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이러면 말이 다르지
밤이 되자 칼리크는 커다란 방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원래 잠귀도 밝은데 신수가 안에
버티고 있어서 그런지 오감이 더 발달되어 있었다.
여인이다.
방 안으로 한 발 들어온 인기척에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살금살금 침대로 접근하는 발소리에 집중하며 황제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바로 오늘 이렇게 움직였다. 내일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여겼는데, 급
하기도 했나 보다. 뭐 그런다고 큰일 날 건 없다. 끝까지 반항하는 세력을 치기 위한 이 마
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는데 칼리크는 일찍 끝나 다행이라고 여겼다. 겨우 미인계인가?
쉬익.
신검이 움직였다.
신검이 가만있을 리 없지.
꺄아악!
유리창이 깨질 정도로 새된 비명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칼리크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쪽 팔에 머리를 괴며 느긋하게 모로 누웠다.
공주네. 거슬렸던 공주 중 첫째. 여전히 시끄러웠다.
익숙한 옷차림.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늘 보아 온 여인의 옷차림.
이번엔 좀 심한 편이었다. 거의 입은 것이 없는 정도로 보인다. 상반신은 거의 다 내놓다시
피 한 그녀의 모습에 그의 눈동자는 더욱더 싸늘하게 날카로워질 뿐이었다. 어딜 감히.
“폐…하….”
정확히 신검이 공주의 벌거벗은 가슴 사이를 바짝 닿도록 겨누고 있었고 그녀의 입에서
다 죽어 가는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보고 있는 걸 알아차린 공주는 이 상황에서도 겁대가리 없이 미친 짓을 하려 했다. 한
발 더 움직이려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으악!
신검이 비킬 리가 없다.
가슴께가 베여 피가 주르륵 흘러내림과 동시에 공주의 비명이 또다시 시끄럽게 터져 나왔
다.
미련하긴. 뒤로 물러나면 될걸. 굳이 앞으로 나서다 저렇게 다치기나 하고.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텐데. 이 공주는 아직 신검이나 신수, 그 어떤
정보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직접 보질 못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폐쇄적인 유클로 왕국
에 대해 밖에서도 잘 알지 못했지만, 이 안에서도 밖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답답한 나라
다.
“또 한 번 움직이면 그땐 목이 달아날 거다.”
더러 겪었던 장면이라 그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입도 벙긋 못 하고 벌벌 떠는 공주는 피를 흘리며 아래로 조금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둥둥 떠 있는 신검이 저를 벨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저렇게 떠 있는 신검을 처음 보았으니 두려울 만하지. 아니다. 자신이 피를 흘리니 두려운
거겠지.
황제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공주에게 다가갔다. 공포에 질린 눈
동자가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점점 가까이 가자 신검이 웅웅 울기 시작했
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짙어졌다.
이러면 말이 다르지.
그는 주저앉은 공주에게로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는 손이라도 대면 금방이라도 쭉 찢어질
하늘거리는 드레스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더듬었다. 공주의 허벅지를.
공주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지만 이건 황제가 속살을 더듬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
었다.
미인계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 이내 드레스 밖으로 나온 그의 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
다. 손가락만 한 아주 작은 단검이었다. 흠….
황제는 단검의 칼끝을 공주에게 들이댔다.
아악. 아악.
신검이 공격했을 때보다 더 난리를 친다. 신검보다 이 단검이 더 무섭다?
이미 짐작도 했지만, 답은 하나다.
독!
미인계가 아니라 독살 작전이다.
신검을 그대로 둔 채, 칼리크는 급히 일어나 커다란 방문을 열어젖혔다. 문밖에 안톤과 기
사들이 지키고 있을 텐데 이 여자가 여길 들어온 것이 처음부터 의아하던 참이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안톤을 뚫고 들어올 수 없었을 텐데.
역시나.
신수 덕분에 후각이 더 발달된 그에게만 맡아지는 미세한 냄새.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안톤
과 복도에 누워 있는 기사들. 이 나라엔 이런 것도 있다니.
칼리크는 복도에 달린 커다란 줄을 잡아당겼다. 커다란 종소리가 왕궁 전체에 울려 퍼지자
아래층에서 밀려오는 기사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창문부터 열어라.”
그의 명령에 발 빠르게 기사들이 움직였다. 지체하면 이들도 이 냄새에 또 쓰러지는 꼴만
생긴다. 1층부터 2층까지 모든 창을 열고 공기를 순환시키는 동안 칼리크는 안톤을 챙겼
다.
이름을 부르며 뺨을 여러 번 두들겨 그의 정신이 돌아오게 했다. 미약한 소리를 내는 안톤
의 두 눈이 부르르 떨렸다. 이젠 됐다. 생명까지 앗아 가는 냄새일지 몰라 걱정했다.
“감히.”
조용히 신호를 보내자 신검이 공주의 가슴께에서 비켜섰다. 하지만 움직일 수 있는 공간만
내주었지 멀리 떨어지진 않고 그대로 공주를 겨냥하고 있었다.
“공주를 가두어라.”
한 무리의 기사들이 들어가 거의 실신 직전에 있는, 피 흘리는 공주를 끌고 나갔다. 그는
다른 기사들에게 연이어 명령했다.
“둘째 공주를 잡아 와라.”
바로 공주궁으로 달려가는 기사들을 보며 칼리크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붉은빛이 돌았다.
내 목숨을 노리다니.
절대 혼자서 역모를 꾀한 것이 아니다.
잠시 후, 밖으로 달려 나갔던 기사들이 부리나케 뭔가를 들고 황제에게 뛰어왔다.
“밧줄을 타고 창밖으로 도망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석에….”
기사가 건네준 물건을 손에 쥐며 칼리크의 눈동자가 더욱더 붉게 번져 갔다. 틀림없는 둘
째 공주의 것이다.
이렇게 영악하다니.
“횃불로 신호를 보내라.”
그 말만 던지고 칼리크는 바로 기사단을 이끌고 왕궁 밖으로 뛰어나갔다. 깜깜한 어둠에
싸여 있는 왕궁 주변에서 사라진 공주인지 뭔지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어느 쪽으로 도망쳤
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신수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갑자기 튀어나온 호랑이 신수를 보고 따라온 기사들이 또다시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칼리
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잡아야 한다.
왕궁 탑 꼭대기에 횃불이 점화되어 불꽃이 올라갔고 호랑이 신수도 하늘 위로 날아올라
두리번거리며 신중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때를 맞춰 저 멀리 언덕 아래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려오며 새까맣게 군사들이 다시 왕궁
쪽으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앞서 수만의 기마병들이 먼저 달려오고 있었다. 언덕 아래 대기하고 있던 카르탄 군사들이
작전 지시대로 움직였다. 왕궁에 있던 사람들과 주변 귀족들은 카르탄 군이 돌아간 줄로만
알고 있겠지. 이것이마지막 관문이었던 것이다.
왕궁에 군사들이 소수만 남고 돌아간 줄 알면 그 기회를 틈타 마지막 반란을 일으킬 공산
이 크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어 그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크르릉.
호랑이 신수가 조금 떨어진 서쪽을 향해 소리를 냈다. 저기다!
신수의 몸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주변이 환하게 밝혀지자 그 아래 지상이 훤히 다 보
였다. 신수가 지상으로 빠르게 내려가는 걸 포착하자마자 그 방향으로 남아 있는 모든 기
사단을 이끌고 말을 달렸다. 얼마 가지도 못했을 터. 이 나라는 도적 떼를 비롯해 용병이
많다는 걸 파악했다. 그 용병들을 모아 다른 귀족과 이 공주가 작당 모의를 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첫째 공주가 황제를 죽이면 왕궁 밖에 운집해 있던 귀족과 용병들이 왕궁으로 쳐들어올
계획이었을 거다. 아무리 폐쇄되어 있던 나라라고 해도 이런 계획이 성공할 거라고 여기다
니. 어리석다. 황제를 뭘로 보고.
첫째 공주가 실패한 걸 알고는 바로 도망친 둘째가 꽤 많은 용병들과 갈대숲에 무리 지어
있는 것이 보였다. 못 찾을 줄 알았겠지. 이들 보호를 받으며 왕궁으로 쳐들어오려 했겠지.
어림없다.
호랑이 신수의 몸이 온통 환하게 빛을 내고 있는 덕분에 그 주변이 불을 밝힌 듯 파악하기
쉬웠다. 생각한 것보다 용병들의 수가 적은 것도 확인했다.
상상도 못 한 호랑이 신수의 모습에 혼이 빠져 우왕좌왕하는 용병들을 기사단이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뭔가 틀어진 걸 안 용병들은 반 이상이 도망치기 바빴고 그나마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자들은 혼란스러운 상태로 칼을 휘두르니 기사들을 당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언덕을 넘어오는 카르탄 군의 함성에 그들은 이미 엉망진창 무너지고 있었다. 앞에
는 기사단, 뒤에는 카르탄 군대에 갇혀 용병들은 쓰러져 갔다. 허리까지 오는 갈대숲이 피
가 튀어 붉게 물들어 갔고 황제의 눈동자 역시 온통 붉은색으로 번쩍였다.
황제는 그들에게 나머지를 맡기고 호랑이 신수에게 다가갔다. 끙끙 앓는 소리가 먼저 들려
왔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호랑이 발밑에 도망간 둘째가 짓눌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신수는 직접 살생을 하지 않는다. 그 존재만으로도 강력한 무기이고 보호막이다.
신수의 커다란 앞발에 등을 사정없이 눌린 채 끙끙 앓던 도망자가 황제를 보더니 악을 써
댔다.
“이런 거나 믿고 폼이나 잡았겠지. 너 혼자는 뭐 별거 있어?”
별거 있는지는 나중에 보면 알게 되겠지. 그런데… 역시 맞았다. 의심하던 것이 맞았다.
“지금 그 꼴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왕자.”
왕자였다. 공주가 아니었다. 아까 기사가 전해 준 물건은 둘째 공주가 입었던 드레스와 긴
머리의 가발이었다. 일이 잘 안 될 성싶으니 옷을 급히 갈아입고 도주했을 것이다. 그리 추
정되었지만, 확실히 알아야 했다. 그런데 맞았다.
감쪽같이 여장을 하다니. 호리호리한 몸이라 가능했을지도. 그래서 두 공주가 나란히 처음
부터 화장을 진하게 했던 거고.
신수에게 신호를 하자 왕자를 놓아주고 공중에 떠서 등불처럼 주변을 밝히는 역할을 계속
했다.
온몸을 가격당한 듯 몸을 펴며 인상을 쓰는 왕자에게서 자신의 핏줄만은 살리려고 한, 죽
은 왕의 절제된 위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죽은 왕만 불쌍해졌다.
이건 누구 머리였을까? 왕자를 공주로 둔갑시킨 건.
유클로 왕궁에 공주가 몇 명인지, 왕자가 있는지 없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공주 둘만
있다는 것도 유클로 왕궁으로 들어와서 알게 된 것이고. 그러니 이런 계획도 세울 수 있었
겠지. 대단한 변장술이다.
“유클로의 원수. 나라는 잃었어도 내 너는 꼭 죽이고 말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