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이렇게 죽는 건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하늘을 찔렀다. 황도 성문이 뚫렸다. 그곳을 지키는 군사들이 쓰러
져 나가고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아군들이 몰려올 텐데. 분했다. 너무 분했다. 이
들의 숫자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쿠로 하나 정도는 막을 수 있다 자신했다.
자신의 죄가 크다.
제국을 위험에 빠뜨렸다.
으윽.
뒤에서 치고 들어온 검에 또다시 어깨를 베였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이 바닥으로 툭, 떨
어졌다. 그리고는 무너지듯 무릎이 꺾였다. 데인의 눈동자에 절망감만 가득 번져 갔다. 왼
손에 쥐고 있는 검을 바닥에 꽂은 채 몸을 지탱하며 적들을 노려보았다.
드디어 죽일 수 있다는 표정이 적의 얼굴에 그득했다. 아주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한 놈
이 검을 높이 쳐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쉬익.
으악. 다가온 적이 비명과 함께 피를 뿜으며 뒤로 쓰러졌다. 지탱하고 있던 왼손의 검으로
배를 그었다.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간다.
그러자 나머지 놈들이 한꺼번에 다가오며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축 늘어진 손가락 끝으로 피가 뚝뚝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칼에 베였는데도 고통은 느껴지
지 않았다. 그저 정신이 점점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검을 들 힘조차, 아니 몸을
세우고 있을 힘조차 없었다. 몸을 지탱하고 있던 왼손이 힘을 잃고 경련하듯 떨기 시작했
다.
폐하….
먼저… 갑니다.
끝까지 지켜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 불충을….
쉬익. 쉬익. 쉬익.
검이 여러 번 휘둘려지는 소리가 매섭게 들려왔다. 그리고는 데인의 얼굴에 피가 솟구치듯
튀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이 서서히 기울어져 갔다.
쿵.
그의 몸이 바닥에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
부기사단장은 소리를 지르며 데인 대공에게 뛰어갔다.
안 돼!
너무 늦어 버렸다. 이미 대공 주변을 둘러싼 적들의 검이 높이 올라갔다 빠른 속도로 내려
가는 중이었다.
쉬익. 쉬익. 쉬익.
으악.
부기사단장의 핏발 선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때.
부기사단장의 뒤에서도 두 명의 적이 검을 휘둘렀다.
쉬익. 쉬익.
검이 휘둘러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부기사단장은 무릎을 접으며 주저앉았다. 뒤이어 황궁
안에서도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승리를 부르는 함성이었다.
이제….
끝났다.
***
쿠로는 데인의 마지막을 희열로 가득 찬 눈으로 지켜보았다. 멀리서도 아주 선명하게 잘
보였다. 피를 흘리며 무릎으로 서서는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데인의 모습이 속이 다
시원할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어서 목을 쳐. 어서.
목이 댕강하고 잘려 바닥에 나뒹구는 꼴을 꼭 보고 싶었다. 직접 저놈이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얼마나 끔찍할까. 목뿐만 아니라 사지가 다 잘려 나가는 모습이길 바랐
다. 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 거다. 그렇게 저 데인을 시작으로 황제까지 같은 꼴로 만들고
말 테다.
앗. 이런.
애석했다. 빨리 목을 칠 일이지. 데인에게 다가간 사병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아쉽긴 해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데인 주변에 있던 나머지 사병들이 점점 다가가고 있었
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짜릿했다.
평생 저놈에게 눌리고만 살았는데, 그것이 이가 갈리게 분통 터졌는데 이제야 원을 속 시
원히 풀게 되었다.
사병들의 검이 동시에 위로 치켜올려졌다. 그래. 한꺼번에 베어 버려.
제대로 확실히 보고 기억하기 위해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데인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쉬익. 쉬익. 쉬익.
쿠로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이 확장되었다.
그는 얼른 벽에 등을 기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끔찍했다. 온 살이 다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살면서
저렇게 끔찍하고 무서운 장면은 처음이었다. 벌렁거리던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거세게 펄
떡거렸다.
***
칼리크는 아침부터 기분이 저조했다. 뻔하다. 벨리타가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다. 이런 현
상은 비일비재해서 또 그러나 보다 했다. 그런데 아침 식사를 하는데 제대로 넘어가질 않
았다. 입맛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냥 안 넘어갔다.
“너무 쉬지도 못하시고 일만 하셔서 그런 겁니다. 좀 쉬십시오. 폐하.”
맞는 말이다. 쉬지 않고 일 처리만 했던 건. 오로지 빨리 돌아갈 생각밖에 없어서 더 그랬
다.
안톤과 로간 공작이 합심해서 일을 다시 시작하려는 황제를 말렸다. 그래서 좀 쉬기로 마
음먹었다. 아주 잠깐이면 될 것이다.
별로 먹지 못한 황제를 위해 시종이 부드러운 수프 같은 것을 가져와 다시 권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단 한 스푼도 먹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심장까지 쿵쿵 뛰더니 이마에 식은땀
이 맺혔다. 먹은 것도 없는데, 체기까지 느껴졌다.
의원이 왔다 가고 휴식을 취하던 황제는 계속해서 느껴지는 이상 증세에 불안해지기 시작
했다. 단 한 번도 이런 증세를 겪어 본 적이 없다. 생소한 고통이었다. 불안하게 뛰는 가슴
이 진정되지 않았다.
혹시.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칼리크는 호랑이 신수에 올라탔다. 황궁에 다녀오겠다는 말만
던지고 서둘러 날아올랐다.
제 주인과 공명하는 호랑이 신수도 같은 마음인지 지금까지보다 더 빠르게 전속력으로 날
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제 나라 본토로 들어왔을 때는 벌써 어둠이 짙
게 깔리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더 짙게 그를 지배했다.
그런데.
황도로 가는 길목에 수많은 병사들이 맞붙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미친 것들이.
내란이다. 내란이 벌어졌다. 황제를 지지하는 귀족 사병들과 쿠로의 사병들이 전쟁을 치르
고 있었다.
이래서 계속 불안했던 것이다.
황궁.
벨리타!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단 하나뿐이었다.
크아아앙!!!
호랑이 신수가 전장 위를 빠르게 지나치며 우렁차게 울부짖었다. 싸우고 있는 수많은 병사
들 위로 그 소리가 쏟아져 내리자 모두가 깜짝 놀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호…랑이 신수. 그리고 황제.
함성을 지르며 힘이 솟구치는, 황제를 지지하는 군사들과 망연자실해지는 반대쪽 사병들.
지금까지 뭐 하러 이렇게 싸운 건가? 쿠로 대공이 황제가 된다 믿고 싸운 것이 아니었던
가. 이렇게 되면!
전투 의지를 잃고 도망치는 사병들이 속출하고 대열은 무너졌다. 황도 성곽에서 집결하기
로 한 쿠로파 사병들이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길목에서 황제의 군사들에 의해 차단
되고 흩어졌다.
칼리크는 온몸이 수축되는 것 같았다. 황도가 보이고 성곽 밖에서 적들이 통나무로 성문을
찧어 대는 꼴이 보인다. 여기도 고전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황궁이 더 문제다. 멀리서도 시
꺼먼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벨리타!
멈출 수 없었던 칼리크는 허리춤에서 재빨리 신검을 뽑아 아래로 거침없이 날렸다. 그리고
는 계속 무서운 속도로 황도 성곽을 지나치며 날아갔다.
하늘에서 떨어지듯 내려온 신검이 불꽃을 뿜으며 적들을 베어 나갔다.
사악. 사악. 사아악.
먼저 통나무를 양쪽으로 들고 선 사병들부터 한칼에 주욱 베어 버렸다. 비명 소리와 함께
통나무는 바닥에 쿵, 떨어졌고 모두가 하늘을 날아가는 신수와 황제를 보았다. 똑같은 반
응이 여기서도 벌어졌다. 기사단과 군사들의 함성이 떠나갈 듯 터져 나왔다. 이곳도 판도
가 바뀌었다.
제 할 일을 마친 신검이 다시 황제의 곁으로 날아왔다.
신수. 더 빨리! 더! 더!
문이 활짝 열려 있는 황궁은 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칼리크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
다. 불타는 황후궁만이 눈에 보였다.
벨리타!!!
신검이 황제와 공명하며 다시 지상으로 빠르게 내리꽂히듯 뻗어 나갔다.
쉬익. 쉬익. 쉬익.
데인을 베기 직전인 사병들 다섯 명의 높이 치켜든 팔이 그대로 싹둑 잘려 나갔다. 그리고
는 크게 원을 그리며 그들의 몸통을 한 번에 베어 버렸다. 그들에게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
져 나옴과 동시에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뒤이어 부기사단장 뒤를 노리던 사병 둘도 똑같은 신세가 되었다.
나머지 위험에 처한 다른 기사들을 더 구해 낸 뒤 신검은 다시 황제 곁으로 돌아갔다.
부기사단장은 보고 있으면서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데인 대공이 죽을 거라고 절망하고
있을 때, 갑자기 대공을 둘러싼 사병들의 팔이 잘려 나가고 몸통이 절단되었다. 믿을 수 없
어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는 신검을 보았다. 제 쪽으로 바람과 같이 빠르게 날아
오는 신검을 보고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제 뒤의 적들도 베어 버린 신검을 돌아보다 감격으로 무릎을 접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
다.
이럴 수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커다란 호랑이와 황제 폐하를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아시
고.
폐하 곁으로 날아간 신검이 스스로 칼집 안으로 쓰윽 들어갔다. 뒤이어 신수와 황제를 보
게 된 기사단과 군사들이 함성을 질러 댔다.
이제… 끝났다. 우리가 이겼다. 폐하가 오셨다. 그것도 신수를 타고.
사기가 충전된 기사들은 나머지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검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데인은 눈을 떴다. 자신은 영락없이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살아 있
었다.
멀리 지상으로 내려앉는 호랑이 신수와 폐하의 모습이 보였다. 신검이, 폐하가 저를 구해
주셨다.
폐하….
있는 힘껏 몸을 일으켰다. 오른팔은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왼팔로 몸을 지탱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께 가야 한다. 황후궁이 저리 불타고 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황후마마. 꼭 살아 계셔야 합니다. 반드시 탈출하셨어야 합니다.
데인은 걷기가 녹록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며 황후궁을 향해 걸어갔다.
부기사단장은 얼른 데인을 부축하며 덤비는 적들을 같이 막아 냈다.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
지 못해 속이 타들어 갔다. 두 사람의 검은 더 사납게 공기를 가르며 적들을 쓰러뜨렸다.
칼리크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제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어지지 않았다. 황후궁이 기울
어진 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뜨거운 불길 때문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벨리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