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많이 아팠어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벨리타의 눈빛에 온기가 있었다. 깊고 넓은 그녀의 마음이 보였
다.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
얼마나 이 눈빛을 원했던가. 그의 팔이, 그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그의 감격 어린 숨소리와 경련이 일듯 꿈틀대고 있는 근육들이 고스란히 그녀에게 느껴졌
다. 다시 느끼는 서로의 온기 사이로 많은 말이 오고 갔다.
“탑에서… 많이 아팠소?”
그에게 솔직히 말해 주는 것이 앞으로를 위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요. 많이 아팠어요.”
“날 많이 원망했지?”
“당연하죠.”
“미안하오.”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더 보여 줘야 할 거예요.”
다 보여 주겠소. 더 보여 주겠소. 그러니 내 옆에서 다 받아만 주시오.
“이 정도까지 마음을 풀어 줘서 고맙소. 평생 당신에게 잘하겠소.”
“아주 많이 잘해야 할 거예요.”
그렇게 서로를 안고만 있어도 그동안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 같았다.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응어리들이 이 순간 스르륵 사라지는 걸 느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하던데 그것
처럼 쉽지는 않았다. 응어리가 풀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것도 신이 도와주신 것 같았다. 황후궁이 불타 버렸지만, 그의 진심을 보았으니 마음도
다시 열 수 있었다. 아름답고 화려했던 황후궁은 사라졌지만 대신 그에 대한 진심을 알게
해 주었으니 감사할 뿐이었다.
“이제 잘 잘 수 있겠어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표정이 처량하게도 보였다.
“그럼 침대에서 같이 잘까요?”
마치 신의 은총이 내린 것처럼 얼마나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는지. 어린아이처럼도 보였다.
점점 어려지는 칼리크였다. 그녀의 얼굴에 은근히 미소가 지어졌다. 나쁘지 않다. 이렇게
잃어버렸던 걸 하나하나 차근차근 다시 쌓아 올려 가자.
몸을 뗀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침대로 향하려 했다. 아. 잊고 있었다. 호랑이 신수.
다시 만난 그들 뒤에 호랑이 신수가 단단하게 떡 버티고 있었다.
“호랑이 신수님.”
그녀가 호랑이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그리 부르자 칼리크가 뒤에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 벨리타한테 혼난 것에 대해 단단히 삐졌는지 신수가 고개를 팽, 돌렸기 때문이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벨리타는 신수에게 정중하게 제대로 사과를 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너무 미안했다. 사정
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다니. 칼리크가 저한테 한 것처럼 하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마음이 풀어지겠어요?”
이번에는 벨리타가 신수의 눈치를 보았다. 저런 모습은 싫다. 빨리 도와줘야겠다.
“그럼. 부르기 쉽게 이름 하나 지어 주시오.”
이름! 그래. 이름. 필요하다.
이렇게 칼리크 못지않게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존재에겐.
이름을 지어 주면 신수 마음이 좀 풀리려나. 음….
열심히 생각하는 벨리타의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보
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한껏 부풀어 올랐다.
“떠올랐어요.”
“뭐요?”
칼리크는 무슨 이름이 나올까 기대가 되었다.
“내 백마 이름은 당신이 지어 줬죠?”
“아! 벨롱? 그게 왜?”
“저도 답례를 해야죠.”
그녀가 짓궂게 씨익 웃음을 짓는다. 뭘 해도 사랑스러웠다. 지금도 그냥 꼭 끌어안고 싶어
졌다.
“칼롱.”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가 바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푸하하하.
칼리크의 입에서 한 박자 늦게 우렁찬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벨리타. 벨롱.
칼리크. 칼롱?
얼마나 원 없이 웃어 보았는지 모른다. 또다시 이렇게 웃을 수 있게 되다니. 자신을 이 정
도로 웃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 내 아내. 내 천사. 그러기에 너무나 미안하오. 내 평생 다 갚
고 살겠소.
칼리크는 다시 그녀를 끌어안으며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힘주어 안은 두 사람은 온기를 나누며 서로를 북돋워 주었다. 다시 평온과 행복을 맞이한
두 사람 뒤로 새로운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
헉!
칼리크는 진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환한 햇살에 눈이 부시든지 말든지 바로
옆자리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휴우….
있다. 벨리타가 여기 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조심스럽게 침대에 도로 누웠다. 새근새근 단잠에 빠져 있는 벨리
타를 향해 모로 누운 그는 원 없이 그녀를 눈으로 보듬었다.
너무 사랑스러워 가슴이 저며지는 것 같았다.
손이 앞으로 뻗어 나가다가 멈추었다. 만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곤하게 자는 그
녀가 깰까 봐 걱정이 앞섰다. 할 수 없이 손을 거두고는 한참을 더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
다. 하루 종일 이러고 있고 싶었다.
앙증맞은 저 입술은 깨물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다. 길게 뻗어 있는 속눈썹, 발그
레한 두 볼, 오뚝한 코. 모두가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몸이 갑자기 후끈 달아올랐다. 지금 이러면 곤란하다. 자신의 몸 상태를 벨리타가 알게 하
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불끈거리는 자신의 몸을 진정시키고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이제 집무실로 가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긴 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
만 하는 수 없었다.
그녀가 저렇게 잠이 들어 있고 저 혼자 먼저 침대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지금 상황이 사랑
을 나누고 난 다음 날 풍경 같아 가슴이 저렸다. 그때가 정말 좋았다. 다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그녀와 다시 불타는 밤을 가질 수만 있다면.
노력할 것이다. 해낼 것이다. 되돌아갈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다 돌려놓은 다음 서로 사랑
을 나눌 것이다. 아주 뜨겁게.
커다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에도 다시 한번 침대 쪽
을 바라보며 벨리타의 붉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펼쳐져 있는 것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는 겨우겨우 나갈 수 있었다.
휴우….
문소리가 나자마자 벨리타는 살며시 눈을 떴다. 자는 척하느라 혼났다. 숨소리도 가다듬느
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을 때 이미 잠이 깨어 버렸다. 하지만 이
상하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쑥스럽다고 할까, 긴장이 된다고 할까. 공백기가 있어서 그런
지 이런 순간이 어색했다.
몇 시간 전, 날이 밝아 오고 있는데 두 사람은 침대에 들었다. 칼리크가 제 손을 꼭 쥐고는
조용히 잠을 청했다. 물론 쉽게 잠들지 못할 거라는 건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잠들
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같이 자는 것이 마치 처음 있는 일 같았다. 손만 잡고 자는 데도 힘이 들었다. 다시
익숙해지려나….
그가 드디어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는 그녀도 잠을 청했다. 쉽게 잠들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주 푹 잠이 들었었다. 그가 잠들기 전까지 긴장을
했었던 모양이다.
그가 자신을 계속 보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눈을 뜰 타이밍을 놓쳤더니 더 뜰 수가 없
었다.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기만을 바라며 그냥 계속 자는 척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가 밖으로 나가 줬으니 다행이지 숨이 다 막힐 뻔했다.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건지…. 갑자
기 칼리크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 두 사람이 넘어야 할 선은
존재했다.
예전 사이가 좋았던 때가 떠올랐다. 아니 불타오르던 때가 떠올라 그녀의 두 뺨이 붉게 물
들어 갔다.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제 옆에 신검이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계속 신검을 보디가
드처럼 붙여 놓을 모양이다. 든든하긴 했다.
그녀도 별궁으로 가기 위해 침대를 빠져나왔다. 정비할 것도 준비할 것도 많았다. 이제 새
로운 첫날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
칼리크는 급한 서안만 확인하고는 호랑이 신수를 타고 황도 성곽으로 향했다. 서두르지 않
고 천천히 하늘을 날아갔다. 지상에서는 많은 백성들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지
르고 손을 흔들었다. 이제 황도에는 호랑이 신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성곽의 상황을 보고 받고 해야 할 일들을 승인했다. 모두 잘 버텨 주었다. 어수선했던 황도
가 조금씩 안정이 되어 갔다. 군사들도 마무리를 잘해 주고 있었다.
이젠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모두가 안정된 상태에서 평화로운 대제국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잘 싸워 주었다.
칼리크는 황궁으로 다시 돌아와 저 멀리 사람들이 모여 황후궁 잔해를 치우는 걸 보며 내
려섰다. 다시 지어 줘야겠는데….
급한 일부터 하고 결정해야겠다. 다른 생각이 났지만, 꾹꾹 눌러 버렸다. 벨리타에게 말도
꺼내지 못할 거, 생각하면 뭐 하나 싶어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어제의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오늘은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다. 그래도 벨리타가 보고
싶어 저녁 식사는 같이하자 청했다. 너무 떨어져 있었더니 힘이 점점 빠지고 있었다. 그녀
에게서 힘을 받아야겠다. 보고 싶다.
고운 모습으로 테이블 끝에 앉아 저를 기다리는 벨리타의 모습에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와 음식들이 제 앞에 휘황찬란하게 놓였지만 우선 눈부터 호강시
켜야겠다. 저 앞에 앉아 있는 벨리타를 잠시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것만으로도
심신이 편안해졌다.
꼬르륵.
다시 한번 들리는 그 소리에 칼리크는 포크를 들었다. 한 입 크게 떠서 맛있게 씹다가 벨리
타와 눈이 마주쳤다. 열심히 씹던 그의 입술이 딱 멈추었다.
[돼지처럼 천박하게 먹는다며?]
죽은 쿠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놈을 죽이는 것만이 목적이라 귀담아듣지 않았
는데 이 순간, 그 말이 신경 쓰였다.
입에 한가득 고기를 넣고 씹고 있었는데 벨리타가 딱 보고 말았다. 그냥 막 삼키려니 목구
멍이 뻣뻣해져 잘 넘어가지도 않았고 입 안의 고기들이 버겁게 느껴졌다.
“왜요? 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
잘 먹다가 말고 멈추더니 자신만 슬금슬금 보고 있는 칼리크가 이상하여 그녀는 걱정스럽
게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칼리크가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왜… 억지로 씹는 것 같을까. 게
다가 깨작거리듯 포크로 음식을 잘게 쪼개고 있었다. 마치 먹기 싫은 아이가 장난을 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