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기억이 참 얄궂구나
“어리게 보이는데도 사람을 끄는 구석이 있구나.”
자신의 칭찬을 듣고 당황한 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은근히 군침이 돌았
다.
“그럼 그날 다시 만나자.”
“네.”
나갈 때도 신중한 모습으로 나가는 여인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용하기 딱 좋은 인물을
골랐다. 이쪽으로 탁월한 재능이 있음을 감사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시녀들이 황도에 외출했다 돌아오는 날이었다.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 시녀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이번 전쟁에 승리한 얘기들뿐이었어요.”
“엄청나게 빠른 승전보였지요.”
“황도가 온통 들썩거리더군요.”
황도 사람들이 처음에는 다들 놀라며 믿기 어려워했다. 이렇게 빨리? 그것도 가장 난공불
락이었던 유클로 왕국을 상대로? 에이. 믿을 말을 해라.
황궁에서부터 이 소식이 퍼지자 다들 믿지 않으려 했다. 거짓 정보라 여겼다. 하지만 황궁
에서 정식 발표가 나오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환호성을 질렀다. 그냥 승리도 아닌 대승이
었다 한다. 대부분 전쟁에 출정했다 하면 1년씩은 걸렸는데 이번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희
소식이 빨리 왔다.
황도가 들썩거렸다. 군사로 들어간 자들은 누군가의 아들이고 아버지였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이 대륙에 전쟁은 없을 거라는 기대가 높아졌다. 대륙을 통일했으니 바다 밖에서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 평화가 지속될 거라는 희망이 팽배했다. 군대가 돌아오면 더 확실해
질 것이다.
“이번에 나가서 알았어요. 황후마마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는 걸요.”
“나도 그래요. 게다가 지난번 엄청난 양의 드레스를 기부한 것이 널리 퍼졌더군요.”
“남자에 대한 흉문이 조용해지니 미담들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아직 안 알려진 것들도 많아요.”
지금 시녀들에게 제일 좋은 건 황후마마의 위상이 높아지는 바람에 자신들도 더 귀한 대
접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황후의 시녀라는 걸 가문에서도 창피해할 정도였고
자신들을 불쌍히 여겼는데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심지어 황후마마 시녀가 되었다고 업신여기던 백작가 영애가 저한테 슬쩍 묻더군요.”
“뭐라고요?”
“혹시 사람 하나 더 필요하지 않냐고요.”
모두가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도 한참 동안 더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
벨리타는 오래간만에 온실을 찾았다. 핀핀이 조용히 그녀의 옆자리를 지켰다. 물소리가 경
쾌한 작은 분수를 지나 화려하게 핀 꽃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무들이 울
창해져 숲처럼 느껴졌다.
벨리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푸른 잎의 정기가 맡아지는 것 같았다. 심신이 맑아지고 몸
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여긴 항상 오면 기분이 좋아져요.”
벨리타도 핀핀의 말에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고즈넉하니 산림욕 하는 기분에 뭔가 위로
받는 느낌도 들었다.
달빛이 비치던 때와는 달리 이렇게 환한 햇살을 받고 있는 풍경도 새로웠다.
“저 비밀의 방은 안 들어가 보세요?”
벨리타가 비밀의 방 앞을 그냥 지나치자 핀핀이 가볍게 물어 왔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녀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쳤다.
핀핀은 제가 알고 있던 방이 아니라 완전히 바뀌었다고 들은 비밀의 방을 조금은 구경하
고 싶었다. 마마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조용히 걸어가시는
마마님 곁으로 다가간 핀핀은 제가 뭘 실수했나 싶어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마마님의 표
정이 언짢아 보이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이 꽃은 새를 닮았어요.”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핀핀은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꽃을 보며 그렇게 속삭
였다. 마마님의 발걸음이 잠시, 아주 잠시 멈춘 듯싶었는데 이내 가던 길을 가신다. 이제는
뭔가가 무거워 보이는 표정이셨다.
핀핀은 자꾸 마마님의 뭔가를 제가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입을 다물어야겠다. 마마님을
즐겁게 해 드리기는커녕 계속 가라앉게 만드는 것 같았다. 조심해야지.
비밀의 방을 그냥 지나치신 마마님이 어느 나무 아래에서 발을 멈추셨다. 궁금한 마음에
올려다보니 무척 키가 큰 나무였다. 나무 꼭대기에만 기다란 잎사귀가 있고 그 아래 둥근
열매가 달려 있는 나무였다. 그 주변에도 몇 그루 더 있었다.
이렇게 키가 큰 나무들은 이곳에 너무 많았고 별다른 특징이 없는 나무여서 마마님이 그
냥 잠시 멈추신 거라 여겼다.
그런데 머물러 계시는 시간이 길어졌다. 잠시가 아니라 오래 그 앞에 서 계셨다. 그냥 멍하
니 그 나무를 올려다보고만 계셨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라는 것이다. 핀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해했지만 마마님의 분위기상 왜
그러시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조용히 있기로 마음먹었기에 더 입을 다물고 있었
다.
“잊고 싶은 기억은 왜 이리 안 잊혀지는지….”
넋두리 같은 마마님의 목소리가 정확히 귀에 들어왔다. 다시 들여다본 마마님의 표정이 이
번에는 슬퍼 보였다. 위로라도 해 드리고 싶었다.
“너무 힘들게 잊으려 하지 마세요. 잊혀지지 않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래요.”
그 말에 마마님이 저를 돌아보셨다. 그 맑고 눈부신 푸른색 눈동자가 힘이 하나도 없어 보
였다.
“핀핀. 기억이 참 얄궂구나.”
“네?”
“잊고 싶은 건 잊혀지지 않고 잊으면 안 되는 건 잊혀지고.”
마마님의 말씀이 너무 어려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마님이 힘내시게 무슨 말을 해 드
리면 좋을까….
“저는요…. 예전 기억을 잃으신 지금의 마마님이 더 좋아요.”
마마님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아! 또 실수했다.
“불충을 저질렀습니다. 마마. 용서해 주세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오늘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상한 말만 계속한다. 이
런 적이 없었는데.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히며 마마님에게 사죄하고 또 사죄했다.
“그만해도 된다. 그게 뭐 불충이라고.”
온화한 목소리가 들리자 핀핀은 고개를 들었다. 화나지 않으셨나 보다.
“핀핀. 이리 와 봐.”
얼른 옆으로 후다닥 다가갔다. 그러자 마마님이 제 팔에 슬며시 팔을 넣으시며 팔짱을 끼
셨다. 이번엔 핀핀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렸을 때 이후로 이렇게 친밀하게 팔짱을 껴 본 적
이 없다. 이 고귀하고 고귀하신 마마님이 저에게 팔짱을 끼시다니. 몸 둘 바를 몰라 쩔쩔매
기만 했다.
“지금의 나를 좋아해 줘서 너무 고맙다.”
진심이었다. 지금 그 말이 가장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예전과 전혀 다른 벨리타로 살고 있
는 지금, 이런 말이 듣고 싶었나 보다.
핀핀은 제 생각과는 달리 마마님이 미소를 지으며 좋아하시는 것 같아 용기를 내어 더 이
어 나갔다. 정말 드리고 싶은 말씀이기도 했다.
“달라지신 모습에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해요. 그리고 이렇게 저도 가까이 불러 주셨잖아
요. 제가 더 감사드려야 해요. 언제나 마마님을 위해 움직이겠습니다.”
마마님이 위험에 처하지 않게, 안전하게 모실게요.
벨리타는 한 손을 올려 핀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
게 할까.
“그래. 나도 핀핀이 곁에 있으니 참 좋구나.”
다행이었다. 마마님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지셨다.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시면 좋겠는데…
그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었다.
***
거슬렸다.
두 공주가 걸핏하면 눈에 알짱거려 칼리크는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항상 그들 앞에
서는 무서운 표정으로 있었는데도 겁을 집어먹지도 않는다. 공주로서 남의 눈치를 보고 살
지 않아서 그런지 맘대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안톤. 두 공주를 방에 감금시켰으면 한다.”
안톤은 명을 받들어 고개를 숙이는데 옆에 있던 로간 공작이 끼어들었다.
“그건 안 됩니다. 아직 복속국 절차를 밟는 중이고 이곳 장로회에서 들고일어날 겁니다. 그
렇게 되면 시간이 더 걸리게 되는데 괜찮으십니까?”
안 되지. 여기서 시간이 더 걸리면 어쩌라고.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는 게 목적이다. 벨리타와 떨어져 허구한 날 법을 바꾸고, 승인하고,
장로회 중 카르탄 제국에 고개를 숙인 귀족들을 소집해 납득시키는 일이 여간 성가시고
지루할 수가 없었다.
말이 납득시키는 것이지 통보를 하고 그들이 사인을 하는 일이다. 거의 일방적이지만 형식
상 절차를 밟아 주는 것이다.
귀족들한테는 불합리한 법 개정일지 몰라도 백성들에겐 더 나은 삶을 위한 법이다. 일단
세금부터 매긴다. 그 세금을 중앙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영지의 백성들에게 풀어 버린
다. 그리고 영지마다 카르탄 대신들과 기사단들이 상주하며 세금을 명목으로 백성들을 쥐
어짜 내는 일이 없도록 감시한다.
사실 이들에게 억지로 세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부당하게 자기 영지 백성들에게
뜯어낸 세금을 다시 돌려주는 셈이다.
어느 나라건 복속국이 되었을 때 그 백성들 입에서 원래 제 나라보다 카르탄 제국의 나라
가 되니 더 살기 편해졌다는 말이 나오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머무는 공주궁 외엔 이동을 금한다.”
이번엔 로간 공작도 수긍했다. 그도 두 공주가 귀찮긴 했던 모양이다.
“내일, 왕궁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을 모두 돌려보내기로 한 것을 공표하라.”
이미 군대를 돌려보내고도 아직 왕도에는 황제를 위해 10만이 넘는 군사들이 배치되어 있
었다. 그들도 돌려보낸다고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게 할 목적이었다.
안톤이 명을 받들고 밖으로 향했다. 아직 중요한 관문이 남아 있다.
칼리크는 다시 지긋지긋한 문서에 눈을 돌렸다. 옆에선 만회하려는 듯 로간 공작이 입을
꼭 다물고 더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
문이 열렸다. 미미한 공기의 흐름까지 포착하는 황제였다.
정오쯤, 왕궁과 왕도에 있던 군사들 대부분이 행군하며 왕도를 빠져 나갔다. 왕도라고 해
봤자 손바닥만 하게 작았고 낮은 언덕이 앞에 놓여 있어 그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행군 행렬이 언덕 아래로 사라지는 것까지 왕궁 탑에 올라 모두 지켜보고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