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97화 (97/130)

97화 너무나 아픈 기억

벨리타는 황궁 중정에 앉아 에단으로부터 받은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로카 왕국의 상선들이 수상한 조짐을 보인다고 적혀 있었다. 주변을 탐색하는 듯한 상인들

이 눈에 띄게 많아졌고 다가오는 배의 숫자도 늘었었는데 지금은 잠잠해졌다고 한다. 염탐

을 했던 거겠지. 황궁에 서신이 도착하기까지 시일이 꽤 걸리니 로카 왕국 쪽은 이미 정보

를 다 얻은 뒤일 것이다.

에단이 일을 잘 처리해 주고 있었다. 자칼단이 어수룩한 농민처럼 변장하여 낭떠러지 위로

관심을 보이는 그들을 잘 막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저 위로 올라가면 그동안 준비하고 있던 것이 다 들통나기 때문에 계단 근처는 가지 못하

게 막았다 한다. 통행료 운운하며 마을의 소규모 청년 단체인 것처럼 잘 대응을 했다고 하

니 그건 다행인데 예의 주시해야 할 것이다. 모든 걸 에단에게 맡긴다. 그 누구보다 잘 해

낼 사람이다.

벨리타는 시선을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부기사단장과 다른 기사들이 보였다. 계속 저

한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얼마 전, 부기사단장이 무릎을 꿇고 사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너무 심하게 대한 것

에 대한 사죄였다. 물론 괜찮다고 했다.

사실, 그때 누구의 손에 이끌려 갔는지 기억에 없다. 웬만하면 그 순간과 그때의 일을 생각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아픈 기억이었다.

그게 왜 부기사단장의 잘못이겠는가. 하지만 그 일을 만회하기 위해서 지금 철통같이 자신

을 지키고 있다. 황궁 출입도 더 엄격해졌고 궁 안에 있던 사람이 밖으로 나갈 때도 자신이

나 데인의 승인 없이는 제한되었다. 이 나라 영토 안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닌데

도 황궁의 분위기가 이러니 긴장감이 아니 들 수 없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다시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새 무리가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순간, 황제를 태

우고 하늘을 쏜살같이 날아온 호랑이 신수가 떠올랐다. 하늘을 나는 기분은 어떤 걸까? 별

희한한 것이 궁금해져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에단에게 받은 보고를 데인 대공과 상의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이제 움직여 볼까.

***

유클로 군이 움직였다. 양옆에 포진되어 있던 대부분이 정면으로 움직인 걸 확인한 칼리크

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작전대로 움직였다.

기마병 뒤로 따라온 대군은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협곡을 꽉 채우며 진군할 것이다. 대군

까지 대열을 바꿀 줄 알고 적군이 움직였다. 대군은 양 끝과 각자의 머리 위로 방패를 올려

쏟아지는 화살을 방어할 것이다. 그런데 그 화살의 수가 현저하게 줄었으니 대군의 진군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유클로 사령관은 한 방을 노리며 점점 사정권 안으로 마냥 달려오는 황제에게서 눈을 떼

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사기를 북돋우는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뿌우… 뿌우….

이제 너희들의 미친 짓은 여기서 끝이다. 곧 이곳이 네놈들의 무덤이 될 터.

눈알을 부라리며 황제 놈만 죽어라 노려보던 사령관이 공격 신호를 날리기 직전이었다.

이때다!

달려오는 칼리크 역시 같은 말을 내뱉었다. 이때다!

으아아악!

으아악!

으악!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형체 때문에 유클로 쪽 군사들은 모두가 다 기절초풍하며

비명을 질러 대느라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사령관 역시 펄쩍 뛰며 악, 소리와 함께 뒤로

화들짝 물러났다. 들려오던 나팔 소리도 끊겼고 나팔수들이 캑캑거렸다. 여기저기 주저앉

은 군사들이 즐비했다.

크아앙!!!

어마어마하게 큰, 거대한 호랑이가 포효하자 발밑이 울리고 하늘이 진동했다. 그 속에서

유클로 군은 달달 떨며 호랑이에게서 눈도 떼지 못하고 얼어붙어 버렸다. 그들이 사납게

들고 있던 화살들은 땅에 떨어지고 대열은 마구 흐트러졌다.

우와!!!!

와아!!!!

위엄을 과시하는 호랑이를 처음 본 카르탄 군사들이 미친 듯이 함성을 지르며 황제 폐하

를 외쳐 댔다. 그 소리가 메아리처럼 협곡을 휘돌며 무시무시한 힘으로 적군들을 더 떨게

했다.

저… 미친놈이 다 이유가 있었다.

신수가 나올 줄이야. 저 황제는 아직 신수가 나오지 않았다 들었는데 속았다. 당했다. 싸워

보지도 못했는데 유클로 군 사기는 바닥을 쳤다.

신수가 발현된 황제는 천하무적임을 이 대륙 모두가 다 안다. 싸워 봤자 개죽음이다. 유클

로 군사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채 벌벌 떨기만 했다.

반면 카르탄 대군은 협곡을 가득 메우며 우렁찬 함성과 함께 빠르게 전진했다.

한동안 손을 놓고 있던 유클로 군사들에게 사령관과 지휘관들이 고함을 치며 명령했다.

“어서 공격하라. 화살을 날려라. 어서. 모두 총공격하라.”

정신이 빠진 유클로 군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고함 소리에 밀려 다시 화살을 조준했다. 정

신을 차린 군사들이 겨우 황제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수많은 화살

이 한꺼번에 날아가기 시작했다.

칼리크는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더 박차를 가했다. 그들의 성문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협곡이 넓기도 했지만 길기도 했다. 그래도 이제 다 왔다.

쏴아….

머리 위로 섬뜩한 소리와 함께 화살들이 새까맣게 쏟아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칼리크는 조

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유클로 쪽이 다시 심하게 동요했다. 방금 갑자기 호랑이가 사라졌다. 그 거대한 호랑이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어리둥절해진 유클로 군은 곧바로 입을 쩍 벌리며 그대로 얼어붙어 버

렸다.

화살이 멈췄다.

공중에 딱 멈춰 있다. 황제 위에서 멈춘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유클로 군은 눈동자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다시 바로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질렀다.

우수수수.

공중에 떠 있던 그 수많은 화살들이 바닥으로 소리를 내며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보며 그들은 더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러더니 다시 호랑이가 나타났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또 나타났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

었다. 아니 정신이 아예 나가 버렸다.

칼리크는 호랑이가 방패처럼 수많은 화살을 막아 준 덕분에 최고 속도로 달려갈 수 있었

다. 신통한 신수의 능력까지 지켜보며 사기가 하늘을 뚫어 버린 카르탄 군사들은 빠른 속

도로 협곡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유클로 사령관은 이를 악물었다. 이 협곡이 가장 큰 무기였는데 지금 무너지게 생겼다. 이

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아니, 신수를 끌고 온 저 황제 때문에 그 힘을 발휘할 수도 없는 무

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죽을 각오로 싸워라.”

목이 터져라 명령했다. 하지만 이미 군사들은 개죽음당하기 싫어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화살을 쏘면 뭐 하나. 다 바닥으로 떨어지는데. 성문만 부수면 이제 끝이었다. 쪽수가 안

된다. 게다가 카르탄 군사들이 뒤에서도 공격해 들어오는 판국에 앞뒤로 갇혀 다 죽게 생

겼다. 죽기 싫었다. 하지만 다들 여기서 죽을 것이라는 암담한 분위기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쿵! 쿵!

거대한 소리와 함께 단단하기로 유명한 성문마저 흔들렸다. 호랑이 신수가 온몸으로 부딪

히며 성문을 부수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승산이 없다.

이제 죽는 건 시간문제다. 유클로 군은 새까맣게 협곡을 채우며 밀려 들어오는 카르탄 대

군을 허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 뒤로 저 멀리 들려오는 또 다른 카르탄 대군의 함성

까지 들으며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하나둘씩 바닥에 주저앉을 뿐이었다.

***

“카넬 부인도 전쟁이 걱정되시나 봐요.”

유모의 얼굴이 어둡게 보이자 핀핀이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전쟁? 내가 왜?”

그러나 유모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닌가?

“걱정거리가 있는 듯이 보여서요.”

“잘 봤다. 마마님이 걱정돼서 이런다. 요즘 잘 못 드시잖아.”

잘 주무시지도 못하신다. 자신이 알아차릴까 봐 그런지 뒤척이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계시

지만 핀핀은 안다. 잠들지 못하고 깨어 계신다는 걸.

“전쟁이 걱정되시나 봐요.”

“당연히 그러시겠지.”

핀핀도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즘 들어 부쩍 말수도 적어지셨다. 예전에는 표정만 보

아도 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통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도 폐하께서 잘하시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아요.”

“무슨 노력? 뭘 했다고.”

유모는 자신이 더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마마께서 갑자기 바뀌시더니 그동안의 생활을 청

산하고 폐하에게 마음을 붙이려고 하셔서 힘껏 도와드렸는데 결국, 지하에 연금이 되고 말

았다. 어휴. 그때를 생각하기도 싫다.

“마마님이 잘해 줄 때 잘했어야지. 우리 마마님이 인기는 좀 많았어? 아름답기는? 따라올

사람이 없어. 그런 마마님이 봐 줄 때 똑바로 했어야지.”

“저… 폐하께서도… 용모가 출중하신 편이데….”

“핀핀!”

새된 목소리에 핀핀은 움찔거리며 말을 멈추었다.

“출중하시긴 해도 우리 마마님하고 비교가 되겠어?”

맞는 말이기도 해 핀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좋게 풀렸으면 하는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유모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잘하시면 언젠간….”

“그걸 어떻게 믿어? 그러다가 수틀리면? 또 지하에 집어넣게?”

“그럼… 다신 예전처럼 될 수는 없나요?”

유모는 잠시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핀핀은 폐하의 진심은 알 것 같았기에 안타까운 마음

이 들었다. 지하에서 뵌 폐하도 그렇고 지난번도 그렇고. 그때의 폐하를 유모는 보지 못해

서 모른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진 않는다. 물론 마마님

이 그 고생을 하신 걸 잊지는 않는다.

“그거야 모르지. 마마님도 한번 준 마음 쉽게 접지는 못하시겠지. 하지만 쉽게 다시 열리지

도 않을 거야. 한마디로 믿지 못하실 거다. 언제 또 돌변할지. 폐하도 다시 믿게 하기가 쉽

지 않을 거고.”

유모는 오로지 마마님 편이었다. 모든 세상은 황후마마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마마님을

위해, 마마님으로 인한 삶을 살아갈 뿐이었다.

핀핀은 유모가 너무나 확고하게 말하는 바람에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기로 했다.

“유모. 요즘 보좌관님하고는 계속….”

쉿.

갑자기 유모가 핀핀의 말을 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