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04화 (104/130)

104화 참아도 너무 참았다

손에 다시 검을 쥔 왕자가 죽일 듯이 황제에게 덤벼들었다. 나이는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데 여기서 생을 마감해야 하다니. 안되긴 했어도 이런 싹은 그냥 둘 수 없다. 황제를 죽이

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황제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무섭게 짙어졌다.

스윽.

공격해 오던 왕자를 피하며 황제는 검으로 그의 배를 갈랐다.

왕자의 몸에서 피가 튀고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허공을 찢듯이 터져 나왔다. 땅 위에 털썩

주저앉은 왕자에게 다가간 황제는 다시 한번 검을 높이 쳐들었다.

이번에는 그 어떤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왕자의 목이 몸뚱이와 따로따로 땅 위

를 구를 뿐이었다.

다시 돌아온 군사들이 사방팔방 퍼져 도망치는 무리를 쫓아 응징했다. 구석구석 다 찾아내

어 한 명도 남김없이 처단했다. 조금의 틈도 보여선 안 된다.

“이자의 시체를 왕궁 밖에 일주일 동안 걸어 놓아라.”

반역을 도모할 시 어떻게 되는지 똑바로 보여 줄 것이다. 황제는 엄하게 명한 뒤, 왕궁으로

몸을 돌렸다.

***

안톤이 겨우 걸을 정도로 회복이 된 것이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폐하. 불충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무기에 누군들 당하지 않을 수 있나. 회복되었으니 되었다.

“잊어라. 자네 탓이 아니다.”

그렇게 말을 해도 안톤은 깊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안톤. 감옥에 가둔 공주를 처리해라.”

안톤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치료해 주고 목숨만은 살려 주거라.”

명을 받들고 멀어지는 안톤의 뒷모습을 보며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왕자는 처단할 명분이 확실했다. 물론 공주도 공모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하지만 이 나라

민심이라는 게 있다. 왕족을 전부 처단해 버리면 민심은 들끓게 마련이다. 너그럽게 공주

만은 살려 줬다고 공표하는 게 더 이득이었다. 이것이 그의 방식이다.

피바람이 한 차례 불고 나니 무척 피곤해졌다. 한밤중에 움직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벨리

타를 너무 오래 보지 못해서 피곤한 것이었다.

더 이상은 한계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안정이 안 된다. 오래 잘도 참았다.

칼리크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긴 복도에서 서성거렸다. 다시 돌아올 안톤을 기다리는 중

이었다.

더딘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안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바탕 난리가 났으니 이 왕궁에 기

거하는 로간 공작까지 나타났다. 칼리크는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내일 돌아오겠다.”

안톤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기에 어서 떠나시라고 재촉까지

했다. 나머지 정리는 맡아서 다 해 놓겠다고.

그 옆에서 로간 공작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으려고.

칼리크는 밖으로 나와 호랑이 신수에 올라탔다. 참아도 너무 참았다.

안톤과 기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서둘러 하늘 위로 높이 떠올랐다. 제 마음을 아는지 신수

가 최고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숨이 나왔다.

국경 지대보다 이 왕궁이 훨씬 안쪽에 위치한 까닭에 황궁까지 가려면 예전보다 두 배는

더 시간이 걸린다. 거의 하루 종일 가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래도 갈 거다. 더는 못 참겠다.

몸도 마음도 지쳐 버린 칼리크를 위해 호랑이 신수가 메시지를 전해 왔다. 제 등 위에서 누

워 좀 쉬라고. 역시 신수다. 고맙다.

칼리크는 넓고 푹신한 신수의 등 위에서 편안히 엎드렸다. 그런데 신기했다. 빠르게 날고

있는데도 큰 흔들림 없이 아늑했다. 마치 침대에 누운 것처럼.

기가 막힌 재주다.

신수가 얼마나 편안히 황궁으로 모셨는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사실 유클로에 있으면서

단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계속 고생하며 잠도 잘 이루지 못했다. 하루라도 더 앞당겨

보기 위해 너무 고군분투했나 보다.

그렇게 칼리크는 몇 시간 동안 하늘 위에서 오래간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칼리크는 앞에 차려진 근사한 식사를 아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밤새 날아 겨우 오후가 되어서야 카르탄 황궁에 도착하였으니 온종일 쫄쫄 굶은

셈이었다.

사실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벨리타를 다시 만나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알게 되었다.

조금 전.

아직은 황궁에 신수는 알리지 않기로 했기에 여전히 멀리 떨어진 황궁 숲에 몰래 내려온

뒤, 칼리크는 혼자 걸어 나왔다.

이런 황제의 모습을 처음 보는 기사들은 놀라긴 했어도 전쟁에 승리도 했겠다 먼 거리를

달려왔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더이상 목격하는 사람을 줄이는 게 이롭다. 지난번 신수를 본 기사들은 입단속을 잘 시켰

을 것이다. 그리고 데인이 알아서 황궁 출입을 엄격히 금하고 있어서 밖으로 소문이 새어

나갈 위험도 없다.

아직은 이르다. 다 생각이 있어서 황도에는 호랑이 신수에 대해 알리는 걸 잠시 미루고 있

다. 호랑이 신수를 직접 본 대군은 이제 국경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계속 행군을 하고 있

지만, 황도와 각 지역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걸린다.

문으로 당당히 들어서는 황제를 보고 황후 방에 있던 유모와 핀핀은 놀라긴 했어도 표정

을 가다듬고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

“승리하고 돌아오라 해서 지금 왔소.”

문을 닫기 전 폐하가 마마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유모는 괜히 입술을 삐죽거렸다. 승리

한 지가 언젠데 이제 와 보나. 일찍도 오시네. 노력을 하려면 제대로 하셔야지…. 뭐라 뭐라

속으로 꿍얼거리며 물러났다.

전에 왔을 때보다 더 당당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칼리크를 벨리타는 조용히 응시했다.

“잘하셨어요.”

이것만은 확실해졌다. 황제의 신수가 발현되고 전쟁에 승리까지 하였으니 원작과는 완전

히 달라졌다는 것. 이제부터는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는 건 지금부터 어

떤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그녀조차도.

어찌 되었건 그가 대활약을 해 전쟁에 승리한 것은 사실이다.

인사말을 건네는 벨리타의 모습을 보며 칼리크는 살짝 한쪽 눈을 찡그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축하 인사를 하는 듯이 느껴졌다. 대신들이 하는 것처럼. 그렇다고 뭘 기대한 건 아니

었다. 그러나 막상 그런 벨리타를 보고 있자니 쓸쓸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아니다. 그녀는

서쪽 탑 지하에서 이보다 더한 쓸쓸함과 배신감을 맛보았으리라.

“모두 당신 덕분이오.”

경건한 눈빛으로 그 역시 그녀에게 감사하며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벨리타와 마주 보고 앉아 또다시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듯이 바라보았다.

비록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 벨리타의 옆모습이었지만 하염없이 보기만 했다.

창밖으로 하늘 외엔 뭐가 보이지도 않는데 계속 그쪽만 쳐다보고 있는 벨리타에게서 시선

을 떼지 않았다. 혹,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었지만 보고 싶은

얼굴을 보고 있느라 그런 말은 꺼낼 수 없었다. 혹 자신이 불편하게 하는 건 아니냐고 물었

을 때, 그렇다고 하며 또 바로 가라고 할까 봐 더 묻지 못했다.

“예산도 많이 남았다던데 드레스 주문은 들어갔소?”

얼마 전 몇 상자나 되는 드레스를 기부해서 새 드레스가 필요할 텐데 전시 중이라 안 좋은

소문이 날까 봐 새로운 드레스 제작을 들어가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것 같아 물어

보았다. 원하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맘껏 입기를 원했다. 지금은 몇 벌 없을 텐데.

이 방 바로 아래 창고로 쓰는 넓은 장소에 벨리타의 예전 드레스들이 잔뜩 걸려 있다는 걸

들어 알고 있었다. 드레스 룸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나는 드레스를 그쪽에 쌓아 두고 있을

정도로 욕심이 남달랐던 벨리타다. 지금은 성격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여자들은 새 옷

을 입으면 기분이 좀 좋아지는 듯해 그래서 권했다.

“아직도 많아요.”

단칼에 거절한다.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지, 자신이 거론해서 거절하는 건지 알 수가 없

었다.

“기분 전화도 할 겸, 원하는 만큼 주문해 보시오.”

갑자기 벨리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새로 옷을 장만하는 일은 여인들이라면 다 좋아하는 일

아니었나. 벨리타는 아닌 듯이 보였다.

“지금 제가 입고 있는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새로 해 입으라는 소리인가요?”

이런. 그 말이 이런 뜻이 되는 건가?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말을 잘못한 것 같다. 그녀가 뭘 입어도 다 빛이 나고 아름다웠

다. 설사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고… 아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자. 자신의 심장에 좋지 않

다.

칼리크는 벨리타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 그런 소리가 아니라고 해명하기 바빴다. 괜히

그런 말을 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녀를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한 것이 오히려 오해

만 사고 말았다. 다행히 벨리타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꼬르륵.

그가 듣기에도 엄청나게 큰 소리가 갑자기 그의 배에서 흘러나왔다. 벨리타 앞에서 긴장을

했더니 이런 소리가 터진 모양이다. 그제야 배고픔을 느꼈다. 식사도 못 하고 날아왔다.

똑똑.

그때를 맞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유모와 시녀들이 쟁반을 하나씩 들고서 들어왔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어떻게 알고 이런 준비를 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먼 길 오시면서 드시지도 못하셨을 것 같아 준비해 보았습니다.”

유모의 말에 황제는 고마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앞에 놓인 테이블에 차려 놓은 음식

들을 보며 더한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함의 시선을 다시 한번 유모와 시녀들에게 던진 뒤, 칼리크는 먹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렇게 배가 고팠었다는 걸 음식을 먹으며 깨달았다.

허겁지겁 맛있게 드시는 폐하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온 유모는 다른 시녀들에게 그만 돌아

가 쉬라고 했다. 오늘도 리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폐하가 여기 다녀가신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걸 어떻게 교육시키나….

유모는 잠시 그 생각을 밀어 놓고 다시 마마님에게 집중했다.

마마님 옆방에서 유모와 둘만 남은 핀핀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폐하를 싫어하는 것 같은데도 할 건 다 하는 유모였다. 이 먼 길 오셨는데 식사는 하셨겠냐

며 처음 방을 나오자마자 음식 준비를 서둘러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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