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벨리타. 널 꼭 잡는다
이 무슨 횡포인지. 황제 놈이 없으니 데인 저 자식이 지가 황제인 줄 알고 설쳐 댄다.
그래 봤자 이렇게 들어왔다. 이것들아. 내가 누군데!
이렇게 땅굴로 황궁 출입을 제 맘대로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를 거다. 데인. 너의 수작에 내
가 당할 것 같으냐.
쿠로는 콧방귀를 야멸차게 뀌며 마구 씹어 댔다. 그래도 위기 때마다 적당한 조력자가 꼭
한 명 이상은 제 앞에 나타나는 것이 신기했다. 운이 따라 준다. 이 땅굴만 해도 산티노가
아니었으면 어찌 알았겠나. 이게 없었으면 이런 계획은 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국, 산
티노가 정말 큰일을 해 준 셈이다. 지금은 사라져서 그렇지.
삐걱.
조심스러운 문소리와 함께 조력자가 들어왔다.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더 마
음에 들었다.
쿠로는 다가온 조력자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누가 본 사람은 없겠지?”
“없어요. 다만 바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유모의 눈은 피할 수 없거든요.”
아. 예전 자신도 그 유모 몰래 황후를 만나느라 성가셨던 것이 떠올랐다.
쿠로는 사정을 알기에 얼른 지시 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이틀 후, 자정. 움직이라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자세히 알려 주었다. 그때는 황후를 자신이 구해 낸 상태일 테니
모여 있는 음해 세력을 처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조력자가 마
음에 들어 하마터면 얼굴을 쓰다듬을 뻔했다. 창틀 틈새로 들어오는 달빛에 슬쩍슬쩍 비치
는 여인의 뺨과 목선이 그의 이성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잘 멈추었다. 아직은 발톱을 숨
길 때다.
고개를 끄덕인 조력자는 다시 몸을 돌려 문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추
더니 다시 돌아오는 모습에 쿠로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왜지?
“정말 소원 들어주시는 거죠?”
지금이야 얼마든지.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소원 하나가 있어요.”
“그래. 말해 보아라.”
쿠로는 최대한 자상한 목소리를 내었다.
***
하하하.
여인의 속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남들이 의심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황후궁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을 몰래 지
켜보며 쿠로는 소리 내어 웃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아둔한 것 같으니라고.
황후를 보호하려면 데인이나 황제 기사단에게 말하면 될 일을 배신자들이 깔려 있다고 하
니 그대로 믿고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더 어리석어 보였다. 머리 나쁜 사람으로 잘
도 골랐다. 더 잘된 일이지만. 자신의 혜안에 감탄할 정도였다.
그런데 소원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그걸 미끼로 제법 즐겨 볼 수 있었는데. 그 점은 무척 아쉬웠다.
보아하니 그쪽으로 경험도 없어 보이는 순진한 아가씨 같았다. 그래서 더 입맛이 다셔졌지
만.
쿠로는 일이 잘 성사되는 것이 급선무라 다른 생각은 애써 묻은 채, 다시 헛간 구석에 뚫려
있는 땅굴로 조심스럽게 몸을 내렸다.
***
“핀핀. 어딜 갔다 오는 거야? 한참 찾았잖아.”
핀핀은 황후궁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유모가 저를 불러 조금 놀랐다.
“지하 거처에 잠깐 다녀왔어요.”
“그래? 어서 마마님께 가 봐라. 찾으신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달려가려 하자 다시 유모가 불러 세웠다.
“핀핀. 이제 지하에는 내려가지 마라. 너 혼자는 안 가는 게 좋겠다.”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런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유모는
고개를 저었다.
다신 못 가게 해야겠다. 지하에서 나왔을 때보다 살이 오르고 얼굴빛도 환해지니 제법 성
숙하게 보였다. 아이 같던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이젠 제법 여인의 태가 났다. 위험하다.
거긴 병사들만 가득 돌아다니는 곳인데 저런 모습으로 드나드는 건 금지해야겠다.
유모는 아직 아이 같은 핀핀이 걱정스러워 더 잘 가르쳐야겠다 다짐했다.
***
드디어 그날이 왔다. 운명이 바뀔 날이 다가왔다.
비장한 표정의 쿠로는 가장 실력 있는 사병 백여 명과 함께 빠르게 황궁으로 향했다. 그들
을 기사복과 시종 옷으로 갈아입힌 뒤, 예전 에무르를 탈출시킨 그 땅굴로 진입했다.
일단 자신은 십여 명만 데리고 숨겨진 통로를 통해 황후 방으로 잠입하고 나머지는 길잡
이와 함께 헛간까지 그대로 직진한다.
황후를 잡고 황도 밖에서 모인 사병들이 공격을 하면 황궁 안 군사들이 빠져나갈 터. 그때
이들을 헛간 밖으로 내보내 반란을 일으킨다.
가장 발 빠른 사병들이 달려가 성문을 열면 밖에서 위장한 채 대기하고 있는 자신의 사병
들이 밀고 들어올 것이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귀족들도 거의 황도 근처에 다다랐다.
지난번 한 번 지나간 길이라 훨씬 수월하고 빨랐다. 산티노 덕분에 얻은 땅굴 설계도까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몇 번이고 확인하는 바람에 거의 외울 정도였다.
헛간 쪽에서 방향을 어떻게 틀면 황후의 방까지 가는지, 정확히 머릿속에 숙지했다. 황후
궁 지하까지 가게 되면 건물 기둥 안에 있는 비밀 사다리를 타고 3층 황후 방까지 올라가
면 된다. 그 통로를 통해 산티노가 벨리타와 내통했다.
일생일대의 위업을 달성하러 가는 길이니 더럽고 치사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얼굴에 한껏 긴장감만이 넘실거렸다.
갈림길에서 갈라진 쿠로와 소수 사병들은 아무런 걸림돌 없이 황후궁 지하에서 빠져나와
기둥 한쪽을 뜯어내고 연결된 사다리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제 곧 황후 방이다. 벨리타.
널 꼭 잡는다. 두고 봐라. 기다려라. 벨리타.
자정이 되기 전, 조력자가 움직이기 전 벨리타를 이리로 끌고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는 인
질로 삼아 기사단과 군사들을 항복하게 만들면 된다. 한 걸음 한 걸음 사다리를 올라가는
그들의 격한 숨소리만이 좁은 통로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
저녁부터 대공령이 내려왔다. 모든 황궁의 창문을 닫고 이중문까지 꼭꼭 걸어 잠그라는 명
을 받들어 황후궁도 모든 창문을 닫았다. 물론 벨리타의 방도 창문이 모두 이중으로 닫혀
밖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고 있었다. 테라스로 나가는 문까지 단단히 잠그라 해 자물쇠
까지 채웠다.
갑작스러운 대공령 때문에 긴장감이 돌아 벨리타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핀핀이 없어서 더 그런가.
조금 전 잠깐 차 한 잔 가지고 오겠다며 나가더니 아직 안 돌아오고 있었다. 곧 오겠지. 침
대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 한숨을 쉬며 높은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쥐 새끼가 찍찍거리는 소리 같기도 한 것이 희미하게 들리
다가 말았다.
벨리타는 다시 귀를 기울였지만, 적막만이 흘렀기에 잘못 들었다 치부했다. 그렇게 좀 더
누워 있었더니 멀리서 자정을 알리는 황궁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창문이 막혀
있어 더 희미하게 들렸다. 자정이 되도록 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 잠을 재촉했
다.
***
이 개자식.
찢어 죽일 놈.
삼대를 멸해도 시원치 않을 놈.
막혔다. 잘 올라가다가 막판 황후 방으로 통하는 나무 문을 열려고 하자 꿈쩍도 하지 않았
다. 헉 소리가 나왔다. 뭐지? 이게 뭐야?
끙끙거리며 나무 문을 여러 명과 합심해서 열어 보려 해도 도대체 손톱만큼도 움직이지
않았다. 막혔다. 욕이란 욕은 속으로 다 쏟아부었다.
산티노 이놈을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는 소문이 날까? 좁은 공간이라 길길이 날뛸 수도
없어 억눌린 신음 소리만 몇 번 내뱉다가 다시 후퇴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러면 안 되
는데.
손과 발을 놀리면서 쿠로는 머리를 마구 굴리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곧 조력자가 움직일 것이다.
일단 빠져나가자. 헛간으로 가 다음을 도모하자.
쿠로는 시종 복장을 하고 얼굴을 검게 칠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밤이라
어둠 속에 잘 몸을 숨기고 있으면 사람들 눈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벨리타 납치 작전은 실패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머릿속까지 금이 쩍쩍 가는 것 같았다. 위기 상황이다.
아니다. 정신 차리자. 위기에 강한 게 바로 나다.
벨리타를 포기하고 황궁 문만 열면 된다. 어서 빨리 헛간을 통해 제 사병들을 밖으로 내보
내면 된다.
땅굴에서 방향을 틀어 황후궁 헛간 쪽으로 나온 쿠로는 모두에게 단단히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는 밖의 동태를 살피며 어둠을 틈타 조용히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헛간 아래
땅굴 통로에 대기하고 있던 사병들이 속속 올라와 밖으로 뛰어나갔다.
***
도착했나 보다.
자신을 지지하는 사병들이 황도 성곽 밖에 도착한 것 같았다. 생각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
암. 그래야지.
쿠로는 제 사병들을 다 내보내고 헛간 주변 언덕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래가 내려다보
여 황궁 안이 아주 잘 보였다. 제 사병들이 건물에 몸을 숨기며 아직까지는 들키지 않고 조
용히 움직여 주었다.
갑자기 황궁 안이 분주해졌다. 기사들과 군사들이 중앙 광장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알아차렸다. 자신이 부른 지방 귀족들의 병력이 황도 성곽 근처까지 와 있다는 것을. 황도
를 지키기 위해 저것들이 그쪽으로 달려갈 것이 뻔하다.
그걸 노렸다. 황궁 안에 이미 많은 수의 사병이 잠입한 줄은 아직 모른다. 아무리 데인이라
해도 산티노의 땅굴을 모를 터. 대공인 자신도 그동안 전혀 몰랐던 일이다.
쿠로는 아무리 시종 차림으로 변장했어도 혹 누군가 자신을 유심히 볼까 봐 주의를 기울
였다. 자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과 고귀함이 어디 가겠는가. 안심할 수는 없었다.
뿌우… 뿌우….
드디어 요란한 나팔 소리까지 울려 퍼졌다. 제 사병들이 도착해 공격 준비를 하는 모양이
었다. 그 소리와 함께 황궁 문이 크게 열렸다. 맨 앞에 데인이 앞장섰다.
중앙에 집결한 대부분의 군사들이 황궁을 빠르게 빠져나가 황도 성곽 쪽으로 달려갔다. 그
곳을 먼저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곳이 무너지면 황궁도 위험해진다. 그러니 그곳이 우
선 순위다. 쿠로도 다 알고 이 계획을 짰다. 너희들 위에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