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99화 (99/130)

99화 시간 싸움은 지금부터다

칼리크는 묵묵히 지켜봐 주었다. 독약을 마셨다. 끝까지 왕으로서 죽고 싶다는 의지였다.

저 자리에서 시작했으니 같은 곳에서 죽겠다는.

“합…니….”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입에서는 더 많은 양의 핏덩이가 뭉텅뭉텅 쏟아졌다.

“다….”

그 말을 끝으로 왕은 눈동자가 뒤집힌 채 숨을 거두었다. 벌어진 입에서는 계속해서 검붉

은 피가 멈추지 않고 떨어지고 있었다.

칼리크는 그 모습을 황제로서 그대로 지켜봐 주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다른 대신들은 숨죽이며 두 눈을 꼭 감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칼리크는 조금 떨어져 있는 자신의 기사들을 손짓으로 불렀다. 그들이 다가오자 칼리크는

커다란 목소리로 명령했다.

“여길 깨끗이 치워라. 그리고 공기까지 싹 바꿔 놓아라.”

칼리크는 유유히 몸을 돌렸다. 가장 큰 절차를 마무리했으니 세부적인 일을 처리해야 한

다. 종속국으로 선언한 뒤, 그다음 해야 할 일이 한 달은 족히 걸린다.

모든 걸 정리해야 한다. 오히려 시간 싸움은 지금부터다. 길고 긴 시간이 될 것이다.

칼리크의 마음은 또다시 황궁으로 치닫고 있었다.

***

데인 대공에게서 전쟁에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벨리타는 오늘도 변함없이 황궁 산

책을 하고는 시녀들이 권하는 대로 중정 그늘에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고 바람까지 솔솔 불어왔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사라락 휘날리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시간이 정지된 듯 평화롭게까지 느껴졌

다.

잠시 바람을 즐긴 벨리타는 유모를 따라 식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모는 안도의 한숨을 마마님 몰래 내쉬었다. 그동안 식사를 잘하시지 못해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오늘은 잘 드셨다. 입맛이 돌아오셨나 보다. 얼마나 다행인지.

군사들이 출정한 뒤로 드시는 것도 주무시는 것도 영 시원치 않으셨는데 다행히 오늘 제

대로 드시는 걸 보게 되었다. 잘되었다.

마마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맛으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시원한 홍차를 후식으로 갖다드렸

다. 그런데 언제나 반가워하며 홍차만은 잘 드셨는데 오늘은 잠시 물끄러미 홍차 잔만 바

라보고 계셨다. 왜 그러시지? 뭔가 마음에 안 드시나?

아니다. 마음에 안 들어 하는 표정이 아니라 그냥 좀 멍한 표정이셨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은.

마마님의 생각이 길어지시는 듯했다. 한참 동안 그렇게 홍차 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마마

님이 멍하니 앉아 계셨다. 유모는 그저 말없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런 마마님을 기다려

줄 뿐이었다.

***

“뭐… 뭐어?”

쿠로는 또 다른 첩자로부터 전해 들은 소식에 앉은 자리에서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설마.

“지금… 신…수라 했느냐?”

거대한 호랑이 신수가 나타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보고를 받은 쿠로는 눈이 뒤집혔다. 어

떻게 그 협곡을 통과해? 게다가 승리까지? 그것도 돌아 버리겠는데 뭐? 신수?

머릿속이 터져 나가는 듯했다.

그럴 리가 없다. 이건 필시 음모다. 승리는 어떻게 했다 치자. 그러고 나니 이 제국을 뺏기

기가 아까웠겠지. 그래서 지어낸 말이다.

예전 그놈의 신수를 보긴 보았다. 너무 놀라 그때도 쓰러질 뻔했다. 이미 성체였다. 자신의

것은 상대도 되지 않는. 하지만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예의 주시했지만 그

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설사 신수가 나왔다 한들 벌써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리 없

다. 그런데 신수를 대동하고 전쟁에 승리해? 누굴 속이려고.

성체로 완성되었다고 해도 마음대로 부릴 정도가 되려면 끊임없이 연습하고 훈련할 시간

이 필요하다. 자신도 지금 몇 년째 훈련 중이다. 혹, 다시 나타났다고 쳐도 갑자기 자유자

재로 부릴 수 있다고? 어디서 헛소리야!

그러니 이건 절대적으로 거짓말이다.

황제 이놈이 또 머리를 굴린 것이다. 이 소문이 온 제국으로 퍼지게 만들어 황제 자리를 뺏

기지 않으려는 심보다.

절대 안 믿는다.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로.

쿠로는 마음이 급해졌다. 에무르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게 능사는 아니다. 이 헛소문이 퍼

지기 전에 바로 쳐야 한다.

계획보다 며칠 먼저 친다. 먼저 황궁을 점령하고 나면 에무르가 상륙할 것이다. 이미 바다

를 넘어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황제가 승리했다는 것도 신수에 대한 헛소문도 아직 알지 못한다. 몰라야 한다. 아

울러 자신 쪽 귀족들도 전쟁에 승리한 줄 몰라야 한다.

중앙엔 승전보가 퍼진다고 해도 지방까지 알려지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혹 소식이

퍼지더라도 믿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어찌 되었건 하루라도 빨리 그들의 사병들을 움직여

야 한다.

그의 촉이 계속 더 서두르라고 자꾸 볶아 댔다. 머릿속에서 빨리 와라, 빨리 와라, 이 소리

가 최근 들어 더 자주 들려왔다. 황궁으로 빨리 오라는 신의 계시다. 그러니 어서 빨리 차

지하자.

곧 유클로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은 널리 퍼질 것이다. 그리고 황제의 신수에 대한

헛소문도. 부화뇌동하지 않게 자신을 옹호하는 귀족들을 잡아야 한다. 바로 서둘러 자신

편에 선 모든 귀족들에게 즉시 집결하라는 서신을 빛의 속도로 써 내려갔다.

[이번 전쟁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오. 게다가 전쟁에 패하면 황제의 포악한

성정으로 보아 쉽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지 않을 것으로 보이오.

어떤 헛소문을 퍼트릴지 모르오. 벌써 황도에 전쟁에 승리했다고 거짓 소문을 퍼트리고 있

소. 이게 말이 되는 일이오?

출정한 지 두 달도 안 되었소. 난공불락 유클로 왕국보다 약한 다른 왕국도 1년이나 걸렸

소. 이런 거짓말까지 하는 황제가 안쓰럽기만 하오.

황제로서 자격이 없소. 거짓말이라도 퍼트려 황제 자리를 지키려는 술수요. 신수도 없는

가짜 황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소. 그러니 황궁이 비어 있을 때 황제의 자리를 먼

저 가지고자 하오.

당연한 일을 조금 먼저 하는 것이니 지금까지 지지해 준 대로 끝까지 부탁하는 바이오. 여

러분의 협력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며 하루라도 빨리 황제가 되어 충분히 보상해 드릴 것

을 약속하오. 서둘러 최대한 빨리 약속된 장소로 준비된 사병을 이동시켜 주시오. 기다리

겠소. 차기 황제 쿠로 브누아.]

서신을 여러 장 쓴 쿠로는 밀봉하여 대기하고 있는 전령들에게 전달했다. 최대한 빨리 말

을 달리라 명했다. 늦어질수록 지레 겁먹어 황제 편에 붙을 귀족들이 많아진다.

서둘러.

서둘러.

어서 서두르란 말이야!!!

전령들을 보낸 뒤, 안정이 되지 않아 독한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손발이 차디차게

얼어붙고 머릿속은 쪼글쪼글해지는 듯 오그라들었다. 진정해야 한다. 혹, 만에 하나, 아주

아주 만에 하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래도 지금 하는 일에 달라질 건 없다. 가장 빠른 시일 내에 황궁을 정복해 버리고 로카

왕국이 이 본토를 점령해 버리면 그만이다.

에무르와의 약속대로 자신이 황제가 된다. 그래. 그것이 소문의 사실 여부를 떠나 유일하

게 자신이 살길이다. 지금 서두르고 있으니 괜찮다. 잘하고 있는 거다. 아주 잘하고 있다.

지금부터 더 잘해야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이 여기에 달렸다.

쿠로는 자화자찬하며 자신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

땅굴이 완성되었다. 모인 사람들이 땅굴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라 들어가는 입구부터 죄

다 신기해했다.

산티노는 에단과 중요 인물 몇 명을 데리고, 아니 모시고 땅굴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

다. 답답하지 않게 만든 널찍한 통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공간이 나오고 앞쪽 벽

에 손바닥만 한 널빤지가 단단하게 여럿 붙어 있었다.

산티노가 쪼르르 뛰어가 그 널빤지를 위로 젖히자 작은 구멍이 나타났고 그곳을 통해 밖

에 바다까지 보였다.

다들 오! 감탄하며 그 작은 창을 통해 바깥을 보며 신기해했다. 이러면 적이 어디까지 왔는

지,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볼 수 있으니 너무나 신통방통했다.

설명은 들었지만 직접 이렇게 눈으로 확인해 보니 그저 놀랍기만 했다. 위험이 터졌을 경

우 적의 화살을 피하면서도 바깥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니, 큰 무기를 하나 얻었다.

에단 역시 만족스러웠다. 정말 필요한 기술이었다. 산티노 공작 덕분에 많은 것을 제날짜

에 맞춰 완성할 수 있었다.

덤으로 이 땅굴까지. 아주 유용하게 쓰일 땅굴이었다. 공작의 속마음이 어떻든 현재 자신

들이 도움을 받으니 그만큼은 인정해 주기로 했다. 변심만 하지 않으면 굳이 밀어낼 생각

은 없다. 여하간 이 땅굴은 생각지도 못한 요새 하나를 얻은 것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애쓰셨습니다. 산티노 공작님.”

흡족해진 에단은 산티노 공작을 향해 감사함을 표했다.

산티노는 에단의 태도가 흡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산티노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는 악물었지만.

절대 너희들을 위해 이걸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꼭 황제가 이곳에 와야 한다. 오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이 땅굴을 봐야 한다.

그때 자신의 입으로 직접 고할 것이다. 제가 설계하고 직접 만들었다고. 그것 하나만을 위

해 이 힘든 작업을 애써 해 준 것이다. 저들을 도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위

해 한 것이다. 공을 세우기 위해 표 나게 업적을 남겨야 했다.

일석이조.

이들에게도 공을 인정받고 황제에게도. 이 정도면 죽이진 않겠지. 머리 정말 잘 굴렸다. 그

래도 어디 시건방지게 고개도 숙이지 않고 칭찬을 해? 황제라면 모를까. 그 순간 이를 악

문 이유였다.

정말 많이 봐준다. 성질 다 죽었다. 어휴.

산티노는 자신이 지휘한 땅굴을 휘휘 둘러보면서 어서 빨리 황제가 이 모습을 보기만을

희망하며 미소를 지었다.

***

이렇게 불안할 때는 여자를 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만족감과 빠른 성취욕까지 맛

보면 남자로서의 자존감이 강해진다. 정신도 맑아지고 몸도 개운해져 머리가 더 잘 돌아가

게 된다. 게다가 이렇게 신수도 나오고.

이번 여자는 아주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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