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08화 (108/130)

108화 이렇게 죽는 운명인가

억울했다. 너무 억울했다. 이곳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한 것이 다 소용없었다. 결국,

이렇게 죽는 운명인가. 목이 달아나 죽는 운명이었는데 결국 불타 죽게 되는 건가. 그래서

억울했다. 살고 싶었다. 이렇게 죽기 싫었다. 제발….

벨리타의 두 눈이 이리저리 방황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갇혀 버렸다.

마마님….

여기서 이렇게 끝나게 해 드릴 순 없다. 겁이 나고 두려워 몸을 떨면서도 원통하고 애통해

유모와 핀핀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

쿠로는 제 사병들이 황후궁 1층 창문에 덧대 놓은 나무판에 모두 불을 붙이고 다니는 걸

확인했다. 잠시 후, 창문 하나에서 사람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죽일까 말까? 지금 황궁 안에서는 여기저기서 쓰러지는 군사들이 속출하고 있다. 제 사병

들이 드디어 황궁 문을 열었고 밀려들어 온 제 편들이 남아 있는 황궁 군사들보다 더 많았

다. 그런데도 기사단이 얼마나 치열하게 맞붙는지 멀찍이 떨어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손

에 땀을 쥐게 했다.

우리 편 이겨라.

쿠로는 거의 자신이 승기를 잡은 것 같아 황후궁에서 빠져나온 이들은 살려 주기로 했다.

대신 그쪽으로 다가가 행여나 벨리타가 빠져나오는 건 아닌지 살폈다. 순서가 바뀌었어도

잡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모두 빠져나온 것 같은데 벨리타는 없었다.

쿠로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불타는 황후궁을 올려다보았다. 1층은 이미 불바다

였고 점점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 안에 있겠구나. 불타 죽는 것이 얼마나 끔찍할까. 불

쌍한 감정이 아주 조금, 손톱만큼은 있었지만 다 자업자득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 나를 무시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라. 이제 보니 꽤 상처였나보다. 다

시 태어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다 해도 자신을 만나지도 않을 텐데 이러는 걸 보면 벨리

타의 외면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모양이다.

저 연기를 따라 하늘나라로 훨훨 올라가거라.

더 이상 아쉬운 것 없다는 듯 쿠로는 마지막 인사를 던졌다. 다만 걸리는 건, 에무르와의

약속이었다. 벨리타 하나 차지하겠다고 전쟁까지 일으키는 놈인데 죽은 줄 알면 얼마나 허

무할까. 하지만 그건 카르탄을 다 정복한 뒤에야 알게 될 일. 그때 가서 둘러대면 된다. 이

왕이면 황제 놈한테 뒤집어씌우면 더 좋고.

아.

이런 상황에서도 머리는 비상하게 돌아간다. 에무르는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돈독해진 걸

모른다. 벨리타가 이상하게 변한 것 역시. 그러니 황제가 황후를 죽였다고 둘러대야겠다.

에무르는 슬픔에 휩싸이겠지만 그때쯤에 자신이 황제 자리에 오르는 건 변함없다. 열심히

싸워 벨리타를 만날 생각으로 바다를 건너오는 에무르가 불쌍할 뿐이었다.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는 듯 그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빛에 그의 옆얼굴

이 어른어른 얼룩지며 악마의 그것처럼 사악하게 빛이 났다.

***

부기사단장은 남아 있는 병력으로 기습을 한 사병들을 막아 내느라 전력을 다했다. 만만치

않았다. 황궁 안에서 공격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데

황후궁이 불타는 것이 보였다. 싸우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황후마마.

황제 폐하가 특별히 부탁까지 하신 황후마마가 저 안에 계시는데 큰일 났다.

하지만 그쪽으로 달려갈 수가 없었다. 지금 맞붙고 있는 적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부기사

단장은 활짝 열린 황궁 문 쪽으로 길을 뚫으며 기사 한 명을 간신히 탈출시켰다.

어서 달려가 데인 대공에게 전해라. 황궁이 침략받고 황후궁이 불타고 있다고.

으아아!

무지막지한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마마. 제발… 제발….

타오르는 황후궁을 보면서도 다가가지 못하는 지금 상황이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

핀핀은 몇 시간 전, 마마님이 잘 주무시질 못하는 것 같아 부엌으로 내려가 국화차를 우려

내어 가지고 나왔다. 그런데 타는 냄새가 먼저 맡아졌다. 깜짝 놀란 핀핀은 찻잔을 들고 중

앙 계단 쪽으로 뛰어오다 말고 얼른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리자?

멀리서도 확실히 보였다. 기름을 뿌리고 손에 들고 있는 횃불로 길게 늘어진 커튼에 불을

지르는 것을. 게다가 다른 한 손에는 무시무시한 검을 쥐고 있었다.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려 버렸다. 두꺼운 양탄자 위라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지금 그걸 신경 쓸 겨

를이 없었다.

마마님.

마마님이 위험하다.

손발이 떨려 왔지만 숨죽여 숨어 있다 리자가 반대편으로 불을 지르며 사라지자 얼른 중

앙 계단을 죽어라 뛰어 올라갔다. 서둘러 피신시켜야 한다. 오로지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뛰던 도중 신고 있던 신발 한 짝이 벗겨졌지만 알지 못했다.

“마마. 어서 일어나세요. 불이 났어요.”

3층 황후 방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소리를 지르며 얼른 분홍색 가운을 입혀 드리고는 손

을 잡고 뛰었다. 시간이 없다. 리자가 위로 올라오면 끝난다. 그 검!

크게 놀란 황후의 손을 잡고 2층으로 내려오는 순간, 저 아래에서 리자가 뒤돌아 계단을

올라오며 불을 지르는 것이 보였다. 안 되겠다. 뒤쪽 계단으로… 앗.

리자가 그 순간 몸을 돌렸다. 순간 황후의 손을 잡고 1층에서 보이지 않는 벽 쪽으로 몸을

숨겼다. 뒤쪽 계단으로 향하는 복도와는 반대쪽이었다.

한발 한발 올라오는 리자를 피해 할 수 없이 더 멀리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마마의

목숨이 목적일 테니 눈에 띄면 마마가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반대쪽으로 뛰었

다. 그리고는 이 창고로 쓰는 방에 몸을 숨겼다.

“여기 있으면 더 위험하지 않을까?”

마마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밖은 더 위험했다.

“리자가 마마님을 해칠 거예요.”

그 순간 벨리타도 알았다. 지금 그냥 화재가 난 것이 아니라 리자가 불을 질렀다는 것을.

그리고 밖에 있다는 것도. 이 일을 어쩌면 좋지.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숨을 죽였다.

그러고 있는데 유모가 들어왔다. 눈물이 나게 안심이 되는 것도 잠시, 아무런 방법을 찾지

못해 세 사람은 여기서 모두 죽게 생겨 버렸다.

핀핀은 자신이 더 영리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마마님을 안전하게 지켜야 하

는데, 그러기로 맹세했는데 이렇게 되어 버렸다. 다 제 잘못이다. 마마님이라도 살릴 방법

이 없는지. 알면 제 몸 하나 던져서라도 살리고 싶었다.

마마님….

핀핀은 피눈물을 흘리며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

뭐라?

데인은 황도 성문을 지키며 전투를 지시하다가 달려온 기사의 전언을 듣고는 펄쩍 뛰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황궁 문이 굳게 닫혀 있을 텐데 어떻게 황궁이 습격을 당해? 그들이 어떻게 들어간 거지?

땅속에서 솟아난 것도 아닐 텐데.

당했다.

황후마마. 황궁을 지켜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제일 안쪽에 가장 안전하게 모신 뒤, 이쪽을 막기 위해 달려왔는데 황후궁이 불타고 있다

니. 큰일이 벌어졌다.

이쪽도 여의치 않았다. 생각보다 반란을 일으키려고 쳐들어온 사병들이 더 많았다. 쿠로

쪽 사병들의 움직임을 전달받고 회군하고 있는 대군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 지방의 우호적

인 귀족들의 힘을 빌었다. 그들의 사병도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겠는

데 문제가 안에서도 터졌다.

할 수 없이 군사들 일부를 쪼갰다. 황궁을 지켜야 한다. 데인은 별동대를 직접 이끌고 황궁

으로 달려갔다.

황후마마. 제발 무사히… 황제 폐하를 위해서라도 제발 무사히만….

데인은 쿠로에게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다. 저가 모르는 다른 술수를 쓴 것이다. 쿠로가 쓴

다른 술수를 알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다. 전쟁에 승리했고 회군하는 대군이 일주일 후면

황도 근처까지 오게 되니 그때까지만 잘 버티면 된다 여겼다. 지방 귀족들에게 협력도 요

청했고. 그러니 막을 수 있었다. 정식으로 덤볐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데인은 백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저 멀리 황후궁이 불타고 있는 것

을 보았다.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쪽까지 갈 수 없었다. 달려드는 적들과 싸우

느라 눈으로 보면서도 피눈물을 흘리며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황후마마. 제발 탈출하셨기를.

그 소원만 빌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각, 황도 성문이 흔들렸다. 적 몇십 명이 커다란 통나무를 들고는 성문을 부수기 위해

부딪혀 왔다.

쿵.

쿵.

성곽 위에서 화살로 대응하고는 있지만, 적들은 방패로 막아 가며 성문에 부딪히는 통나무

의 힘을 늦추지 않았다.

우지끈.

거대한 성문 한쪽 끝이 부서졌다. 단단히 걸어 잠근 성문이 그래도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완파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황궁은 불바다였고 황후는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황도 성문은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고

황도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어려운 전쟁에서는 승리한 카르탄 제국이 내란으로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

호호호.

리자는 한 사람 겨우 지날 수 있는 땅굴을 걸어가며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생

각해 봐도 웃음만 나왔다. 남자들이란.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었다. 저는 외동딸이었고 황후의 시녀로 들어올

때 이미 하나 남은 가족인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고 계셨다. 그리고는 2년 후 돌아가셔서

가족이라곤 아무도 없는데 가족이 보낸 편지라니.

몰래 나가 약속된 장소로 가서는 쿠로 대공을 만났다. 누군지는 잘 알고 있었다. 잘하면 다

음 황제가 될 분이었다.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부터 리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

나였다.

기회다.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다.

황후에게 내쳐진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위인만 만난다면 이 한 몸 바쳐 섬기겠다

고 안타까워했는데 하늘이 제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그 위인을 보내 주셨으니. 아니

직접 자신을 찾아와 준 건가? 어쨌건 이번 기회를 잡아야 한다. 일생일대 단 한 번의 기회

다.

편지에 황후가 위험하니 어쩌니 쓰여 있었지만 쿠로 대공의 진짜 속내를 알아야 한다. 그

래서 아주아주 순진한 얼굴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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