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16화 (116/130)

116화 날 안아 보세요

“내 옆에 있어. 어디 가지 말고.”

유모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마님에게는 녹아내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마치 두 분을 떼어 내려는 역적처럼 저를

취급하셨다.

“왜 유모한테 뭐라 그래요?”

생사를 같이한 유모에게 뭐라 하다니. 벨리타도 유모의 말에 찬성이었다. 벨리타가 뭐라

하는 소리에 칼리크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좀 씻고 올게요.”

좀 씻고 옷도 갈아입은 뒤 다시 오면 된다. 황후궁은 사라지고 없지만 다른 별궁을 임시로

사용하면 된다.

“내가 씻겨 주겠소.”

어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런 말을 저렇게 큰 소리로 말하다니.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모습에 벨리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금방 올게요. 뒷수습도 해야 하잖아요?”

아.

칼리크는 정신을 차렸다. 내란을 치러 냈다. 수습도 해야 한다.

죽은 줄만 알았던 벨리타가 살아 돌아오자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졌던 모양이다.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황제로서 해야 할 일보다 벨리타가 먼저였다. 마음 같으면

온천탕으로 데려가 자신이 곱게 잘 씻겨 주면 좋으련만. 눈에 보이고 손이 닿는 곳에 있기

를 바랐다. 아직 안심이 되지 않았다.

칼리크는 바로 신검을 눈으로 응시했다. 웅웅 소리를 내며 그의 명을 받들었다.

유모와 함께 방을 나서려는 벨리타의 뒤로 신검이 세로로 선 채 조용히 따라나섰다. 마음

이 놓이지 않아 신검을 자신의 분신인 양 같이 보냈다. 이래야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황궁 안은 신검이 움직일 수 있는 거리였다.

벨리타가 문으로 사라지고 나니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벨리타를 따라간 신검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대공은 어서 안정을 취하라.”

상처 입은 데인을 서둘러 내보냈다. 지금까지 데인을 신경 못 써 준 것이 미안했다. 벨리타

만 보고 있느라 그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기사들에게 부축되어 나가면서도 데인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벌써 다 나은 것 같

다며 또렷하게 말도 할 수 있었다. 폐하와 황후마마의 모습을 보니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

다.

“남아 있는 적들을 모두 가두고 자세한 상황을 보고하라.”

부기사단장이 바로 뛰어나갔다. 수세에 몰린 형국이었는데 폐하께서 전부 해결해 주신 것

이다. 패할 수 있었던 싸움에서 순식간에 승리로 기세를 바꿔 주셨다. 폐하의 존재 하나만

으로도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졌다.

황궁 안이 내란 후 뒷수습을 하느라 여전히 분주했지만, 황후궁은 불타 흉한 몰골로 무너

져 내려앉았지만, 황도도 안정을 되찾느라 소란스러웠지만.

벨리타가 살아 있다.

이것만이 가장 중요했다.

내란을 종식시키고 내부의 적들까지 처단한 지금, 완벽히 통일한 이 대륙이 이제는 그에게

의미가 있었다. 그녀가 있음으로 모든 것에 의미가 생겼다. 그녀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

을 것들이 다시 의미 있게 와닿고 있었다. 생생하게 그 기쁨과 만족도 느껴지고 있었다.

칼리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거룩하신 신께 끊임없는 감사를 하기 시작했다.

***

시녀들과 눈물의 재회를 하고 벨리타는 동쪽 별궁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다

시 꾸리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가 찾아왔으니 그 정도의 불편

함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벨리타는 흙먼지를 다 말끔히 씻어 내고 옷을 갈아입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만큼

온몸이 흙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새를 못 참아 몇 번이고 황제의 시종장이 와서 언제 끝나

냐며 재촉을 하는 통에 더 정신없기만 했다.

씻고 있는 동안 칼리크의 신검이 근처에서 제 임무를 충실히 하고 있었다. 이제는 위험이

다 가셨는데도 신검은 날이 바짝 선 상태로 그녀를 보호했다. 얼마나 명령을 강하게 했으

면 이 정도일까 싶을 정도로 신검의 보호는 대단했다.

“이제 다들 눈 좀 붙이세요.”

유모와 핀핀도 어서 쉬기를 바랐다. 방이 여러 개니 편히 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시종

장이 또 등장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벨리타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제 곧 동이 트려고 한다.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은 했지

만 서로 좀 쉬고 낮에 다시 만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제 방으로 사용하려고 정한 곳에

서 그녀는 시종장에게 조용히 전했다.

“좀 자야겠어요. 폐하도 주무셔야죠. 그러니 그리 전해 주세요. 일어나서 다시 만나자고.”

시종장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지만 뭐라 하지도 못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물러갔다.

혼자가 된 벨리타는 드디어 침대에 누웠다. 삭신이 다 쑤시고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살

면서 이런 스펙타클한 생존 전쟁은 처음 겪어 보았다.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

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순간들이었다.

겨우겨우 호흡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몇 시간 후 눈을 뜨면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이다.

다시 얻은 소중한 삶을 정말 열심히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엄청나게 피곤한데 잠이 들지 않았다. 쓰러지면 곯아떨어

질 것만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너무 끔찍하고 무서운 일들을 경험해서 그런 것 같

았다.

그런데 갑자기 문밖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람은 유모 같은데 다른 사람은 모르겠다. 벨리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가운을

걸쳤다.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건 본능으로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신검도 있다.

유모에게 들어오라 명하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의외로 황제의 보좌관이었다. 이 시간까

지 고생한다. 이제 쉬어도 될 텐데…. 그런데 무슨 일로 시종장이 아니라 보좌관이 왔는지

모르겠다.

“마마….”

머뭇머뭇 할 말을 망설이는 모습이 그녀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지금… 폐하께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시며….”

어휴.

다음 말은 안 들어도 알겠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이 쏟아지면 모를까

잠도 오지 않고 이런 소식까지 듣게 되니 가 보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녀는 기꺼

이 움직였다.

보좌관은 또다시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마가 거절하면 어쩌나 싶어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

지 모른다. 폐하와의 사이가 다시 좋아졌다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안타깝

게 지켜보던 두 분 사이였기에 지금 자신의 청을 들어주실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이었다.

조금 전, 시종장의 말을 전해 들은 폐하께서 바로 안절부절, 앉지도 못하시고 불안하게 방

안을 서성거리셨다. 바닥이 닳을 정도로 왔다 갔다 불안해하시는 모습에 시종장이 계속해

서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하시라 말씀드렸다. 하지만 전혀 들리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눈빛이 흔들리시고 호흡이 불안하게 끊어지셨다. 얼굴빛도 점점 새하얘지시고 이마에 땀

이 다시 비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날이 밝도록 저러고 계실 게 뻔해 보좌관은 별궁을 찾아와 무례를 무릅쓰고 문을 두드렸

던 것이다.

마마를 모시고 황제궁으로 향하는 보좌관의 발걸음은 온 시름을 다 내려놓은 듯 가볍기만

했다.

***

칼리크의 방으로 들어가니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호랑이 신수와 같이 있었다. 넓은 방이었는데도 그와 신수가 왔다 갔다 맴돌고 있으니 정

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등장에 둘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안심을 하면서도 은근 눈치를 보는 황금빛 눈동자 넷.

엄한 눈빛을 그들에게 던지며 벨리타는 천천히 다가갔다.

칼리크는 또 그녀에게 혼날 각오를 했다. 하지만 눈앞에 그녀가 보이니 불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불규칙하게 뛰던 가슴도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충격에서 벗어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아무리 그녀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도 보이지 않으니 불안감이 엄습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리로 오라 명령

할 수도 없고, 멋대로 찾아가면 안 좋아할까 봐 그리로 가 볼 수도 없어 환장해서 돌아 버

릴 판이었는데 그녀가 이렇게 나타났다. 이것도 기적 같았다. 어찌 알고 이렇게 딱 와 준단

말인가.

너무 고맙고 기뻤지만 그렇다고 선뜻 다가갈 수는 없었다. 좀 전에는 죽다 살아난 기분에

서슴없이 그녀를 안았지만 아직 그녀와의 거리는 그대로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다. 그

래도 괜찮다. 그녀가 살아만 돌아온다면 자신을 미워해도, 용서하지 않아도 다 괜찮다고

생각한 것은 진심이었다.

“내가… 당신이… 안 보이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아니면 어쩌나 싶고….”

횡설수설하는 건 긴장하면 나오는 그의 버릇인가 보다. 전에도 그랬던 거고.

벨리타는 그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가 땅을 치며 울부짖던 모습이, 미친 듯 소리

치며 오열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어떤 불안함을 느끼고 있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그의 불안을 끝내 줘야겠다. 그도 엄청난 일을 겪었다.

“벨리타… 피곤할… 텐데… 어떻게 여기를….”

“날 안아 보세요.”

“안 와도 되는….”

칼리크는 제 말을 늘어놓다 말고 굳어 버렸다. 방금 그녀가 뭐라 했는데 자신이 제대로 들

은 것인지 얼떨떨했다.

“지금… 뭐라고….”

그녀는 다시 한번 친절히 말해 주기로 했다.

“안아 보세요. 그러면 꿈이 아닌 걸 알 거예요.”

어이쿠.

불도저가 밀고 들어오는 줄 알았다. 얼마나 다급하게 달려와 안아 버리는지 몸이 다 휘청

거렸다. 그가 단단히 안고 있어 다행일 정도로.

불안함을 떨쳐 내며 안정이 되었던 그의 심장이 다른 의미로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천사 같은 나의 벨리타.

자신을 위해 이런 배려까지 다 해 주다니.

아직도 용서하고 싶지 않을 텐데.

아!

그녀가 제 등을 꼭 안아 준다. 손을 올려 꼭 안아 주는 손길에 가슴이 다 먹먹해졌다. 게다

가 토닥토닥 두드려 주며 감동까지 주고 있었다. 자신이 상처 주기 전의 벨리타로 돌아간

것 같았다. 감격으로 목이 다 잠겼다.

칼리크는 가만히 몸을 떼고는 그녀를 애틋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사랑스러

운 얼굴을 조심조심 쓰다듬고 어루만져 보았다. 그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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