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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09화 (109/130)

109화 여기서 죽기 싫어

“지금 황궁 안은 누가 황후 편인지 모른다. 믿는 사람이 배신자인 경우가 많다. 아무도 믿

지 마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나만 믿고 따르거라. 우리가 황후를 구해 내야 한다.”

황후를 구해야 하니 어쩌니 말은 하고 있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며 표정 관리를 하다 대공의 말에 넘어간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제 모습을 완전히 믿어 버린 대공이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넘어왔다. 이래서 아둔한 사람이 좋다.

남자들이란. 아무리 잘났으면 뭐 해. 높은 대공 자리에 있으면 뭐 해. 표정 하나에 다 넘어

가는데.

리자는 제 속마음을 교묘히 숨기고는 완전히 넘어간 듯 신중하게 말을 건넸다.

“제가 어떻게 하면….”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며 숫기 없는 순진한 표정은 계속 유지했다.

“…나를 도와주면 훗날, 섭섭지 않게 후사하마.”

그런 말은 애매모호하다. 뭘 해 줄 것인지, 뭘 해 줄 수 있는지 정확하게 해야지 저런 식은

나중에 발뺌하기 딱 좋다. 그래서 일부러 조금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몸이 닳은 사람은 대공이다. 이내 다른 조건을 제시했다.

“네 소원 하나 들어주겠다.”

이거다.

진작 이랬어야지.

끓어오르는 환희를 있는 힘껏 누르며 조금만 반응을 보였다. 크게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꾸몄다. 일생일대의 기회이니 여기서 혼을 다 쏟아부어야 한다.

나중을 위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공의 호기심을 끌어냈다.

“어리게 보이는데도 사람을 끄는 구석이 있구나.”

바로 대공의 칭찬이 이어졌고 너무나 쉽게 뜻대로 되는 것이 신기하고 흥분되어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들키면 큰일이라 얼른 고개를 숙이며 잘 감추었다.

끝까지 순진무구한 척을 하며 헤어지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참느라

혼났다. 하지만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다시 며칠 후, 황후궁 헛간에서 만났을 때도 대공에게 믿음이 가는 행동만 했다.

“누가 본 사람은 없겠지?”

“없어요. 다만 바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유모의 눈은 피할 수 없거든요.”

요즘 들어 부쩍 유모가 저를 감시하는데 싫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눈을 피해 잘 도망

치며 유유자적 다른 곳에서 쉬곤 했다.

드디어 대공이 작전 지시를 내렸다. 딱 들어도 황후를 구해 내려는 것이 아니라 납치해서

이용하려는 짓이다. 그리고는 황후궁에 불을 지르라고 한다. 이건 좀 위험한데. 아주 큰 보

상이 따라야 할 일이다.

진지하게 믿는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나중에 소원을 말하기 위해 순진한

척, 남자의 시선을 끄는 행동을 은근히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뜻대로 대공의 시선이 자신

의 목과 얼굴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일부러 날 듯 말 듯 하게 은은하면서도 환상적인

꽃 향을 가슴 사이에 바르고 나왔다. 대성공이다.

일부러 바로 말하지 않고 돌아가는 척하다가 생각났다는 듯 몸을 돌려 다시 다가갔다. 이

러는 편이 훨씬 순진하게 보인다.

“정말 소원 들어주시는 거죠?”

이젠 확고히 쐐기를 박아야 한다. 내가 받을 보상에 대해.

“소원 하나가 있어요.”

“그래. 말해 보아라.”

대공이 아주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남자 식은 죽 먹기다.

“저… 황비가 되고 싶어요.”

제 앞에서 대공은 놀람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 나의 황비가 되고 싶으냐?”

수줍게 속눈썹을 파닥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 제 모습에 대공의 몸이 들썩거릴 것이

다. 이렇게 꼬신 남자만 수십 명이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대공님이 잘 가르쳐 주시면….”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순간 헛간의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살짝 숨소리도 과하

지 않게 헐떡거렸다.

대공이 흔쾌히 약속을 해 주었다. 입에서 군침이 질질 흘러내릴 것 같은 표정이 너무나 만

족스러웠다. 이 순간만큼은 황후보다 더 예쁘고 잘난 여자인 것 같았다. 이 높은 대공까지

홀려 버렸으니.

헛간을 나와 조심스럽게 걸어가면서도 뒤에서 몰래 쳐다보고 있을 대공을 위해 끝까지 예

쁜 척을 하며 걸어갔다. 물론 신뢰 가는 태도는 당연하다.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는 대공이

입맛을 다시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제 방에 도착한 리자는 문을 꼭 걸어 잠그고는 그 자리에서 팡팡 뛰며 기쁨을 표현했다. 성

공이다. 인생 역전의 문이 지금 열렸다. 그 문을 통과하여 꼭 부귀영화를 누리리라.

호호호.

큰일을 다 끝내고 땅굴을 걸어가면서 리자는 찢어지는 입을 감추지 않았다. 여기서 누가

본다고.

얼른 나가서 목욕하고 예쁜 옷으로 갈아….

퍽.

정신없이 제 생각에 빠져 앞으로 걷기만 하던 리자의 얼굴과 몸이 무언가에 심하게 부딪

혔다.

이…게 뭐야?

리자는 믿을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이 흙덩이를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구 도리질을

해 댔다. 아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손으로 마구 만져 보아도 틀림없었다.

막혔다.

길이 여기에서 막혀 있었다. 갑자기 공포가 밀려왔다. 하늘 위를 날다 바로 바닥으로 떨어

진 것처럼 두려움이 엄습했다.

서둘러 걸어왔던 길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윽.

하지만 반도 못 가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이미 통로에 가득한 연기가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

고 있었다. 리자는 1층이 거의 다 타 버리고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이곳으로 나간다 해도

그 방은 불바다일 것이다. 당했다.

나 어떡해!!!

다시 반대편으로 달렸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손발이 떨리고 숨

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죽을 순 없다. 죽기 싫다.

다시 막다른 흙더미 앞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횃불 막대로 흙을 파기 시작했다. 깜깜

한 어둠 속에서 두려움의 눈물이 철철 흘러넘쳤다.

이 개새끼.

죽여 버리겠어.

살아 나가면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아주아주 처참하게.

하지만 안다. 살아 나갈 수 없다는 걸. 그래도 쉬지 않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뚝, 나무 막

대가 부러졌다. 다 팽개치고 손으로 미친 듯이 파기 시작했다. 손톱이 부러지고 손톱 밑 살

이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엉엉 소리 내어 울던 그녀는 콜록거렸다. 매캐한

연기가 더 강해졌다. 어느새 희뿌연 연기가 제 뒤까지 밀려왔다.

죽기 싫어!

살려 줘!

뭐든지 다 할게요. 제발 날 살려 줘!!

여기서 죽기 싫어!!!

그녀의 눈에서도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악.

아악

아아아악!!!

***

쿠로는 불타는 황후궁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쿠쿵.

굉음과 함께 황후궁 1층 한쪽이 주저앉더니 궁 전체가 끼기끽 소리를 내며 기울었다. 멀리

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연기가 하늘 위로 치솟았고 시뻘건 불길은 계속 황후궁 위

쪽을 태워 버리며 무섭게 올라갔다.

벌써 죽었겠지?

빨리 죽는 게 덜 고통스러울 거다.

쿠로는 황후궁 안에서 불타 죽었을 벨리타를 상상했다. 그 아름답고 신비로운 몸이 아깝긴

했다. 그러니 벨리타 자신은 얼마나 아깝고 억울할까?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건 인정했다. 하지만 성격이 개같으니 털끝만큼도 미련 없다.

쿠로는 저 말을 비단 벨리타에게만 한 것이 아니다. 불타고 있는 황후궁 주변 땅 어딘가로

시선을 주었다.

저쯤 되려나?

자신이 조력자에게 가르쳐 준 탈출로는 지도상 막힌 땅굴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잘도 가고

있었겠지. 막다른 곳에 가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순진한 줄 알았더니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어딜 감히 제까짓 게 황비 자리를 넘봐?

누굴 속이려고.

저런 일을 시켜 놓고 살려 둘 거라 생각한 게 아둔한 거다. 입을 막아 버려야지 미쳤다고

저런 걸 살려 둬? 나중에 무슨 요구를 들이대며 몰고 갈 줄 알고?

지금도 저렇게 황비 자리를 요구하고 나오는데 나중엔 얼마나 골치 아파질지 안 봐도 뻔

하다. 꿈도 야무졌다.

황비를 꿈꾸며 땅굴을 걸어오다 길도 막히고 제 인생도 막혀 거기서 생을 마감했으니 아

주 끔찍한 말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기에 욕심낼 걸 욕심내야지.

처음부터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아쉬워 입맛을 다셨던 것이다. 황비 운운하며 적

당히 데리고 놀다 버려 버릴까 생각도 잠깐 했었다. 조금 탐은 났었다.

하지만 그런 여자는 널렸다. 저 입이 무서운 무기가 될 것이다. 그러니 처음 마음먹은 대로

죽이기로 했다.

애썼다. 마지막 가는 길이 험했지만 죽으면 다 끝난다.

쿠로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공기 한번 신선하니 맛있었다. 매

캐한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니 기분마저도 상쾌해

졌다.

다시 돌아온 데인까지 합세해 군사들이 치열하게 붙고 있었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무

했고 여전히 여기저기서 아우성이었다. 군사를 더 끌고 와도 고작 백여 명. 그거 가지곤 어

림도 없다. 이참에 데인도 깔끔하게 여기서 죽으면 되겠다.

이러니 마음에 쏙 드는 황궁 모습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정갈하고 조용하기만 했던 황궁이

활기가 돋고 생생하게 피 냄새가 돌았다. 이제 곧 이곳이 내 것이 된다.

이 모든 소음과 소란들이 쿠로에게는 황홀한 음악 소리처럼 들려왔다.

***

데인은 양손에 한 자루씩 검을 들고 필사적으로 날아오는 검을 막았다. 머리로만 대공 자

리에 올라선 게 아니다. 검술 또한 뛰어났다. 쿠로가 좀 더 뛰어난 것이 애석한 일이었지만

데인 또한 두세 명은 거뜬히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대여섯 명의 적이 자신

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것.

병사들이 데인을 알아보고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쿠로의 명령이었겠지. 데인은

점점 밀렸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느라 이쪽으로 달려와 줄 기사는 없었다.

안톤.

폐하.

이를 악물고 적들의 공격을 막아 냈다. 윽.

미처 피하지 못한 검에 오른쪽 팔뚝이 베였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사방으로 찔러 오는 검

들을 빠른 속도로 쳐 냈다.

멀리서 함성이 들려왔다. 적들의 함성이다. 황도의 성곽 쪽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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