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비켜라
모두 멀찍이 물러나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허공을 초점 없이 응시하던 폐하의 시뻘건 눈동
자가 뒤로 뒤집혔다. 그리고는 침대 위로 쓰러지셨다. 신검은 바로 움직여 폐하의 옆자리
를 지켰다. 웅웅 소리를 내며 제 주인을 염려하는 신검이 불안해 보였다.
데인의 존재로 다른 이들을 인정한 신검은 이제 소리를 죽인 채 조용히 공중에 서 있었다.
이들 외에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신검의 칼날이 날카롭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화살이 관통하고 검에 베인 오른팔은 상처가 깊고 위험할 정도였다. 자칫 오른팔을 영영
쓰지 못할 수도 있었다.
최선을 다해 치료를 끝내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데인과 부기사단장, 그리고 보좌관은
암담했고 속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폐하는 저리되시고. 황후마마는 돌아가시고.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지 아무도 그 답을 알지 못했다. 어깨에 붕대를 감은 데인은 절망감
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다 자신의 불찰이다. 제 탓이다. 질끈 감은 두 눈에서 물기가 스
며 나오기 시작했다.
“벨리타… 가지 마…. 벨리타….”
계속해서 폐하는 저 말만 되뇌며 여전히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채, 사경을 헤매고 계셨다.
열이 펄펄 끓어 올랐다. 검었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입술이 하얗게 말라 가기 시작
했다.
데인은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어 다친 몸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도 쓰러지게 생겼다.
상처가 꽤나 깊었다. 하지만 폐하가 먼저였다. 자신이 죽는 건 상관없다. 황후마마가 저리
되시고 폐하마저 위험해지실까 그것만이 걱정이 되어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폐하… 정신을 차리십시오.
마마… 어찌 그렇게 가셨습니까.
애통했다. 이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이제 다 이루셨는데.
으악. 으악.
이제는 입술이 다 터지게 소리를 지르신다. 경기로 온몸을 뒤틀며 침대 위에서 튕기듯이
요동쳤다. 신검이 폐하가 저 상태일 때 유일하게 몸에 손을 댈 수 있게 허락하는 이가 둘밖
에 없는데 안톤은 없고 데인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주저앉은 채 밭은 숨만 내
쉬고 있을 뿐이었다. 데인 역시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때.
쾅.
문이 열리고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빠르게 움직이며 폐하 쪽으로 다가가는 사람을 보고는
모두가 기겁을 했다. 그때 신검이 움직였다.
헉.
안 돼.
누군지 몰라도 바로 신검이 꿰뚫어 버릴….
“으악.”
온통 흙투성이인 사람을 알아본 데인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겁에 질려 했다. 침입자가
누군지 알아보자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허공을 날아오는 신검 때
문에 정신이 다 혼미해졌다.
안 돼. 신검. 멈춰!
데인의 울부짖음도 소용없이 신검은 빠르게 낯선 침입자를 향해 날아갔다.
***
쉬익.
신검이 침입자의 목을 꿰뚫을 듯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선명하게 들려왔다.
뒤늦게 침입자가 누구인지 알아본 보좌관과 부기사단장의 비명 소리가 그 소리를 덮어 버
렸다.
데인은 더한 절망감으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럴 수는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
어졌는데. 바로 참혹한 일로 이어지게 생겼다. 그 순간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어 온몸으
로 발버둥 쳤다. 안 돼. 멈춰!
“비켜라.”
침입자의 엄한 목소리에 데인은 겨우 눈을 떴다.
아!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신검이…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던 신검이.
멈춰 있다.
침입자의 목에 검 끝을 대고는 그대로 멈춰 있었다.
“마마….”
모두가 무릎을 꿇고 똑같이 외치며 흐느꼈다.
죽은 줄만 알았던 황후마마가 저기 저렇게 서 계셨다.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지만 살아 계셨다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신께 감사를 드렸다.
신검이 조용히 비켜나며 다시 황제의 옆자리로 이동하는 걸 본 세 사람은 가슴을 쓸어내
렸다.
신검은 폐하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마음으로 신뢰하는 데인과 안톤만 신검이 허락하는
것도 그 이유였다. 그러니 마마에 대한 폐하의 마음이 신검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 얼
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하지만 언뜻 보아서는 지금 저 모습이 마마일 거라는 걸 알아볼
수 없을 텐데도 신검은 용케 알아냈다. 역시 성스러운 검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을 한꺼번에 겪은 세 사람은 정신이 나가 버릴 정도였다.
벨리타는 흙투성이가 된 차림으로 서둘러 칼리크에게 달려갔다.
상태가 심히 좋지 않았다. 다 죽어 가는 모습이었다.
“벨리타… 벨리타… 벨리타….”
미친 사람처럼 그 이름만 부르며 온몸을 덜덜 떨기만 하는 황제를 덥석 끌어안았다.
“칼리크.”
벨리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검은 자국을 내며 뺨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내가 왔으니 이제 눈을 떠요.”
칼리크….
그에게 들리길 바라며 그녀는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어서 일어나요. 이제 그 맘 다 알아줄게요. 그러니 어서 눈을 떠요. 제발.
그녀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려 그의 얼굴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애절한 마마의 모습을 흙투성이가 된 두 여인, 유모와 핀핀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
다.
***
황후궁 1층이 무너져 내리기 전.
벨리타는 다른 방법은 없는지 이리저리 시선을 주었다.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뾰족한
방법이 없다. 점점 새어 들어오는 연기로 창고 안이 자꾸 뿌옇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콜록. 콜록.
핀핀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셋이 다 같이 어항 속 물에 적신 천으로 코와 입을 막고 웅
크리고 있었다. 유모도 핀핀도 절망과 두려움에 절은 눈으로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안 돼.
이렇게 죽을 순 없다. 분명 살길이….
아!
방황하던 그녀의 두 눈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가만.
저 기둥은.
기둥이 천장을 단단히 받히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다 벌떡 일어섰다.
“유모. 우리가 철판으로 막은 그 통로 기억나요?”
유모는 갑작스러운 마마님의 말씀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마마님이 손으로 가리킨 기둥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세 사람은 서둘러 그 기둥 쪽으로 다가갔다. 주변에 있는 쇠막대로 기둥을 두드려보았다.
퉁. 퉁.
분명 속이 비어 있는 소리다.
그 통로가 맞다. 산티노가 제 방에 올라왔던 그 통로. 여길 통해 들어왔으니 반대로 여길
통해 나갈 수 있다.
세 사람은 단단한 쇠막대를 찾아와 기둥 한쪽을 파내고 부수기 시작했다.
단단했다.
생각보다 단단한 기둥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다. 세 사람은 죽기 살기로 같은 면
을 계속 내리치며 기둥에 구멍을 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꽈직.
드디어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그 안쪽 벽에 매달려 있는 단단한 사다리를 발견했다. 이거
다.
벨리타가 먼저 내려가기 시작했고 핀핀과 유모가 뒤를 이었다. 내려가는 길은 칠흑같이 어
두웠지만, 손과 발의 감각만으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드디어 땅을 밟고 내려오니 이곳이 지상이 아니라 지하임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환했다.
옆으로 길게 이어지는 땅굴 벽 군데군데 걸려 있는 횃불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누군가
지나갔다는 증거다.
“땅굴이에요. 마마.”
벨리타와 유모에게는 생소한 장소였지만 오랫동안 황궁 지하에서 지냈던 핀핀에게는 아
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유모가 기대감에 차서 핀핀을 돌아보았다.
“땅굴은 많이 봤는데 이곳은 처음이에요.”
아쉬운 대답이 돌아왔다. 핀핀에게 땅굴은 익숙했지만 이 장소는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지금은 바로 알 수가 없었다.
핀핀이 앞장서고 두 사람은 주변을 살피며 몇 걸음 나아갔다. 그때.
쿠구구궁.
머리 위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리며 방금 내려왔던 통로가 위쪽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
작했다. 세 사람은 소리를 지르며 더 멀찍이 땅굴 안으로 달음질쳤다.
어마어마한 흙먼지가 날리고 디디고 있는 땅이 진동하며 흔들렸다. 조금 전 내려왔던 통로
는 흙무더기가 쏟아지며 완전히 주저앉아 버렸다. 막혀 버렸다는 소리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그대로 파묻힐 뻔했다. 신이 도우셨다.
이곳도 안심이 되지 않아 세 사람은 서둘러 앞에 펼쳐진 통로를 부리나케 뛰어가기 시작
했다.
머리 위로 희미하게 검이 부딪히고 사납게 떠드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황후궁이 불타고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세 사람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란.
지금 내란이 벌어졌다. 제일 먼저 황후궁을 불태운 것이고.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단 한 사람. 쿠로밖에 없다.
벨리타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셋 다 죽을 목숨이었다. 지금도 아직 완전히 안전하게 살
았다고 할 수도 없었고. 잘못하다가는 기껏 살아남았는데 적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
다. 더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서둘러 땅굴 속을 나아가다 갈림길이 나 있는 곳에 다다랐다. 여기부터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어디건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있어야 한다.
“마마. 이쪽 길은 황궁 밖으로 나가는 길 같아요.”
횃불이 듬성듬성 꽂혀 있는 길 끝을 보던 핀핀이 알려 주었다.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나가
야 한다.
유모와 핀핀은 벽에 꽂혀 있던 횃불을 한 개씩 들고 컴컴하게 뚫려 있는 길로 한발 한발
나아갔다. 그때.
끼기기기.
이상한 소리가 위에서 들림과 동시에 머리 위에 땅이 울리고 지나왔던 길이 엄청난 진동
을 하며 마구 흔들렸다. 그러더니 머리 위에서 흙이 부스스 떨어지기 시작했다.
땅굴이 무너지고 있다. 흙더미가 비 오듯 떨어지더니 쿵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세 사
람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겨우 피해 탈출했더니 이젠 땅속에 파
묻혀 죽게 생겼다.
다시 소리를 지르며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쿵쿵 소리가 뒤에서 연달아 터져 나왔다. 자신
들의 뒤로 땅굴이 무너지고 있는 소리였다.
악.
아악.
뛰어가던 세 사람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땅굴이….
앞의 길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앞과 뒤 모두 땅이 주저앉듯 땅굴 안으로 흙더미가 내려
앉아 통로를 막아 버리고 있었다. 이러다간 파묻혀 죽을지도 모른다.
우르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