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12화 (112/130)

112화 살아 돌아올 수만 있다면

재빨리 말 신수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전속력으로 멀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쿠로에게서. 아니 호랑이 신수를 황제에게서 가급적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죽어라 날아

가고 있었다. 그 뒤를 호랑이 신수가 무서운 속도로 쫓아갔다.

신수들의 싸움은 그들에게 맡겨 두면 된다.

쿠로는 들고 있던 활을 저만치로 던져 버리고 섬뜩한 검을 오른손에 제대로 쥐었다.

덤벼. 이놈아.

내 실력도 만만치 않아.

쿠로는 제대로 한판 붙을 각오로 사납게 덤벼들었다.

***

“정정당당하게 하지?”

정정당당? 칼리크는 저런 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역겨웠다.

“신검을 쓰면 안 되지.”

여전히 히죽거리는 말투가 귀에 심히 거슬렸다.

“나도 이 검으로 싸울 건데 너는 신검을 써? 황제 체통은 지키고 죽어라.”

말 같은 말을 해야 듣기나 하지. 가소롭다.

어차피 신검을 쓸 생각은 없었다. 직접 내 손으로 죽인다. 칼리크는 성한 왼손으로 왼쪽에

차고 있던 황제의 검을 쑥 뽑아 들었다.

쿠로는 입술을 비틀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걸려들었다. 황제는 오른손잡이다. 검을 양

손으로 휘둘러도 자신과 막상막하일 텐데 왼손 하나로? 죽으려고 환장했다. 그렇게 되면

금상첨화다.

빨리 끝내자.

소리를 지르며 쿠로가 먼저 황제에게 달려들었다. 먼저 찌른다.

챙.

황제가 왼손으로 용케도 잘 막아 냈다. 그런 운은 이번 한 번뿐이다. 쿠로는 빙글 돌며 빛

과 같은 속도로 황제를 정신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

챙. 챙. 챙.

황제가 밀렸다. 의기양양해진 쿠로는 황제의 검 끝을 피해 재빨리 몸을 옆으로 비꼈다. 동

시에 화살이 박혀 축 늘어진 황제의 오른팔을 재빨리 그어 버렸다.

사악.

소리까지 화끈하게 제대로 들어갔다. 쿠로는 쾌재를 부르며 비틀거리는 황제의 심장을 향

해 검을 강하게 찔러 넣었다.

챙.

이놈에게 운이 또 따라 주었다. 제 검을 막으며 부딪힌 두 검이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바짝

다가선 두 사람의 눈동자에서는 똑같은 살기가 튀었다. 하지만 황제의 이마에서 비어져 나

오고 있는 땀을 훑어 내리며 쿠로는 비웃음을 날리는 여유까지 보였다. 게다가 오른팔 아

래로 줄줄 흘러내리는 피. 자신이 더 우세하다.

“그거 알아? 벨리타가 널 왜 싫어했는지?”

꽉 다문 잇새로 쿠로가 야비하게 내뱉었다.

칼리크는 쿠로가 떠드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제 몸에만 집

중했다.

“냄새난다고 싫어했어. 땀에 쩐 지독한 냄.새.”

맨날 훈련만 하던 황제와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이내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리던 벨리타

가 자신에게 불평을 얼마나 해 댔는지 알려 주고 싶었다. 죽기 전에 진실은 알아야 공평하

니까.

시뻘게진 황제의 동공이 확장되며 맞서고 있는 검이 살짝 흔들렸다.

동요한다. 제 말이 먹히고 있다.

“돼지처럼 천박하게 먹는다며?”

전쟁에 미쳐 있으니 허겁지겁 먹고 싸워야 했겠지. 다른 나라를 정복하건 말건 벨리타는

그런데 전혀 관심 없었어. 고상 떠는 여자였으니 얼마나 역겨웠겠어.

황제의 검이 더 크게 흔들렸다. 이때다.

맞붙은 검을 힘으로 밀쳐 버리고 한 바퀴 빙 돌며 황제의 목을 쳤다.

챙.

부들부들 떨면서 이번에도 제 검을 막아 냈다. 간신히 막고 있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어찌

되었건 재수 더럽게 좋은 놈이다. 하지만 다음 기회란 없다.

“처음 네 얼굴 본 순간부터 밥맛이 다 떨어졌다지? 남자라면 아무나 사족을 못 쓰던 벨리

타였는데 말이야.”

다시 한번 맞붙어 있는 검을 밀어 냈다. 황제의 몸이 크게 휘청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끝낸다. 남아 있는 온 힘을 검에 실으며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휘익.

바람을 가르는 검의 날 선 소리가 무시무시하게 공기를 진동시켰다. 최대의 힘이 실렸다.

이대로 목을 치면 넌 끝이다. 빠르게 몸을 돌린 그의 눈에 황제의 목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검 끝이 그대로 목을 두 동강 내기 위해 빛과 같은 속도로 뻗어 나갔다.

으윽.

짧은 비명 소리가 터지고 몸뚱이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꿇은 무릎 위로 피가 흥건히 고

이기 시작했다. 옷을 다 적신 피가 바닥으로 줄줄 흘러내려 그 주변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피 웅덩이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

“냄새난다고 싫어했어. 땀에 쩐 지독한 냄.새.”

칼리크는 쿠로가 떠드는 소리에 꿈틀댔다. 듣지 않으려 해도 귀로 제 맘대로 들어왔다. 목

소리까지 거슬리고 역겨웠다.

왼손으로 검을 잡았어도 이놈에게 절대 지지 않는다. 이놈이 벨리타를 죽였다. 이 찢어 죽

일 놈이. 그러니 그렇게 한다. 내 직접 널 찢어 죽일 것이다.

지금 오른팔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 감각이 없다. 하지만 오른팔이 절단된다고 해

도 남은 왼팔로 반드시 널 죽일 것이다. 왜 아무 힘도 없는 벨리타를 건드려! 나한테만 했

어야지!

“돼지처럼 천박하게 먹는다며?”

칼을 맞대며 재빨리 숨을 골랐다. 검을 막기는 했으나 쿠로 이놈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이기는 사람은 나다. 쿠로에 대한 분노에 휩싸인 칼리크는 초인적으로 힘을 끌어모

았다. 벨리타를 건드린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 절대 용서 못 한다. 벨리타를 죽

인 원수!

“처음 네 얼굴 본 순간부터 밥맛이 다 떨어졌다지?”

뭐라 떠들어도 상관없다. 하나에만 집중한다.

널 꼭 죽인다.

쿠로가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목을 치려 공격하는 걸 한 번 막아 냈을 때, 이놈이 구사하는

검술을 파악했다. 또다시 기회를 잡은 쿠로가 몸을 빙 돌렸을 때.

칼리크는 재빨리 몸을 숙이며 검의 위치를 낮춰 쿠로의 허벅지를 깊게 베어 버렸다.

으윽.

***

칼리크의 목까지 가지도 못하고 쿠로의 손에서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 다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그 정도의 힘으로 살이 갈라졌다.

으윽.

사지가 절단되는 아픔에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두 다리가 제 몸에서 떨어져 나

간 것 같은 아픔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너덜너덜해진 허벅지 위로 피가 솟구치며 옷을 적셨다. 바닥으로 주저앉은 쿠로의 다리 아

래로 피가 흥건히 흘러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쿠로는 얼굴이 하얗게 변색되어 가더니 퀭

해진 두 눈동자로 칼리크를 올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어 하던 표정이 역력했던 것도 잠시 쿠로의 동공이 확 풀어졌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자주 들려오던 ‘빨리 와라’라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번에는 형체까

지 보였다. 허공에 떠 있는 시커먼 그림자에게서 나오는 소리였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었다. 손짓까지 하며 부르고 있었다. 저희한테 오라고. 빨리 오라고.

새파랗게 떨고 있는 입술이 겨우겨우 열렸다.

***

쿠로는 이미 끝났다. 그가 덜덜 떠는 입술로 한 마디를 뱉었다.

“살…려 줘….”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다. 넌 살 가치도 없는 오물이다.

한 번에 끝내 주겠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칼리크의 검이 매섭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쿵.

쿵.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 그대로 쿠로의 머리가 바닥에 먼저 떨어지고 몸뚱이가 이

어 뒤로 넘어갔다.

피 묻은 검을 들고 선 칼리크는 두 동강 나 죽은 쿠로에게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제 눈에는 연기만 올라가고 있는, 폐허가 된 황후궁만이 보였다.

쿠로를 속 시원히 처단했는데.

그 어떤 희열, 기쁨이 단 한 조각도 없었다. 다시 바닥에 쓰러질 듯 주저앉은 칼리크는 황

궁이 떠나갈 듯 울부짖었다.

“벨리타!!!”

***

어떤 욕을 해도 상관없소.

다신 보지 않겠다 해도 괜찮소.

용서하지 않아도 되오.

정 내 곁을 떠나간다 해도 괜찮소.

살아 돌아올 수만 있다면… 더한 것도 해도 되오…. 벨리타….

그녀의 이름만 절박하게 부르고 또 불렀다.

“으아악!!!”

저놈을 죽였어도 벨리타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 벨리타.

그냥 펠론국으로 보내 줬어야 했다. 그랬다면… 살아는 있었을 텐데.

제 욕심에 붙들고 있어서 이렇게 죽었다. 벨리타는 자신 때문에 죽었다. 그 아름답고 사랑

스러운 벨리타가….

칼리크는 소리 내어 울부짖으며 다 부질없음을 느꼈다. 그의 오른팔에서는 여전히 피가 줄

줄 흘러내렸다.

대륙을 통일했으면 무엇 하나. 벨리타가 없는데.

이 제국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녀가 없는데.

무슨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다고.

아… 신이시여.

내가 가진 거 다 가져가고 벨리타 하나만 돌려주십시오.

제발….

제발…….

“벨리타!!! 돌아와. 제발.”

실성하듯 부르짖으며 칼리크는 꺽꺽 소리를 내며 오열했다. 목이 터져라 울부짖던 그의 몸

이 휘청,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때, 황궁 안을 거의 제압한 데인과 부기사단장이 다른 기사들을 이끌고 황제에게로 달려

왔다.

“벨리타… 돌아와…. 왜 혼자서 하늘로 가….”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애원하듯 중얼거리는 황제의 상태가 위태로웠다. 부기사단장은 바

로 황제를 업었고 주위에서 부축했다.

“하늘… 날아 보기로 해 놓고…. 얼른 돌아와…. 어딜 간 거야….”

다들 심히 걱정이 되었다. 넋 나간 듯 계속 중얼거리는 폐하의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이런

목소리는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직 못 한 말이 있는데… 그거 들어줘야지…. 내 말 들어줘야지….”

정신이 희미해지고 있는 황제의 얼굴빛이 점점 검게 죽어 가고 있었다.

“날 대신 데려가…. 벨리타 살려 놔…. 돌려줘….”

큰일 났다. 황제 폐하가 위험하다.

주변에서는 종식된 내란의 흔적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황제를 업은 그들은 서둘러 황제궁

으로 죽어라 뛰었다.

***

황제는 한동안 없었던 지병까지 돌아와 헛소리를 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주치

의가 치료를 끝내고, 약을 먹이고 아무리 뭘 해도 황제는 눈을 뜨지 못한 채 경기까지 일으

켰다.

게다가 침대에 처음 눕혔을 때, 갑자기 폐하가 손을 돌려 신검을 뽑아 들더니 모두를 위협

하며 소리 질렀다.

저리 가. 꺼져. 다가오지 마.

정말 미친 사람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