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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07화 (107/130)

107화 여기서 탈출해야 해요

모두가 빠져나간 황궁은 최소한의 군사들만 남아 한적하기까지 했다. 그 많던 기사단과 군

사들이 황도 성곽을 향해 다 몰려갔으니 사실상 여긴 거의 비어 있다 봐도 된다. 있어도 제

사병이 백 명 이상 이미 안에 들어와 있다. 황궁 문만 열면 더 많은 사병이 들어올 것이고.

벨리타 하나 포기한다고 계획이 틀어지진 않는다. 바로 승기를 잡으면 된다.

언덕 위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동태를 살피느라 쿠로의 긴장한 두 눈이 한껏 커졌다.

제 사병들이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내며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그나마 남아 있던 황궁 군

사들을 향해 화살이 거침없이 날아갔다.

드디어 공격 개시다. 그 모습에 쿠로는 그렇게 힘이 날 수 없었다.

쉬이익.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이어 여기저기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고 황궁 군사들도 화살을 쏘

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황궁 문으로 통하는 중앙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검이 맞붙고 있는 중앙 광장을 지켜보다 쿠로는 이리저리 건물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모

두가 전부 닫혀 있었다. 창문은 말할 것도 없이 뚫려 있는 모든 문까지 두꺼운 이중문으로

다 닫아 놓았다.

쿠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알고 대비한 흔적이다. 이런 건 좋지 않은데….

어떻게 알고 미리 대비했지? 다른 나라에서 침공해 왔을 때나 할 법한 대비를 이미 해 놓

고 있었다.

데인 이놈!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놈이 두 놈이나 있으니 어디 살겠나. 싹 다 죽여 버려야 분이 풀리

겠다.

이를 갈았지만, 다시 자신을 진정시키며 다음을 지켜보았다. 데인이 뭔가 미리 대비를 시

켰다는 건 열이 받지만 오히려 잘되었다. 나무판으로 닫아 놓았으니 오히려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꼼짝없이 갇힌 꼴이다. 데인이 머리를 썼으나 되려 자신에게 도움이 될 뿐이었

다.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황후궁을 슬쩍 엿보니 아직 아무 낌새가 없이 조용했다. 슬슬

움직였을 것이다. 황후궁 근처에 제 사병 몇 명이 자연스럽게 접근해 있었다. 저기도 안과

밖에서 움직일 것이다. 이것이 양공 작전이라는 것이다. 하하하. 황도도 황궁도. 정신이 하

나도 없을 것이다.

황후궁이 저렇게 꽁꽁 닫혀 있으니 벨리타도 저 안에 갇혀 있는 셈이다. 저 상태도 나쁘지

않다. 조력자가 잘만 해 주면. 스스로를 가두다니. 어차피 이용하고 죽일 생각이었는데 이

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저 계획도 차선책으로 나쁘지 않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기습을 당해 쓰러지는 황궁 군사들이 꽤 많이 목격되었다.

챙. 챙. 챙.

부딪히는 검의 소리가 중앙 광장에 메아리쳤다.

잘한다. 그래. 아주 잘하고 있다.

검이 부딪히는, 장엄한 소리가 메아리칠수록 쿠로는 더 힘이 나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군사들을 가지고 허를 찔려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아주 흡족했다.

지금 황궁에서는 제 사병들이 공격을 시작했고 황도를 둘러싼 성곽에서도 사병들을 이끌

고 온 제 편 귀족들이 합류해 공격하고 있을 것이다. 안과 밖이 모두 공격당하고 있으니 데

인 이놈. 어디 둘 다 막아 봐라.

아. 이제야 황후궁에서 조짐이 보인다. 이제 저긴 됐다. 풀리기 시작하면 이렇게 술술 풀리

는 법.

조력자가 잘해 주고 있다. 더 잘해 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제 편을 열렬히 응원했다. 요란

한 소리가 황궁 안을 지배했다. 용병과도 같은 실력 좋은 제 사병들과 기사들이 맞붙어 점

점 더 치열한 싸움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황후궁이 어떤 상황인지 더 신경을 못

쓸 것이다. 아주 잘 진행되고 있다.

쿠로는 안전하게 몸을 숨기고는 번쩍이는 두 눈으로 모든 상황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

황후궁 안으로 통하는 출입문까지 열쇠로 돌려 단단히 안에서 잠그는 손이 있었다. 쿠로가

믿고 있는 조력자였다.

그리고는 이내 1층 앞쪽부터 기름을 뿌리고 벽에 걸려 있는 횃불을 던졌다. 순식간에 넓은

홀 앞쪽에 불길이 번지더니 길게 늘어진 커튼으로 옮겨붙었다.

타들어 가는 불길이 생각보다 엄청 빠르게 번져 갔다. 밀폐되어 있어 더 잘 타들어 갔다.

조력자는 다른 횃불을 손에 든 채 중앙 홀 다른 쪽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오른

쪽으로 돌며 계속해서 불을 놓았다. 아주 잘 탄다. 시키는 대로 잘하고 있다.

음? 여기 왜 찻잔이 있지?

바닥에 찻잔이 하나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조력자는 별스럽지 않게 생각하

고 지나갔다. 지금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아래 깔린 양탄자에도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

르며 탁탁 타들어 가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계속 위로 올라갔다.

3층으로 올라가자 사방에서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유모는 황후궁 안에 불이 났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밖으로 나오니 우왕좌왕하는 시녀

들이 1층이 타고 있어 중앙 층계로 내려가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있었다.

얼른 하인들이 출입하는 뒤쪽 계단으로 피신하라 소리 질렀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유모는

마마님에게 가기 위해 몸을 돌리다 2층 반대편으로 급히 사라지는 사람을 보았다. 분홍색

옷이 언뜻 보여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설마? 저쪽은 1층이 보이지 않게 벽으로 되어 있고 이

쪽은 난간으로 되어 있어 아래층이 보인다. 왜 저쪽으로?

그쪽으로 가면 안 된다고 소리치려 했다. 뒤쪽에 계단이 있는데 반대 방향으로 갔으니….

얼른 그쪽으로 뛰어가려고 할 때였다.

랄라… 랄랄라….

노랫소리가 들렸다. 이 상황에서? 뭔가 싸한 느낌에 얼른 복도 동상 뒤로 몸을 숨겼다.

터벅. 터벅.

느긋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점점 내려오는 인영이 희뿌연 연기 사이로 보였다.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있었는데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주변을 밝히려고 했다면 위로 들어야 맞는데

저건 필시…. 저것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는 소리다. 게다가 다른 한 손에는 긴 검이 들려 있

었다. 누구냐?

“아아. 황후 년도 여기서 죽으면 좋았는데.”

유모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저건?

들고 있던 횃불을 아래층을 향해 던져 버리고는 사람들이 좀 전에 내려간, 뒤쪽 계단으로

향하는 사람은 분명. 리자였다. 저것이 일낼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런 끔찍한 일까지 저지

를 줄은 몰랐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미친 리자가 사라지고 난 뒤, 유모는 그곳에서 빠져나와 아까 사라진 분홍 옷을 찾아 복도

반대쪽으로 달렸다. 벌써 연기가 자욱하게 황후궁 안을 뒤덮었다.

***

사람들 모르게 다른 방으로 들어간 리자는 문을 꼭 잠갔다. 여긴 창문이 없는 창고 같은 곳

이라 사람들이 지나친 방이었다. 한쪽 구석으로 간 리자는 기둥의 한쪽을 들고 있던 검으

로 떼어 냈다. 거기엔 밖으로 향하는 땅굴이 있었다. 쿠로 대공이 일을 다 치르고 탈출할

방법까지 상세히 알려 준 덕분이다.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된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단단히 잠긴 창문을 열고 그쪽으로 탈출하려고 아우성이었다. 다

른 곳은 열리지 않았고 열려도 밖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들어와 나갈 수가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몰려다니다 겨우 한 곳을 발견한 것이다. 다행히 부엌 쪽이라 준비

되어 있던 물로 창에 붙은 불을 끈 다음 다들 탈출하는 중이었다. 잘 있어라. 살 사람은 살

겠지. 시키는 대로 황후궁만 불태워 버리면 된다. 그렇게만 하면 쿠로 대공이 황제가 되었

을 때, 황비 자리를 준다고 약속했다.

소원 하나?

바로 그것을 원했다. 황비 자리를 달라고.

쿠로 대공이 황후를 사모했던 걸 잊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서 모른 척 연기했지. 그러니

여기서 황후가 장렬히 불타 사라지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 자신이 황비가 되어도 엄청나

게 거슬릴 판이었다.

외모부터 따라갈 수가 없으니. 그것 하나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도 황비 자리가 어디

냐? 황후는 폐위가 되니 지위도 자신이 더 높아지게 된다. 그 꼴을 위에서 아주 즐겁게 지

켜봐 주리라. 이렇게 갚을 날이 오다니. 이런 기회와 새 삶을 준 쿠로 대공을 한평생 떠받

들고 살 것이다.

황비다…. 리자 황비.

아주 마음에 드는 호칭이다. 이미 된 듯 거만한 표정도 한번 지어 보았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리자는 땅굴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

“마마?”

황후의 방 바로 아래, 창고로 쓰는 곳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 유모는 다급하게 마마를 찾았

다.

“유모? 유모, 여기에요.”

벨리타가 소리를 냈다.

유모는 그 소리에 얼른 달려갔다. 온갖 잡동사니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마마와 핀핀이 보

였다.

“여기서 탈출해야 해요. 빨리.”

“리자는요?”

아. 마마님도 아시는구나.

유모는 리자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사라졌다고 답해 드렸다.

유모는 마마를 찾은 것이 일단 다행이었지만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창문을 열다 말고 얼른

다시 닫았다. 밖은 이미 연기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이렇게 빠르게 번지다니. 얼른 다시

단단히 걸어 잠그고 출입문으로 뛰어가 밖을 살펴보다 그것도 역시 황급히 닫아 버렸다.

그새 2층은 연기로 휩싸여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1층에서 타오르는 불길의 열기가 여

기서도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다.

문을 꼭 닫고 아직은 연기가 들어오지 않는 방문 틈새를 커다란 어항 속의 물을 이용해 손

에 잡히는 천과 옷들을 적셔 꼭꼭 막았다. 핀핀과 벨리타도 같이 움직였다. 함께 그렇게 한

다음 셋이 같이 모여 앉았다. 큰일 났다.

도망칠 방법이 없다. 마마님을 살려야 한다. 저야 여기서 죽어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마마

님은 아니다. 반드시 살려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유모는 두 사람의 손을 꼭 쥐고는 두려움에 떨었다.

벨리타는 암담했다. 사방팔방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방법이 없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제 슬슬 문틈으로 회색 연기가 스멀스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벨리타는 망연해진 얼굴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 많은 위기를 다 거쳐 왔는

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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