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마지막 선물인가
낫고 싶지도 않다. 그냥 이렇게 아프다 죽게 놔두거라.
지금 느끼는 고통은 벨리타가 느꼈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칼리크는 절망감에 눈이 잘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눈으로 보고
싶은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두 눈에 물기가 고였다. 고인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자 누군가의 손이 닦아 준다.
“칼리크.”
이제 환청까지 들린다. 이 목소리는 벨리타의 것이다. 아름답고 청아한 새소리 같은, 생명
을 주는 목소리. 이제는 다시 들을 수 없는 천상의 목소리다. 그녀가 주고 가는 마지막 선
물인가.
좀 전보다도 더 많은 양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면서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는데 이 많은
눈물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었는지 쉼 없이 계속 흘러내린다.
“칼리크. 나 여기 있어요. 정신을 차려 봐요.”
또 벨리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눈앞에 아른거리는 인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이건 꿈이다.
정말로 그녀가 주고 가는 마지막 선물인가 보다.
그래. 그렇다고 해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벨리타의 얼굴을 보고 싶다. 꼭 봐야겠다. 다시는
보지 못할 그 얼굴을 꿈에서라도 봐야겠다.
칼리크는 정신을 차리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뿌옇던 시야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아….
벨리타…가 아닌가?
열에 들떠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잠시 의심을 했다.
벨리타가 아닌 것 같았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여인이었다. 아니다. 저 눈동자. 벨리타가 맞
다.
눈부시게 파란 저 눈동자만 없었다면 바로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벨리타가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걸까….
얼굴은 검은 줄이 줄줄 그어져 있고 눈 밑은 마구 비빈 것처럼 뭉개져 있는, 한마디로 꾀죄
죄한 몰골이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에 흙먼지가 날렸다.
꿈인데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벨리타를 보고 그는 다시 멍해졌다.
아니다.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 제 가슴을 울리고 가면 더 못
잊고 아파할까 봐 일부러 이런 몰골로 나온 건가? 그래도 내 눈엔 예쁜데… 이렇게 사랑스
러운데….
“벨리타….”
가슴에 묻어야 하는 그 그리운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 보았다. 언제 또 이렇게 불러 볼 수
있으려나. 하늘에서 다시 만나면 가능할까.
“대공님. 폐하께서 정신이 드셨습니다.”
“폐하.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폐하….”
느닷없이 그의 시야에 여러 명이 나타났다. 벨리타와 둘만 있는 꿈에 왜 데인과 부기사단
장, 보좌관까지 나타나는 건지.
보좌관이 약이 든 잔을 가지고 와 입술에 대 주었다. 어서 드시라며 재촉까지 한다. 얼떨결
에 마시고는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사라지지 않고 계속 여기에 있다. 이 사람들이 다. 왜?
이상한 꿈이다.
마지막으로 벨리타와 작별 인사를 하라고 신이 이런 꿈을 꾸게 하신 것 같은데….
저희끼리 위험은 지나갔다며 다행이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벨리타는 어디
갔지? 안 보인다. 저들이 시야에 들어오는 바람에 벨리타가 사라졌다.
“벨리타….”
다치지 않은 손을 움직여 벨리타를 찾았다. 그때 제 손을 가만히 잡아 주는 손이 있었다.
아… 다행이다. 그녀가 보이지 않아도 이 손은 벨리타의 것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잡고만 있어도 영혼이 연결되는 이 느낌.
벨리타가 맞다. 그는 힘주어 벨리타의 손을 꼭 쥐고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애틋
하게 쓰다듬었다.
윽.
오른팔이 무척 아팠다. 피가 흥건히 묻은 붕대를 떼고 보좌관이 약을 새로 발라 주고 있었
다. 그런데 너무 아팠다. 쿠로에게 베인 상처가 예전 가슴을 베였을 때보다 더 아픈 것 같
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비어져 나올 정도였다. 흙투성이 벨리타가 옆에서 그 땀을 살뜰히
닦아 주었다.
벨리타….
아!
잠깐!
꿈인데 이렇게 아플 수 있나? 하지만 벨리타가 앞에 있는데? 그럼 꿈이다…. 아니다. 혹시…
.
칼리크는 갑자기 심장이 터질 듯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예전 안톤이 죽었다고 여겼을 때
벨리타의 꿈을 꾼 것이 떠올라 두렵기까지 했다. 만약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벨리타… 내가 꿈을 꾸는 건가?”
그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듯 불안정하게 흘러나왔다.
다시 그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다들 좀 비켜라. 벨리타가 안 보인다.
“아니요. 꿈 아니에요. 나 살아 있어요.”
벨리타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열심히 설명해 주었지만 믿을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
야 믿을 수 있을까?
“누가 이렇게 다치라 했어요? 내 허락 없이 왜 다쳐요?”
그녀의 울먹이는 소리가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벨리타에게 혼나고 있다. 그녀에게 혼나는 것이 처음도 아니다. 그런데 지금 저 말은 사람
기분을 좋게 한다. 그러니 이건 꿈이다. 벨리타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아직 자신을 용서해
주지 않았으니까.
꿈이라도 아픔은 느낄 수 있나 보다. 터질 듯 뛰던 그의 심장이 실망과 허탈감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늘 날게 해 준다고 해 놓고는 이렇게 다치면 어떡해요?”
“혼자 탄다고 했잖소?”
이제는 모든 사물이 또렷이 보였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나와 주었다.
대답 없이 벨리타가 갑자기 창문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칼리크도 덩달아 그쪽으로 고
개를 돌리니 다시 돌아온 호랑이 신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호랑이 신수님!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건가요?”
벨리타의 목소리가 과히 상냥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라 신수에게 상냥하게 대해 질투까
지 하곤 했는데 지금은 화가 묻어 있었다.
“칼리크가 이렇게 다치고 있는 동안 어디 있었나요?”
신수 자격 없다고 나무라는 말투였다.
그 순간 걸어오던 호랑이 신수는 그 자리에 딱 멈추어 서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칼리크와 벨리타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나와
버렸다.
저 거대하고 세상 무섭게 생긴 호랑이 신수가 새끼 고양이처럼 처량 맞은 눈동자로 벨리
타의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이 여간 우스운 게 아니었다. 이러니 꿈이 맞다. 이런 일은 절
대 일어날 수가 없다.
“벨리타. 지금 내 신수는 쿠로의 신수를 영원히 하늘로 올려보내고 오는 길이오. 다신 나타
나지 않을 거요.”
아. 그런 거였나? 벨리타는 멋쩍어 머리를 슬쩍 긁었다. 그러자 우수수 흙 알갱이들이 바닥
으로 떨어졌다.
호랑이 신수는 벨리타의 모습과 지금 상황이 이해하기 힘들었는지 커다란 두 눈만 껌벅거
릴 뿐이었다. 그러다 주위가 잠잠해지자 다시 칼리크에게 다가가 상처 입은 팔과 상태가
좋지 않은 얼굴을 쓰윽 훑어 내렸다. 신수의 황금빛 눈동자가 번쩍 빛이 났다. 제 주인의
상태를 보고 화가 난 기색이었다. 당장이라도 이렇게 만든 자를 짓밟아 버릴 기세였다.
“참아라. 내가 이미 끝냈다.”
들끓던 황금빛 불꽃이 다시 눈동자 안에서 잠잠해졌다. 그리고는 훌쩍 뛰듯이 그의 등 뒤
로 쑤욱 사라졌다.
칼리크는 두 눈을 꼭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제 안에 들어온 호랑이 신수의 힘과 정기
를 몸에 흡수하기 시작했다. 상태가 안 좋은 제 주인을 위해 신수 역시 제 힘을 모두 내보
내고 있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가 신수의 또 다른 신비로운 능력을 처음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의 오른팔에 흐르던 피가 서서히 멈추더니 깊게 벌어진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살이 맞붙고 벌겋게 부어오른 피부가 가라앉아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열이 올라 달아
올라 있던 얼굴도 제 색으로 돌아왔고 거칠었던 호흡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러니 신수가 발현된 황제는 스스로의 병이 아니고서는 죽지 않는다는 말을 다들 실감하
며 감탄 중이었다.
번쩍.
신수 덕분에 몸이 회복된 칼리크는 갑작스레 두 눈을 번쩍 뜨고 벨리타에게 시선을 고정
시켰다.
꿈이 아니었다. 신수가 몸에 들어왔을 때 확신이 들었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까지 꿈
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세상에….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벌떡 일어났다. 무서운 기세로 일어나 벨리타를 덥석 안아 버렸다. 주변으로 또다시 흙먼
지가 풀풀 날렸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제 얼굴을 마구 비벼 대며 여전히 믿을 수
없어 했다.
벨리타… 살아 있었어. 이렇게 살아 있어.
믿을 수가 없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내 눈앞에 있다.
내 품 안에 있다. 이렇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숨결을 느낄 수 있고 그녀의 향기를 맡
을 수 있다. 비록 지금은 흙 향이 진하지만.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벨리타를 두 팔로 꼭 끌어안고는 놓지 않았다.
잠시 후, 숨이 막힌다며 좀 놓아 달라고 할 때까지 칼리크는 그녀를 제 가슴에 가둬 두고
있었다.
세상이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세상이 제 손에 주어졌다.
아름다운 세상이.
생동감 넘치는 흥미로운 세상이.
희열과 행복이 가득한 세상이.
제 손에 가득 잡혔다. 벨리타라는 행복한 세상이.
***
“내 토끼가 이젠 두더지가 되었네?”
그 언젠가 축제 때 토끼 가면을 썼던 벨리타가 떠올랐다. 지금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였
다. 어떤 모습이라도 그에게는 다 예뻤다. 그녀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
다.
가슴 벅참과 새 삶을 얻은 듯한 감동을 느끼며 칼리크는 하염없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
졌다. 그의 손길에 꾀죄죄한 그녀의 얼굴이 더 얼룩덜룩해져 버렸다.
“마마. 이제 돌아가시지요.”
지금쯤이면 감동의 해후도 했겠다 슬슬 흙먼지를 씻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유모가 조심스
럽게 앞으로 나섰다. 말끔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 못다 한 말들을 나누시는 편이 나을 것 같
았다.
“어딜 가려고? 돌아갈 때가 어디 있다고!”
다소 거친 황제의 목소리에 유모가 움찔, 놀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황후궁도 다 불타 없어졌는데 어디로 돌아간다고 이러는지. 황제는 유모의 말에 거칠게 대
꾸할 수밖에 없었다.
“내 옆에 있어. 어디 가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