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11화 (111/130)

111화 날 두고 죽지 마

“반드시 찾아오라. 찾을 때까지 나오지 마라.”

호랑이 신수에게 명령했다. 간곡한 명령이었다. 꼭. 반드시!

호랑이 신수가 불타는 황후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칼리크는 근처 가까운 연못으로부터

줄을 지어 물통을 이어 나르며 조금이라도 불을 꺼 보려고 애쓰고 있는 이들에게로 달려

갔다. 황후궁에서 일하던 시녀들도 저기 있다.

황제가 달려오는 것도 모르고 그들은 물통을 이어 나르는 것에만 집중했다.

벨리타… 벨리타….

황제는 시종과 하인들 사이로 애타게 벨리타의 얼굴을 찾았다. 시녀들도 빠져나왔으니 여

기 있을지도 모른다.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벨리타….

없다.

항상 벨리타의 곁을 지키던 어린 시녀와 유모도 없다.

“또 탈출한 사람은 어디 있느냐?”

다급하게 묻는 소리에 그제야 돌아본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대답을 해!”

호통치는 황제의 목소리에 시녀 하나가 서둘러 답을 고했다.

“저희가 전부입니다. 마, 마마님은 아직 탈출을 못 하시고….”

끝까지 말하지 못하고 시녀는 흐느꼈다.

칼리크는 그 말에 무릎이 꺾일 것 같은 걸 참으며 황후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 안에 벨

리타가 있다. 끔찍할 정도로 거대한 불꽃이 황후궁 꼭대기까지 다 삼키고 있었다.

벨리타….

아니야. 절대 아니다. 잘 숨어 있을 거다.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신수가 구하러 갔으니 얼른 타고 나와. 제발. 어서.

쿠쿠쿠쿵.

2층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들리더니 3층, 4층 연이어 황후궁이 아래로 주저앉았다.

안 돼!!

안 돼!!!

칼리크는 거세게 머리를 저으며 외쳤다. 빌었다. 소리를 질렀다.

어서 나와. 신수. 어서 빨리 태우고 나오란 말이다.

절대 안 돼. 벨리타!!!

넘실거리는 불꽃에 다들 너무 뜨거워 황후궁 쪽으로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칼리크는 무모하게 계속 나아갔다.

저러다 큰일 날 것 같아 주변에 있던 시종들이 달려가 황제를 말렸다. 칼리크의 몸이 휘청

하고 비틀거렸다. 놓으라 소리쳤다. 울며불며 황제를 놓지 않는 시종들 때문에 칼리크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빛이 황망함에 점점 죽어 가고 있었다.

어서 와. 이리로 와. 벨리타. 제발….

쿠구구궁.

황후궁이 꼭대기부터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망연자실해진 사람들은 나르던 물통을 떨어

뜨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마, 마마 외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니야.

벨리타는 살아 돌아올 거다. 절대 날 두고 죽지 않는다고!

다 무너져 폐허가 된 채 불타고 있는 황후궁 안에서 아직도 호랑이 신수가 나오지 않고 있

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버릴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제발!!!

이젠 거의 형체가 남아 있지 않게 폭삭 무너져 내린 황후궁 앞에서 칼리크는 아득해지려

는 정신을 겨우겨우 붙잡고 있었다. 신수 너 하나만 믿는다. 신수. 제발….

아!

신수가 나타났다. 다 무너져 내린 꼭대기에서 으르렁거리더니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크아아앙.

혼자였다.

찾지 못했다. 신수 혼자 나타났다. 그래도 황후궁에서 벗어나지 않고 여전히 황후를 찾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저 상태의 황후궁에서 사람이 살아 있다는 건 불가능했다. 신수도 찾아내지

못했다면.

“벨리타! 안 돼!”

그는 오열하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절규했다.

“으아악!!”

바닥에 주저앉아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안 돼. 벨리타.

죽지 마.

날 두고 죽지 마.

칼리크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니야. 저기 없을 거다.

어디 몸을 숨기고 있을 거다. 틀림없이 그래야 한다.

눈으로 다 무너져 내린 황후궁을 보면서도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빌었다. 빌고 또 빌었다.

죽지 마. 안 돼. 절대 안 돼. 벨리타….

그는 주저앉아 두 손으로 땅을 내려쳤다.

죽으면 안 돼. 안 돼, 벨리타….

마구 땅을 내리치며 흐느꼈다.

신이시여. 벨리타를 돌려주십시오.

아버지. 어머니. 도와주세요.

으아아아악!!!

칼리크는 미쳐 버린 듯 울부짖었다. 호랑이 신수도 잿더미 위에서 같이 포효했다.

***

쿠로는 벽 뒤에 숨은 채 달달달 떨었다.

지금 뭘 본 거지?

살면서 이렇게 끔찍한 광경은 처음 본다. 아니다. 헛것을 본 것일 수도 있다.

정신을 차리고 눈만 빼꼼 내밀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헉!

진짜다.

집채만 한 호랑이가 불타는 황후궁으로 달려가는 것이 쿠로의 두 눈에 생생하게 박혔다.

숨이 턱 막혔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이게 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럼. 신수가 나타나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이 사실이었어?

게다가 신수를 타고 자유자재로 움직이기까지?

자신보다 한 수 위였다. 아니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되면 전부 뒤

엎어진다. 자신이 황제가 되는 건 어림없다는 소리다.

내…가 황제가 될 수 없어?

쿠로의 두 눈이 부르르 떨리더니 핏발이 번져 갔다. 이럴 순 없다.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

고. 그럼 왜 자신한테 신수가 발현되게 했냔 말이다. 더러웠다. 신의 손에 놀아나고 배신당

한 느낌이었다.

빌어먹을.

젠장.

하늘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이렇게 한단 말이지? 그런 거야?

하!

뜻대로 될까 보냐.

정신이 나가 버린 쿠로는 신에게까지 원망을 하며 분통을 터트렸다.

난 황제가 되어야 한다. 꼭 되어야 한다.

저놈만 죽이면 된다. 없애면 된다. 로카 왕국이 이곳을 점령하기만 하면 신수와 상관없이

내가 황제가 된다. 그러니 저놈을 죽이고 로카 왕국이 승리하도록 이끌면 된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바로 코앞에서 놓칠 순 없다. 손에 쥔다. 갖는다.

황제 자리는 내 거야!!!

쿠로는 벌게진 눈으로 살기등등하게 다시 일어섰다.

저 멀리 싸우다 죽은 병사들 사이로 떨어진 검과 활이 보였다. 저벅저벅 걸어갔다. 주변에

서는 여전히 전투가 한창이었지만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겁을 상실한 쿠로는 떨어진 검과

활을 집어 올렸다. 가까이 있던 병사가 누구 편이건 간에 걸리적거려 단칼에 베어 버리고

는 다시 숨어 있었던 벽으로 달려갔다.

다시 동태를 살피는 쿠로의 두 눈에 칼리크가 땅에 엎드려 오열하는 게 보였다. 소리소리

지르는 게 들렸다. 병신이 따로 없다. 그러니 넌 황제가 될 자격이 없다.

어서 내놔!!!

쿠로는 오열하느라 정신이 나가 있는 황제의 가슴을 활로 겨누었다. 신수가 곁에 없는 지

금이 기회다.

팽팽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는 정확히 조준한 뒤 줄을 놓았다.

핑.

분노를 담은 화살이 무서운 속도로 정확히 칼리크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

퍽!

칼리크는 갑자기 제 팔에 꽂힌 것이 무엇인지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화살이다. 화살이 오

른 팔뚝을 관통해 화살촉이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아픔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칼집에서 신검이 웅웅 소리를 내며 진동하고 있다는 것도 이제 알아차렸다.

극심한 절망에 울부짖느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위험을 알리는 신검의 소리조차도.

칼집에서 꺼내지 않는 이상, 신검은 혼자 움직이지 못한다.

누가?

이미 끓어넘치는 분노에 잠식된 칼리크는 시뻘건 눈동자로 고개를 들었다. 화살에 맞은 오

른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움직여지지 않았다. 활화산 같은

분노로 몸을 일으킨 칼리크는 팔이 마비되어 가는 것도 안중에 없었다. 주변에 주저앉아

있던 이들이 황제가 공격받은 걸 보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치는 것도 전혀 눈에 들어오

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쿠로!

저 멀리 우뚝 서 있는 쿠로 하나만 보였다.

이 찢어 죽일 놈!

칼리크는 당장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제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너무 이를 악물어 그의 얼

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두 눈에서는 이미 쿠로를 죽이고도 남을 살기가 무서울 정도로

뿜어져 나왔다.

그는 쿠로를 향해 사신과도 같은 모습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

쿠로 역시 땅을 치며 분통을 터트렸다. 가슴에 맞을 줄 알았던 화살이… 왜 하필 그 순간

저놈이 땅을 친다고 오른손을 올려서 엉뚱한 곳에 박혔다. 운도 좋은 빌어먹을 놈. 독이라

도 있었으면 즉사시킬 수 있었을 텐데. 저놈이 이렇게 빨리 황궁으로 날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준비하지 못했다.

칼리크의 오른팔이 툭, 떨어지는 것을 보며 애써 위안으로 삼았다. 이제 그 손은 못 쓴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칼리크에게 지지 않으려 쿠로 또한 원망과 분통을 담아 쏘아보았다.

안 밀린다. 이놈아.

그런데.

저 뒤에 있던 호랑이 신수가 제 주인 곁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저 호랑이 새끼 눈깔이나

저놈 눈이나 똑같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이 아예 자신을 씹어 먹을 기세였다.

이러면 불리하다.

한 방에 죽일 수 있다 여겼는데.

황제 놈이 살아남았고 호랑이 신수까지 옆에 붙고 있었다.

도망을 쳐야 하나.

쿠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제 안에서 말 신수가 요동치며 황급히 쑤욱 빠져나왔다.

그래. 너도 신수다. 신수끼리 싸우면 되겠구나.

아무리 봐도 힘이 달려 금방 끝나겠지만 어떻게 하든 저 호랑이 새끼를 황제 놈에게서 떨

어뜨려 놓기만 하면 승산이 있다. 다시 힘이 나기 시작했다.

역시 내 신수다.

하지만 말 신수는 제 주인 쿠로를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기분 더럽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왜?

그 순간 직감했다. 말 신수가 지금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죽을 각오로 제 주인을 위해 호랑이 신수와 싸울 것을 맹세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쿠로는 슬픔이나 감동, 이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말 신수가 죽건 말건 이 싸움에서

자신이 이기기만 바랐다. 이기게 도와주고 장렬하게 죽으면 더 좋고.

말 신수가 그에게서 떨어져 호랑이 신수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크아앙.

한입에 뜯어 버릴 것 같은 위세로 호랑이 신수가 말 신수 쪽으로 움직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