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포효하는 호랑이 신수
갑자기 볼 언저리가 붉게 물든 채 당황하는 유모의 모습은 소녀처럼 보였다.
핀핀은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함구했다. 묻지도 말고 모른 척하자.
유모와 핀핀은 마마님에 대해 염원하는 것이 서로 달랐다. 어떻게 다른지는 두 사람만 알
뿐이었다.
***
바다 날씨 한번 좋다.
행운의 여신이 이제부터라도 자신에게 붙기로 작정했는지 해상의 날씨가 좋아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망망대해를 웅장하게 수놓은 수많은 군선들이 실로 장관이었다. 에무르에게는 가슴 벅찬
광경이었지만 적들에게는 살 떨리는 광경이 될 것이다.
생각보다 더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자신한테 승산이 있다고 여긴 대신들과 귀족들이 다
덤벼들었다. 지원도 아끼지 않았고. 이렇게 빨리 준비가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처음에 석 달 후 출정을 쿠로와 약속했을 때는 그 앞에서 허세를 부리며 큰소리를 쳤
지만, 속으로는 조금 후들거렸다.
그때까지 준비하기엔 시간이 빠듯… 아니 모자랐다. 자신의 입지도 불확실해 로카 왕국으
로 돌아갔을 때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아주 대성공이었다. 쿠로에게 한 달 앞당긴다고 서신을 보내고 나서도 주변에서 아
직 동참하지 못한 귀족들이 아주 난리가 났다. 뒤늦게라도 합류하기 위해 그들이 적극적으
로 나서 주는 바람에 일주일이나 더 앞당겨 출항할 수 있었다.
이건 뭐겠는가? 어서 빨리 승리하고 돌아오라는 말이다. 차기 왕으로 벌써 대우를 듬뿍 받
고 있다.
자신에게 천국을 갖다 바칠 군선들. 가장 앞선 군선의 갑판에서 자신을 따르는 셀 수 없이
많은 군선들을 굽어보며 에무르는 밀려오는 희열을 맘껏 음미했다. 벌써 원하는 것을 제
손에 다 잡은 듯했다.
신기했다. 이젠 쿠로의 심정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지금 제 처지와 닮아도 너무 닮아 있었다. 황제,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 이미 강력한
내정자가 있지만 더한 능력으로 신수와 전쟁의 승리를 먼저 취해 내정자를 밀어내고 최고
자리에 오르려는 자. 동병상련.
어찌하다 우리 두 사람이 손을 잡았는지, 이것도 하늘이 하사한 운명인가? 조짐이 좋다.
로카 왕국의 군선이 새까맣게 밀려올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카르탄은 유클로만 신경
을 쓰고 있을 것이다.
혹 알게 되더라도 이젠 늦었다. 이미 탐사도 다 마쳤다. 공식적으로 큰 상선이 드나드는 무
역 항구 쪽으로는 침공하지 않을 계획이다.
대도시라 방비가 잘 되어 있어 점령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게다가 황궁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다. 더 빠르게 황궁으로 진군하기 위해 경로를 재설정했다.
항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해안 마을. 그 인근은 한적하며 걸리적거릴 것이 없어 상륙하
는 즉시 길을 타고 올라가 황도로 가는 지름길로 진입하면 된다.
상대적으로 경비도 허술하고 황도로 가는 대로와 근접해 있어 가장 빠르게 북상할 수 있
는 경로다. 이미 첩자들을 통해 그 해안 마을 절벽에 설치된 계단들을 타고 올라가면 된다
는 정보까지 꿰차고 있었다.
“저… 왕자님.”
에무르의 충신이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주변을 살피며 충신에게 자신의 귀를 허락했다.
소곤소곤, 몇 마디만 하고 슬며시 물러나는 충신에게 눈으로 조용히 치하했다.
에무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 관리를 하며 물살을 힘껏 가르는 뱃머리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자신에게 시선을 두고 있는 자들이 많다. 아무 이유 없이 보는 시선
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쪽도 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는 속으로만 씨익 웃고는 한량처럼 바람과 햇살을 만끽했다.
바람이 어쩜 이리도 시원하게 부는지. 이 바람을 타고 예상보다 더 빨리 카르탄 본토에 진
입할 듯싶다. 상륙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미 절반은 왔다. 이제 곧이다.
아… 벨리타.
이제 이렇게 맑은 하늘, 넘실거리는 바다를 같이 느끼고 맛볼 일만 남았다. 쿠로와 발맞춰
계획한 일은 제대로 지킬 것이다. 하나 자신만의 계획도 있다. 그것까지 쿠로가 알 필요는
없다.
어서 가자. 벨리타에게로.
에무르는 기분 좋은 얼굴로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만면에 미소를 한껏 떠올렸다.
지금 텅텅 비어 있는 카르탄 제국은 우리 손에 들어온다.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
상대가 되지 않았다. 국경에서의 전쟁은 빠르게 종식되어 갔다. 뒤에서 치고 들어온 카르
탄 군사들까지 합류하자 그들은 더 천하무적이 되었다.
그들과 대적하기 위해 떠났던 유클로 군사들은 뒤로 뒤로 밀려 결국 절반도 안 되는 숫자
만이 다시 국경 수비대와 합류했다. 하지만 전의를 상실한 그들은 계속 죽어 나갈 뿐이었
다. 끔찍한 비명만이 낭자하게 흘러넘쳤다.
유클로 왕국의 총사령관은 항복을 선언했다. 죽을 각오로 싸워도 의미 없는 전쟁이었다.
더 이상 몰살로 이끌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열흘 이상 버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 문을 열라고 했을 때 협상을 했어야 했
다.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다.
군사들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기 바빴고 죽어 가는 소리만 난무했다. 하늘을 휙휙
날아다니며 포효하는 호랑이 신수만 보아도 다들 오줌을 지리며 숨기 바빴다. 유클로 왕국
은 무너졌다. 정복당했다.
칼리크는 드디어 국경을 접수했다.
이미 짐작한 일이라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총사령관을 비롯해 살아남은 지도층을 모두 포
박한 뒤, 감옥에 가두고 나머지 군사들은 포로로 삼았다.
일단은 일차적으로 정리는 끝냈다. 나머지는 카르탄 군 사령관들이 차차 알아서 일을 진행
할 것이다.
마음이 급해진 칼리크는 이내 유클로 왕궁으로 향하고자 했다.
“폐하. 좀 쉬시고 출발하심이 어떠신지요?”
이곳을 정복하느라 지치셨을 텐데 바로 출발을 하시려 하니 기사단장은 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쉬는 건. 돌아가서 해도 된다.”
벨리타 가까이에서.
칼리크는 서둘러 호랑이 신수에 올라탔다.
얼마 전 처음 신수를 보았지만, 여전히 눈앞에 있는 호랑이 신수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군
사들이 대다수였다. 봐도 봐도 신기하고 눈이 부셨다. 게다가 신수가 폐하를 태우고 하늘
위로 붕 떠 오르자 감탄의 함성이 터져 나왔고 자동으로 모든 군사들이 경외감으로 고개
를 깊이 숙였다.
위대하고 위대하신 황제 폐하.
잘 다녀오십시오.
칼리크의 위상은 가장 높은 곳까지 치솟았고 모두가 경배하며 신성하게까지 여겼다. 황제
를 넘어서 신에 가까운 존재로 등극했다.
가장 작은 희생으로 이 큰 전쟁, 마지막 하나 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인 카르탄 대군은 호랑이가 하늘 높이 올라가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또다시 전쟁에 이
긴 함성을 온 천지가 떠나갈 듯 내지르며 그 기쁨을 온몸으로 발산했다.
***
말을 타고 달리면 며칠은 족히 걸릴 곳을 몇 시간 만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호랑
이 신수를 보고 놀라는 건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유클로 왕궁에
집결해 있던 대군이 일제히 소리를 높여 함성을 질러 댔다.
칼리크는 미소를 지었다. 몇 번이고 같은 걸 봐도 질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안톤이 제일 먼저 그를 맞이하러 뛰어나왔다. 안톤이 이끈 군단으로 인해 왕궁은 이미 점
령된 뒤였다. 세밀하게 짠 작전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이미 안톤은 데인 대공에게 전
서구를 보내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알렸다.
잠시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눈빛은 강한 경외감과 충성, 믿음과 기쁨으로 빛이 났다.
이제 유클로 국왕을 만날 차례다.
웅장한 왕궁 안으로 들어가자 겉보기와는 달리 공기가 음습했다. 정복당한 비통함이 여기
저기에 서려 있었다. 당연한 거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칼리크는 유클로 왕이 기다리고 있
는 대회의장으로 향했다.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이었다. 손수 찾아가 주는 정도의 일은 해 줄 수 있다.
문이 열리자 거대한 규모의 대회의장이 보였고 앞쪽으로 높게 올라간 계단이 눈에 들어왔
다. 그 위에 왕좌가 위엄을 과시하며 화려하게 위치했으며 그곳에 앉아 있는 유클로 왕의
모습이 보였다.
왕관과 휘황찬란한 휘장에 황금봉까지 손에 쥔 왕은 대관식에서나 볼 수 있는 완벽한 모
습으로 무게 있게 앉아 있었다. 표정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눈빛 하나 떨리지 않고 입을
악문 모습에서 역시 왕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칼리크는 가까이 다가가 계단 앞에서 왕을 올려다보았다. 마지막까지 왕의 자존심을 지키
려는 그의 뜻은 이해해 주었다.
회의장에는 유클로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대신들 몇 명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클로 왕은 너무나 당당하게 걸어와 자신 아래 서 있는, 위엄과 힘을 다 갖춘 칼리크 황제
를 처음 접하는 중이었다.
저 아래 서 있는 황제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오히려 올려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범접
할 수 없는 신성함마저 풍기는, 위협적인 황제를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이러니 정
복당했다. 이 대륙을 통일하고도 남을 황제의 모습이었다. 그동안 너무 얕잡아 본 것이 지
금의 결과를 낳았다. 왕으로서 실격이다.
칼리크는 기다렸다. 이젠 저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게 절차다. 잠
시나마 저 자리에 앉아 있게 허락해 준 것만도 대단한 자비를 베푼 셈이다.
“우리….”
비장하던 모습과는 달리 왕의 목소리가 갈라지며 떨렸다.
“우리 왕실은 지켜 주시오.”
누구도 죽이지 말라는 소리다. 그동안 정복을 하면서 끈질기게 대항하는 왕의 핏줄들은 다
죽임을 당했다. 물론 제대로 항복하며 읍소한 왕족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었지만.
칼리크는 여전히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순순히 내려와 물러난다면 목숨만은 살려 줄 수
있다.
“이 유클로 왕국은… 나 크럼프 3세를 마지막으로… 쿨럭.”
선언하는 도중 왕은 표정이 괴롭게 일그러지며 기침까지 했다. 칼리크의 눈썹이 슬쩍 찌푸
려졌다.
“쿨럭… 카르탄 제국에… 종속됨을…. 쿨럭쿨럭.”
기침이 점점 심해졌다. 왕의 얼굴빛이 점점 검게 변해 갔다.
“선언… 쿨럭… 커억.”
왕의 입에서 피가 한 움큼 튀어나와 턱 밑으로 시뻘건 선을 남기며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