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지지 말아요
우르르르.
굉음을 내며 양쪽 옆에서 흙더미가 세 사람을 위협하며 쏟아져 내렸다. 곧바로 그들의 머
리 위에서도 흙이 힘을 잃고 후두두두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파묻히게 생겼다.
안 돼!!!
***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겨우 멈췄다.
온통 흙을 뒤집어쓴 세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양쪽의 길이 다 막혀 있고 자신들이 서
있는 주변만 온전했다. 여기도 언제 무너져 내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살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지만 또 무슨 불상사가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 오도 가도 못하게 생겼
다.
불길도 무서웠지만, 땅속에 갇혀 있는 두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두 사람이 들고 있
던 횃불이 있어 어둡지 않은 것이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공간의 공기가 넉넉하게 남은 것인지 두려워졌다. 횃불을 밝히는 것이 이로운 것
이 아닐지도. 그렇다고 다 끄고 어둠 속에 갇힌다고 해도 살아 나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
다. 어찌해야 하는지 도대체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때.
어?
핀핀이 조금 앞으로 다가가더니 벽 한쪽을 손으로 쓸어내려 뭔가로부터 흙을 털어 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바윗덩이였다. 흙 속에 파묻혀 있는 바윗덩이가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
다.
“마마. 이거… 다른 통로로 통하는 바위예요.”
지하에서 생활할 때 이런 바위들을 많이 보았었다. 용도도 알고 있다. 이런 바위를 통해 땅
굴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그 말을 듣자마자 유모가 들고 있던 횃불을 끄고 그 자루로 바윗덩이를 흙 속에서 파내듯
이 손을 놀렸다. 벨리타 역시 주변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돌덩이 두 개를 주워 올려 유모와
같이 가로세로 세 뼘쯤 되는 바윗덩이 주변을 파내기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숨
이 가빠졌다.
주변을 파내며 바윗덩이를 흔들어 보았다. 꿈쩍도 안 하던 바윗덩이가 조금씩 흔들거렸다.
다시 더 빠른 속도로 파내기 시작했다.
“여기도 막혔으면….”
핀핀이 불안한 듯 두 사람 뒤에서 걱정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도 해야지. 이 길밖에는 없어.”
벨리타는 단호하게 대답해 주며 알고 있는 모든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를 살려 주
세요. 제발….
삐걱삐걱거리며 바위가 움직일 정도로 홈이 파이자 유모와 합심하여 그 바윗덩이를 밖으
로 밀었다. 손으로 밀고 어깨로 밀고 돌아서서 등으로도 밀었다.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
서둘러야 한다.
그렇게 한참을 끙끙거리자 바위가 안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드디어 벽 안쪽으로
굴러떨어졌다.
됐다.
벽 한가운데가 뻥 뚫린 구멍으로 세 사람은 서둘러 빠져나갔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빠져나온 새로운 곳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통로였다. 어디로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이번
에는 무작정 달려 나갔다. 여기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세 사람은 위로 올라가는 통로를
발견할 때까지 죽어라 달렸다.
***
예전 마마님이 갇힌 지하 방처럼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발견한 핀핀은 먼저 올라섰다.
그리고는 땅 위로 나가는 입구를 납작한 돌로 막아 놓은 걸 알게 되었다. 힘을 주어 옆으로
밀고는 먼저 머리만 내밀고 바깥을 살폈다. 그리고는 얼른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마마. 여긴 황후궁 앞 정원 안이에요. 바깥은 아직 전쟁 중이고요.”
그래?
그렇게 뛰어나왔는데 뱅뱅 돌았나 보다. 겨우 황후궁 정원이라니.
어떻게 하나.
위로 지금 올라가는 것이 안전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여기 이러고 있을 수도 없었
다. 땅속이라 가슴을 짓눌러 오는 갑갑함과 공포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일단 몰래 나가 보자.
벨리타는 자신이 직접 바깥을 살펴보기로 하고는 눈만 빼꼼 내밀었다.
저절로 헉,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앞에 보이는 황후궁은 형체도 없이 폭삭 무너져 내리고 없
었기 때문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처참한 몰골이었다. 저기 그대로 있었다면… 생각만
으로도 너무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살아 나왔는데 지금 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얼른 상황 파악을 했다. 여기저기 전투 중이었지만 이곳은 키 큰 꽃들이 만발한 정원 중앙
이라 살짝 나가 엎드려 있으면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도 이곳을 신경 쓸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검을 들고 싸우느라 황궁 안 전체가 아수라장이었다.
살금살금 땅 위로 올라온 세 사람은 모두 납작 엎드렸다. 온통 흙더미를 뒤집어썼지만 이
렇게 지상 위로 살아 올라와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 날 정도로 감사했다. 세 사
람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는 숨죽이며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벨리타! 안 돼!”
하늘을 찢을 정도로 애타게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벨리타는 설마 하는 마음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칼…리크다.
그가 여기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가 계속 울부짖으며 땅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저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오열하는 것이 생생하게 다 보였다. 그렇다고 지금 나가거나 소리쳐
부를 수도 없었다. 사방팔방이 적들이었다.
어떻게 하나….
앗.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해 얼른 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칼리크가 팔에 화살을 맞았다. 그리고 그의 앞에 나타난 쿠로. 정말 지긋지긋한 쿠로. 이
모든 원흉인 쿠로. 벨리타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용서할 수가 없다. 저 인간 때문에 자신도 죽을 뻔했다. 그런데 이제 칼리크까지 화살로
쏴?
이 순간 자신이 검술을 익히지 못한 것이 그렇게 한이 될 수 없었다.
기어코 칼리크와 쿠로가 맞붙은 걸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오른팔을
다쳤으니 칼리크가 불리하다.
야비한 놈. 죽어 마땅한 놈.
벨리타는 자꾸 밀리는 칼리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지지 말아요. 칼리크.
제발.
그에게 힘을 실어 보내며 마음으로 열심히 빌었다. 그가 이기게 해 달라고. 그가 다치지 않
게 해 달라고.
온몸이 비틀릴 정도로 긴박한 순간들을 이기고 칼리크가 쿠로의 목을 베기 직전, 벨리타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쿠로가 죽는 건 일말의 동정심도 일지 않는다. 하지만 목이 잘
리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지는 않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그 끔찍한 광경이 상상되어 속
이 울렁거렸다.
잠시 뒤 눈을 뜬 벨리타는 쿠로를 쓰러뜨린 칼리크가 비틀거리는 걸 보았다.
많이 다쳤는데… 빨리 치료를 해야 할 텐데.
그가 어깨까지 떨며 오열했다. 소리를 치며 몸부림쳤다. 꺽꺽 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렸다.
“벨리타!!! 돌아와. 제발.”
미쳐 버린 사람처럼 그 몸으로 계속 오열하다 드디어 쓰러져 버렸다.
아….
저 정도였던가.
몰랐다. 칼리크가 저렇게 할 줄은.
유모가 눈물을 닦아 주기 전까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럴 때 흘리
는 눈물은 사람을 정화시키나 보다. 모든 원망과 안 좋았던 감정이 그 눈물을 통해 빠져나
가는 느낌이었다.
칼리크….
소리 죽여 흐느끼는 벨리타의 등을 유모가 토닥토닥 달래 주었다.
유모는 마마님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폐하의 저 모습을 보니 저의 원망도 풀려 가고 있었
다.
주변을 보아하니 아군이 이기는 분위기였다.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마마님은 아직 나가시
면 안 된다. 어디서 화살이라도 날아오면 큰일이다.
벨리타는 한번 터진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을 지하에 가둔 일. 그래. 최대한 이해해 줄 수 있다.
이 몸의 주인이 바뀐 건 칼리크는 모른다. 몇 년 동안 악명 높은 황후로서 이름을 떨쳤는데
고작 몇 달 달라졌다고 의심마저 안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갔으니. 지하에 가둔 것까지도 백 보 양보해서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
만 말이다. 모든 걸 충분히 이해해 준다 해도 그 몇 달 동안 함께한 시간을 생각하면 자신
에게 직접 찾아와 물어봤어야 했다.
설명을 요구했어야 했다. 그 정도는 해 줬어야 했다. 그것도 해 주지 않아 그에게 자신이
별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게 그렇게 아프고 상처였다.
그동안 그가 자신으로 인해 곪아 터진 곳을 짜내서 치료해 주려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렇다고 상처 자국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입에 넣은 사탕처럼 자신에게 잘하려고 노력했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전에도
그렇게 자신이 좋다고 했었다. 그래 놓고 지하에 가두었다. 또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렇기에 그를 이젠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려면 확신이 필요했다. 완전히 그를 믿
을 수 있는 확신.
눈물이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몸속에 물이 다 빠져나오려고 이러는지 그치질 않았다. 하
지만 억지로 그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이런 눈물을 흘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그에 대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정도로 자신을 찾으며 오열할 줄은 진정 몰랐다.
죽음의 고비를 넘어서니 또 다른 문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겨우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 보니 칼리크가 기절한 듯 누군가의 등에 업혀 황제궁으로
옮겨지는 것이 보였다. 걱정이 태산처럼 밀려왔다.
유모가 옆에서 이젠 나가도 될 것 같다고 해 후다닥 일어나 무작정 달려갔다.
칼리크.
나 여기 있어요.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흙먼지를 뒤집어썼지만 그런 건 안중에 없었다.
무시무시한 검의 제지가 있었지만, 마음이 급한 벨리타는 비키라 명령하고는 칼리크에게
달려갔다. 지금 얼마만 한 위험에서 벗어났는지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 데인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는 것도 모른다. 그저 칼리크만 보일 뿐이었
다.
***
몸이 불덩이같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아… 벨리타는 얼마나 뜨거웠을까. 살아가야 할
이유를 이젠 모르겠다.
칼리크는 열에 들뜬 얼굴로 눈앞에 어른거리는 형체에 초점을 맞추려 했다.
시원한 느낌이 이마에서 느껴졌다. 누군가가 저를 돌봐주고 있는가 보다. 그냥 둬라. 아무
것도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