연신 뒤돌아보며 벨리타를 그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