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간도 크다
예전처럼 마음에 안 든다고 불태워 버리지는 말아야겠다. 그 이후로 얼마나 아쉬웠는지.
그만한 여자를 만나지 못해 여러 여자를 찾았는데 그래도 입맛에 맞는 여자는 구하기 힘
들었다.
그런데 드디어 다시 구했다. 아주 쌈박하다. 자주 만나고 싶을 정도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아주 철철 넘친다. 그 새파란 눈동자로 교태를 부릴 때는 그냥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다
리에 힘이 풀리고 무릎이 꺾일 지경이다.
쿠로는 이 여자를 소개해 준 마담에게 두둑한 돈주머니까지 쥐여 줄 정도로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당분간 이 여자 저 여자 헤매지 않아도 되겠다.
계속 이렇게 잘만 해 준다면 자신이 황제가 되었을 때 황궁 생활을 하게 해 줄 수도 있다.
물론 황비 자리나 그런 건 줄 생각이 없지만. 그런 자리는 남들 눈도 있으니 그럴싸한 영애
를 앉혀 놓아야 한다. 한 열 명쯤 거느릴까? 그보다 더?
쿠로는 그런 생각만으로도 몸이 붕 뜨는 것만 같았다. 힘껏 뛰어오르면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머리 복잡한 일들이 많은데도 오래간만에 기분 좋은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지금 신수가
나오려 했다.
“너… 왜 전혀 안 커졌어?”
오늘 좋았던 기분이 스멀스멀 내려앉기 시작했다. 언제 보아도 그대로다. 그래도 조금씩이
라도 커지고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는 아예 변화가 없다. 더 작아진 것처럼도 느껴진다. 설
마.
한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아 노심초사했던 마음은 또 싹 까먹고 투덜거리는 쿠로였다.
이건 왜 더 이상 발전이 없어?
여자와 대단한 희열을 나누고 왔는데 이럴 리가 없다. 불타 죽은 여자보다 이번 여자가 더
만족스러웠다. 이러면 꼭 신수의 변화가 있었는데 이상하다. 별 차이가 없다. 여자와의 관
계가 마음에 든 날은 꼭 신수가 발전하기에 더 기분 좋았던 건데 이렇게 되면….
아니다. 원래 이 정도밖에 안 자라는 말인지도 모른다. 혹, 제 신수가 말이 아니라 망아지
일지도. 안 그러면 이렇게 안 자랄 수가 없다. 아쉽긴 해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어찌 되었
건 능력만 나오면 된다.
어디 한번 올라타 보아야겠다. 근사하게 달리는 훈련이 되면 황궁으로, 제국으로 날아다니
며 만인에게 보여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들 감탄하며 경외하느라 바쁠 것이다. 멋들어
지게 말 신수에 올라타 황궁으로 날아가 황제 대관식도 올리고. 생각만 해도 너무나 근사
한 모습이라 어서 빨리 말 신수에 타고 싶어졌다. 그렇게 되면 신수로서 완성되는 모습이
었다.
가만히 서 있는 말 신수에게 다가간 쿠로는 애정 어린 손길은 아니었지만, 쓱쓱 갈기를 쓰
다듬으며 올라탈 준비를 했다.
영차.
푹!
“아야야.”
올라타기가 무섭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손이 아니라
얼굴이 먼저 땅에 닿았다. 머리가 다 띵했다.
아리고 화끈한 고통이 가시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 이것을 그냥.
피하는 듯한 걸음걸이로 망아지 신수가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엉덩이를 냅다 걷어
차 버렸으면 속이 다 시원하겠다. 게다가 절뚝거리기까지 한다.
빌어먹을.
뚱뚱하지도 않은 제 몸무게 하나 감당 못 하는 신수라니. 이거 너무 허술한 거 아니야?
하필이면 제 신수가 이리도 시원치 않은 것이라니. 한심하고 또 한심했다. 언제 저걸 타고
날아 보나. 아니 타 보기나 할 수 있나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미치겠네.
“야. 날아 봐.”
그래. 지난번에는 말이 끝나자마자 신수가 날아올랐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조차도 하지 않
는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젠 무시냐? 꼴에….
차라리 지난번이 훨씬 나았다. 제대로 짜증이 났다. 쿠로는 화가 나 신수가 제 등 뒤로 들
어가거나 말거나 몸을 휙 돌려 걸어갔다. 꼴 보기도 싫다.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 마차를 타야 하는데 화가 너무 치솟아 삭이기 위해 계속 대로
변을 쿵쿵 걸어갔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가느라 마차를 몰고 있는 마부는 얼굴을 있는 대
로 찌푸렸다.
***
유클로를 종속시키기 위한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지만 영토가 넓으니 그만큼 할 일도
많았다. 여기 갇혀 일만 한 지 며칠째인지도 모르겠다. 문득문득 답답하기도 하였다. 칼리
크는 잠시 피로한 눈을 쉬게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유클로 왕궁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사실 딱히 볼만한 건 없었다. 궁정은 카르탄만 못했다. 여기저기 금박을 입혀 화려하게는
꾸며 놨는데 그의 눈에는 조잡하고 어지럽게 보였다. 그 너머 멀리에는 낮은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었고 저 멀리 하얀 사막까지 보였다. 그래. 저 사막이 골칫거리였지. 이들에게는
혜택이었지만.
내려다보고만 있어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유클로 왕국의 백성들이 얼마나 빈곤하게
사는지. 왕궁 가까이 사는 이들이 이 정도면 다른 곳은 오죽할까. 귀족들 저택만 삐죽하게
솟아 있고 나머지는 거의 흙집에 움집 수준이었다. 소수만 잘 먹고 잘사는 나라. 여기도 마
찬가지였다.
이제는 바뀔 것이다. 서로의 인력을 교환할 것이며 제일 먼저 백성들의 주거 환경부터 바
꿀 것이다. 일단 사는 집이 편안하고 굶지 않기만 해도 백성들은 환호한다.
가장 기본적인 것도 갖추지 못한 나라들을 종속시켰으니 맨 처음 그 일부터 시작할 것이
다. 그 전에 이 나라 영주들, 귀족들이 반항하지 않아야 하는데 뭐 알아서들 하겠지. 반항
할 시 죽여 달라는 소리로 알아들으면 된다.
군대도 일부 돌려보냈다. 각 나라에서 파병된 군인들과 카르탄 제국의 군사들 절반 정도는
이미 돌려보냈다. 각 나라로 돌아가려 해도 카르탄 황도 인근을 지나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 그곳에서 각 나라로 방향을 틀 것이다. 이미 그들은 국경에 거의 다다랐을 것이다.
“폐하. 세 군데만 제외하고 모든 영지의 영주들이 답을 해 왔습니다. 폐하의 신하임을 맹세
했습니다.”
며칠 전 이곳에 도착한 로간 공작이 보고해 왔다. 외교나 행정 업무가 뛰어나기에 이런 절
차를 밟을 때는 주로 그가 움직였다.
“세 군데라. 3일 안에 답을 보내라 하시오. 아니면 내가 직접 간다고.”
그때는 피바람이 불 거라는 걸 당연히 알아들을 것이다.
똑똑.
그 소리에 로간 공작이 서둘러 다가가 문을 직접 열었다.
칼리크는 누군가 들어왔어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사락사락 드레스 스치는 소리에 고
개를 돌렸다.
여자 둘. 차림새로 보아하니 이곳 유클로 왕국의 공주들이었다.
자연스레 칼리크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두 공주는 손수 쟁반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사뿐사뿐 나비가 날아오듯 화려하게 차려입
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화장이 심히 진한 것이 꽤 공들인 모습이었다.
커다란 테이블에 다과를 내려놓은 두 공주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만 나가 보시오.”
얼음보다 더 싸늘한 목소리로 칼리크가 먼저 명령했다. 두 공주가 인사를 마치고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던 중이었다.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들을 이유도 없다. 귀찮
다.
워낙 폐쇄된 나라라 정보가 거의 없었다. 본토 안으로 들어와 보니 유클로 왕국에는 공주
만 두 명 있었다. 귀찮은 일이 적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왕자들이 많으면 아무래도 살려 두긴 어렵다. 나중을 꾀할 성싶은 왕자들은 초기에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
최소한 이곳에서는 그 작업은 하지 않아도 되어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공주들이 무슨 배짱
으로 제 앞에 나타난 건지. 간도 크다. 아무리 공주라 해도 위험인물일 경우 처단을 망설이
지 않는다.
바로 울상이 되어 버린 두 공주는 로간 공작과 시선을 주고받더니 이내 시무룩한 표정으
로 몸을 돌려 다시 나갔다.
거의 쫓아낸 거나 다름없었다. 공주로 태어나 이런 대접을 받은 것도 처음일 것이다. 이젠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여전히 지금 상황을 인지 못 하는 두 여자가 딱할 뿐
이었다.
“로간 공작!”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벌써 저 공주들과 뭔가를 의논한 것이 뻔한 로간 공작을 사
납게 노려보았다.
“폐하. 차 한 잔입니다. 목도 마르고….”
황제 앞에서 말까지 돌리다니. 많이 늘었다.
“혼자 다 드시오.”
네. 하며 씩씩하게 걸어와 고급스러운 찻잔에 뜨거운 차를 우아한 손놀림으로 따르기 시작
했다. 그러더니 음미하듯 잘도 마셔 댔다.
“뭘 믿고 그리 잘도 마시나.”
아직 여긴 그리 안전한 곳이 아니다.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완전히 카르탄 제국으로 복속
이 된 후에야 물 한 잔이라도 편히 마실 수 있다.
“독이라도 있을까 봐 그러십니까? 공주님들이 뭐 하러….”
“얼마나 잘 안다고 이러지?”
아무리 골치 아픈 전쟁에 승리했다고 하나 마음까지 너그러워진 건 아니다. 승리에 취해
그냥 이래저래 넘어갈 줄 알았다면 오판이다.
“보십시오. 멀쩡하지 않습니까?”
“독은 바로 나타나지 않지. 어떤가? 혀가 마비되는 것 같지는 않은가?”
칼리크의 목소리와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로간 공작은 갑자기 침을 꿀꺽 삼키며 긴
장한 표정이 되었다. 입을 얼른 벌리고 혀를 좌우로 돌리며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
만큼 황제의 표정은 심각했고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믿게 만들었다. 그리 장담하더니 칼리
크의 한마디에 자신할 수 없었나 보다. 하지만 칼리크는 독 같은 건 들어 있지 않다는 걸
확신했다.
공주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도망칠 방법도 마련해 놓지 않고 벌건 대낮에 이런 큰일을 벌
이지 못한다. 하지만 로간 공작이 하도 괘씸해 벌을 주고 있다. 어떻게 하든 각국 공주들을
황비로 앉히려는 계획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벌이다.
지금은 더 관심 없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단 한 사람. 벨리타뿐이다. 지금도 보고 싶
어 온몸이 다 틀어지는 것 같은데, 얼마나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로간 공작은 지금
실수한 거다. 그것도 큰 실수를.
“로간 공작. 얼굴이 검어지는 것 같소.”
네에?
그 소리에 자리에서 펄쩍 뛰며 일어나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 손으로 제 얼굴을 마구 만
져 보며 시커멓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새파랗게 질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