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101화 (101/130)

101화 스스로 지키고 싶어요

“폐하… 의원을… 제발….”

“이곳엔 없지.”

이제는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공작은 자리에 도로 주저앉았다. 얼굴만 보면 거의 죽어 가

는 표정이었다.

“속이 뜨끈하고.”

뜨거운 차를 마셨으니 당연하지만 칼리크가 그리 말하자 공작은 더운지 셔츠의 윗단추를

풀며 심호흡을 했다.

“어지럽고 숨이 가빠 오고.”

지금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것 역시 당연한 현상이다. 입으로 숨을 몰아쉬며 겁먹은 얼굴

인데 누구라도 알아맞힐 것이다.

“식은땀까지 흐르지 않소?”

속이 뜨거워졌으니 땀도 나기 마련. 지금 저 상태에서 안 흘리는 게 이상하지.

“폐하… 너무 어지럽고….”

나이도 젊지 않은데 저렇게 공기를 많이 입으로 들이마시니 안 어지러울 수가 있나. 놀려

먹기도 참 쉬운 사람이었다. 악의는 없고 열의만 가득한 공작이라 그리 싫어하지는 않는

다. 가끔 이렇게 귀찮은 일을 벌여서 그렇지.

칼리크는 이쯤 하면 그가 알아들었으리라 여겼다. 그만 구해 줘야겠다.

안톤이 가져다준 시원한 물잔을 손에 들고 공작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걸 마시시오. 해독제요.”

공작은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한 채 두 손으로 물잔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

다.

“어떻소? 이제 속이 뜨거운 건 점점 가시지 않소?”

“네. 네. 오히려 차가워집니다.”

지금 얼이 빠져 있어 이런 대화도 가능하리라. 차가운 물을 마셨으니 당연한 건데도 공작

은 정말 해독제를 먹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황제의 말이라면 다 믿어 버리는 충신이라

이런 일도 통하는 거였다.

칼리크는 슬며시 공작의 턱을 올려 입을 닫아 주었다.

“이제 코로만 숨을 쉬어 보시오.”

그것만 해도 덜 어지럽게 된다. 천천히 코로 숨을 쉬게 하니 점점 안정되어 가는 공작이었

다.

“어지러운 것도… 없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이제 알았소? 아직 이 나라 사람들은 우리 쪽으로 개화하지 않은 상태요. 그러니 너무 믿

지 마시오. 말도 섞지 말고.”

뒤에 말을 더 강조해서 주입시켰다. 공작은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 날 뻔했다고 중얼거리며 칼리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도 중얼

거렸다.

칼리크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거짓이지만 이 정도는 해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로간 공작. 곧 거짓말임을 알게 되겠지만 그때 그리 서운해하지 마시오.

그만 돌아가 쉬라고 했더니 큰 배려를 받은 것처럼 계속 허리를 굽혔다. 이러니 미워할 수

없는 공작이었다. 사실, 하도 말이 많아 좀 시끄러워 내보내는 것이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좀 조용히 있고 싶었다. 로간 공작도 제 방에서 쉴 수 있으니 좋은 일이고.

로간 공작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 칼리크였다.

***

에단은 열 명 남짓 되는 여인들이 남자들처럼 바지를 입고 움직이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드문 광경이라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였는데 보다 보니 익숙해졌다. 저 안에 레이나도 보였

다. 아주 기운차 보였다. 다행이었다.

“우리에게도 검술을 가르쳐 주세요.”

며칠 전, 제게 찾아와 당돌하게 부탁을 하는 레이나의 말에 잠시 눈을 껌뻑거렸다.

“왜?”

왜 갑자기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는 검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도 스스로 지키고 싶어요.”

에단은 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경험이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 레이나뿐만 아니라 다른 몇

몇도 심한 꼴을 당하다 도망쳐 이곳에 정착한 경우가 많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대략적인

상황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레이나가 이렇게 구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여긴 다른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 모여든 곳이다. 최소한 여기서 억울한 일은 당하지 말아

야 한다.

강해졌다고 여겨졌다. 스스로 방어할 힘을 갖기를 원하는 여자였다. 에단에게는 그런 생각

이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확고한 의지가 있다면 도와주는 것이 맞다.

“힘들 거요.”

“알아요.”

“중간에 포기할 거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마시오.”

“그럴 거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어요.”

많이 달라졌다. 저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눈동자도 맑게 반짝였다. 강한 의지를 보이는 목소리였지만 참으로 부드러운

목소리라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자칼단에서 검술에 능한, 그리고 잘 가르쳐 줄 만한 동지를 붙여 주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모인 여인들의 숫자가 많았다.

에단을 미소 짓게 했던 건, 그들이 하루 이틀 하다 힘들어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레이

나가 장담한 대로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훈련을 이어 나갔다는 점이다. 훈련이 끝나면

여기저기 엄청나게 쑤시고 아플 텐데도 단 한 명도 게을리하지 않고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이어 나갔다.

마음에 들었다. 여자라도 한다고 했으면 해야지.

푸석푸석해 보였던 머리카락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레이나에게 잠시 시선을 고정

시켰다. 남들보다 키가 좀 큰 편이라 그런지 제일 눈에 띄었다.

파오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서 목검을 하나씩 들고 훈련을 받고 있는 그녀들이 지도해

준 동지에게 고개를 숙이며 오늘 훈련을 끝냈다. 모두의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나 환하게 다들 웃고 있었다.

보기 좋았다.

이곳에서 더 많이 웃고 편안하게 지내기를 원한다. 밖에서 어떤 삶을 살았건 여기선 묻지

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여기선 평등하다. 다 똑같은 사람이다.

에단을 흩어지는 여자들을 보다가 제 앞으로 걸어오는 레이나를 기다렸다. 마침 그녀가 머

무는 파오가 에단의 뒤에 위치해 있었다.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다.

“수고했소.”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땀으로 젖은 얼굴로 공손히 인사를 하는 레이나에게서 우아함이 풍겨 나왔다. 바지를 입고

있는데도 말이다. 여자가 바지를 입고 있는 건 보기 드문데 그 누구보다도 품위가 있어 보

였다.

“힘들지는 않소?”

“힘들어도 즐겁습니다.”

에단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르자 에단은 또다시 눈을

껌벅거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아. 이 모임 이름을 지었다고 하던데.”

레이나가 말없이 그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에단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다음을 기다리

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레이나는 입을 열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음… 알려 줄 수 있소?”

지금까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자신에게 말을 해 주지 않는

레이나 때문에 지금 알고 싶어졌다.

“나중에요.”

레이나는 그 말만 던지고 그를 스치듯이 지나쳐 자신의 파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어라? 궁금증만 자아내고 사라지는 건 무슨 예의인지.

우리처럼 자칼단, 뭐 이렇게 말해 주면 끝 아닌가? 나중이라면 언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궁금해질 뿐이었다. 이거야 원.

에단은 자신이 이러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뭐…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니 자연히 알게 되

겠지. 다시 툭 밀어 버렸다. 이래야 나다.

에단은 아무튼 다시 파오로 돌아가며 거대한 벽처럼 절벽 끝에 빙 둘러 서 있는 나무 보호

벽을 둘러보았다. 자기 키보다 세 배도 더 넘는, 높게 세운 벽들을 힘주어 흔들어도 보고

간밤에 온 폭우로 지지대가 파묻히지는 않았는지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

시녀들이 황궁 밖을 나가는 날, 같이 나간 여인 한 명이 바삐 걸어가기 시작했다. 황궁 출

입이 여전히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지만, 시녀들은 황후의 허가 아래 외출을 나갈 수 있

었다.

바삐 달린 여인은 상대를 만나기로 한 비밀 장소에 도착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

펴보다 허름한 농가 안으로 들어갔다.

“제대로 잘 찾아왔구나.”

“찾기 쉬웠어요.”

쿠로는 순진해 보이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속여 먹기 쉬운 성격이라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여인은 이 쿠로 대공님을 이미 여러 번 뵈었기에 믿고 만나러 나왔다. 황후마마 가까이서

대공님을 볼 기회가 더러 있었다.

벌을 받아 내쳐지기 전, 황후마마의 총애를 받았을 때 대공님과 몇 번 인사도 나누었고 자

신을 친절하게 대해 주었기에 좋은 인상이 남았었다.

지금은 다시 복귀해서 황후궁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기사 한 명이 가족이 보낸 편지라며

봉투를 건넸을 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가족이 없는데 가족이 보낸 편지라니? 의아함에

얼른 편지를 열어보니‘위험’이라는 글자가 눈에 쏙 들어왔다.

“황후마마를 위험에서 구해 드려야 한다니요?”

마마를 모시는 사람 중에는 정치나 정세에 별 관심이 없는 이가 많다. 귀족들끼리 어떤 치

열한 경쟁을 하는지 그런 것도 거의 모른다. 이 여인도 그러했다. 다만 앞에 있는 이분이

높은 위치인 대공님이라는 것과 차기 황제감으로 거론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

다.

“지금 황궁 안에 황후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막아야 한다. 내가 은밀

히 도울 테니 네가 나의 조력자가 되거라.”

예전 대공님과 마마가 아주 돈독한 사이였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대공님을

믿을 수 있었다.

“지금 황궁 안은 누가 황후 편인지 모른다. 믿는 사람이 배신자인 경우가 많다. 아무도 믿

지 마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나만 믿고 따르거라. 우리가 황후를 구해 내야 한다.”

그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여인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넘어왔다. 이래서 아둔한 사람이 좋다.

“제가 어떻게 하면….”

“3일 후 황후궁 뒤편에 있는 헛간에서 다시 만나자. 나를 도와주면 훗날, 섭섭지 않게 후사

하마.”

여인이 별 감흥이 없어 하는 듯해 다급해진 쿠로는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네 소원 하나 들어주겠다.”

소원이라는 말에 조금 반응이 보였다. 그것 역시 크게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다행

히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기특하구나. 황후가 그리 내쳤는데도 원망 하나 없이 황후를 구하려고 나서 주니.”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시키는 대로 잘할 여인이었다. 동그란 눈에 순진한 표정이 의

외로 쿠로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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