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경쟁자가 생겨 버렸다
유모는 이건 절대 폐하를 위하는 게 아니라는 말도 저한테 못 박았다. 배고픈 사람 누구한
테건 이렇게 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데 강조하는 걸 보니 유모의 원망도 시간이 해결해 주
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 치웠다. 포만감에 흡족해하는 칼리크를 위해 시녀가 뜨거운 홍차
를 가지고 들어왔다.
또다시 말없이 두 사람은 뜨거운 홍차를 마셨다.
차가운 홍차도 좋은데 오늘은 뜨거운 홍차였다. 벨리타가 뜨거운 홍차를 아무렇지 않게 마
시는 걸 보고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늘 차가운 홍차만 마시던 벨리타였다. 그냥 좋았다.
오래간만에 뜨거운 홍차를 맛있게 음미하며 보고 싶은 얼굴을 실컷 눈에 담았다. 이런 조
용한 시간도 그에게는 안식이 되었다. 늘 너무 떠드는 로간 공작과 있어서 더 그런지도 모
르겠다.
유클로 왕국에 있을 때는 그렇게 안 흐르던 시간이 왜 여기만 오면 도둑맞은 것처럼 휙 지
나가는지 참으로 이상했다.
또 하루 종일 날아가야 해서 이제 슬슬 일어나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늘 그렇지만 아
쉬움 가득한 시선을 벨리타에게 던졌다. 그래도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에 온 것 같은 이
런 시간을 가진 것은 너무 감사했다.
또 이렇게 날아와 준 호랑이 신수에게 어떻게 감사를 해야 할지.
아!
칼리크는 제 옆에 서 있는 벨리타에게 해 주고 싶어 했던 걸 기억해 냈다.
다시 불러낸 호랑이 신수를 보고는 벨리타가 반가워했다. 자신보다 신수를 더 반가워하는
그녀에게 서운함이 들려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냥 뭘 해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미
치겠다. 좋아하는 모습을 본 것만도 기뻤다. 그 대상이 자신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또 욕
심을 부리고 있다. 자제하자.
“신수 위로 올라타 보시오.”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잠깐이나마 그녀를 신수에 태워 주고 싶었다.
“지금도 오래 있었어요.”
자꾸 여기서 시간을 지체한다 생각하는지 벨리타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
“괜찮소. 그 정도의 시간은 있소.”
전쟁도 승리했겠다 뭐 그리 바쁜 일이 있어 이 정도 일도 못 해 줄까. 뭐든 더 해 줄 수 있
다. 칼리크는 그녀를 재촉했다.
그의 말에 벨리타가 마지못해 움직였다.
그의 도움으로 거대하고 높은 호랑이 등 위로 올라탄 그녀는 신기해하면서 감탄까지 터트
렸다. 바닥에서 조금 떠오르자 그녀가 놀라며 호랑이 신수의 털을 꽉 움켜쥐었다. 천장이
있어서 높이 떠오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방 안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더니 그의 손을 잡고
조금 휘청거렸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경이로웠지만 겁도 났다. 그리고 좀 어지러웠다.
벨리타는 고마움을 담아 호랑이 신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호랑이 신수의 표정이
미소를 짓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녀의 입가에도 천사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벨리타는 좀 어지러워할 거라는 그의 생각이 맞았다. 그런데 호랑이 신수의 표정이….
“내 경쟁자가 신수. 너일 줄이야.”
벨리타를 두고 경쟁자가 생겨 버렸다. 신수까지 벨리타를 좋아해 주니 기쁘긴 한데 아무리
자신의 신수라 해도 벨리타를 공유하고 싶진 않다. 지금 그녀가 자신보다 신수를 더 좋아
하고 있어 더 그렇다.
신수야.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다음에는 나와 같이 하늘을 날아 볼까?”
자신이 잡아 주면 덜 무서워할 것 같아 그렇게 제안해 보았다.
하늘을 난다.
그건 어떤 기분일까?
어느 세상에서건 이런 경험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벨리타는 겁도 났지만 궁금함이 더 컸다.
“혼자 타 보고 싶네요.”
칼리크는 머쓱하게 웃어 버렸다. 같이 타는 것이 불편한가 보다. 그래도 거절하지 않은 것
만도 어디냐. 자신이 한 경험을 그녀도 하길 원했다. 그러면 되지.
“알았소. 다음번엔 꼭 그렇게 합시다.”
다음번에는 유클로 쪽 정리를 거의 다 하고 돌아올 테니 그때 정식으로 호랑이 신수도 황
궁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벨리타도 태워 주리라.
“이제 정리하는 것도 얼마 안 남았으니 그때까지 몸 건강히 잘 있어야 하오.”
꼭 약속이오.
어서 돌아와서 내 더 잘 돌봐 주겠소. 조금만 기다리시오.
칼리크는 간절한 소원을 빌듯 속으로 염원한 뒤, 천천히 벨리타의 방에서 나왔다. 오늘따
라 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억지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 나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요동치는 자신
의 감정을 잠재우기 위해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올려다보며 힘을 냈다. 다음번에 이 방
에 들어갈 때는 완전히 황궁으로 돌아온 뒤리라. 어서 빨리 그날이 오기를.
다시 돌아가는 길은 같은 시간이 걸림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지루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너무 멀리 날아와 이젠 보이지 않는데도 자꾸 뒤돌아보는 칼리크는 전보다 더 애가 타는
걸 느꼈다. 초조함마저 들었다. 지킬 사람이 생기니 더 초조해졌다.
어서 빨리 해치우자. 다시 돌아가면 매일 벨리타를 업어 주기라도 해야겠다. 떨어져 있는
것은 이제 이것으로 끝이다.
칼리크는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서신을 받고 지방 귀족들이 사병들을 움직였을 텐데 아직 황도
근처에 도착하지 않았다.
가장 빠르게 오고 있는 사병이 이틀 후면 황도 성문밖에 집결한다. 나머지 사병들은 그 후
속속 도착할 것 같은데 마음이 급해졌다.
쿠로는 자신의 사병들만 우선 황궁 안으로 몰래 잠입시킬 계획을 짰다. 속속 도착하는 사
병들이 모두 합쳐 황도 성곽을 공략하고 황궁에서는 자신의 사병들이 활약하면 승산이 있
다.
아무리 황궁 안에 기사단과 군사들이 다른 때보다 두 배가 남아 있다 해도 도착하는 사병
들과 자신의 사병을 합치면 이들과 대적할 정도는 된다. 황도 성문을 지키느라 황궁 안은
비어 있을 터, 잠입시킨 사병들로 기선을 제압하고 황궁 안을 점령한다.
그러려면 우선, 먼저 숨어 들어가 황후를 잡아야 한다. 황후를 인질로 삼으면 황궁 점령은
순식간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 안 된다.
되도록 빨리 잡아야 한다. 만일을 대비해 이미 황후궁 안에 아무도 모르게 조력자를 심어
놓았으니 걱정 없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서둘러야 한다. 유클로를 정벌하러 떠난 대군이 곧 회군할 것이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며칠 안에 승부를 보아야 한다. 빌어먹을 황
제 놈이 너무 일찍 전쟁에 승리한 탓이다. 일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놈이다.
그래도 서두르면 승산이 있다. 나머지 사병들도 거의 다 오고 있을 것이다. 카르탄 대군과
황제는 저 멀리 유클로 왕국에 아직 머물고 있다. 이 소식을 들어도 여기까지 달려오는 데
만 족히 보름은 걸릴 것이다. 그것도 쉬지 않고 달려온다면 가능한 날짜다. 흐흐흐. 전혀
승산이 없다는 소리다. 이번이 기회다.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
그러니 황후를 잡아 황궁을 장악하고 황도 성문을 여는 것이 우선이다. 이틀 후 황궁으로
쳐들어가면 계속 머릿속에 울리고 있는 ‘어서 오라’는 목소리대로 황궁을 차지하게 될 것
이다. 그 후, 3, 4일 후면 드디어 도착한 로카 왕국 군선이 침공을 시작할 것이다. 빠르게
치고 점령할 일만 남았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며칠에 자신의 운명을 몽땅 걸어야 한다.
오늘이 그 조력자를 만나기로 한 날이니 잘되었다. 정확히 움직여야 하는 날짜와 시간을
말해 줘야겠다.
피와 살이 다 타들어 갈 것 같은 초조함 속에서 그는 저택을 나섰다.
***
쿠로는 자신의 조력자를 만나 다시 한번 계획을 확고히 하고자 땅굴을 통해 황후궁 헛간
으로 향했다. 극비리에 일을 꾸미고 있어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 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
다.
처음으로 땅굴을 들어와 보니 감탄까지 할 정도로 정교하게 잘 파 놓았다. 산티노 가문의
놀라운 실력을 여기서 새삼 느껴 보았다.
이건 대단한 기술이다. 감탄도 잠시 신중히 지도를 보고 걸어가던 중 두 갈래 길이 나왔다.
한쪽은 지금까지 걸어온 땅굴과 같은 튼튼한 통로인데 다른 한쪽은 새로 판 듯 군데군데
흙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미처 밖으로 내다 버리지 못한 흙무더기들이었다. 어설프기 그지
없게 그냥 땅만 파 들어가 길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이 오래전, 에무르를 탈출시키기 위해 이 지점부터 새로 파 들어간 바로 그 땅굴이었
다. 그가 갇힌 방 아래까지 가장 가까운 거리를 측정해 새롭게 파 들어갈 지점을 자신이 지
정해 주었는데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그냥 무식하게 파 젖혔다.
무너지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뭐, 그때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으니 뭘 어떻게 했건
상관은 없었다. 그쪽 길은 무시하고 그는 목적지를 향해 원래 땅굴로 서둘러 전진하기 시
작했다.
이 길은 에무르도 안다. 그때 협상이 끝나고 에무르가 물었다. 땅 밑으로 탈출한 것 같은데
그것이 뭐냐고. 땅굴이 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척 궁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친절히 알려 주었다. 그랬더니 대단히 관심을 보이며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 땅굴의 입구와 그곳이 어디까지 연결되는지도 물어보았다. 꼬치꼬치 캐묻는 에무르가
귀찮았지만 막 동맹을 맺은 터라 억지로라도 친절하게 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연결되는
곳은 많다고.
에무르와 만났던 일이 벌써 까마득하게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런 잡생각을 하며 조금 더 들어가니 드디어 목적지인 황후궁 뒤에 위치한 헛간 아래에
도착했다. 입구를 막아 놓은 나무판을 조심스럽게 밀고는 천천히 그 위로 올라섰다.
아직 오지 않았는지 어두운 헛간이 으스스하니 적막했다. 그녀를 기다리며 주변을 몰래 살
피자 밖에 기사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것이 다 보였다.
황제가 출정했을 때부터 황궁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얼마나 엄격하게 황궁을 보호하는지,
모든 귀족의 출입까지 막았다. 황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될 거라는 선언이 있었다. 대
공인 자신의 출입까지 허용되지 않았다. 기가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