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나를 따르라!
여기를 무사히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협곡으로 들어와도 적들은 공격할 수조차 없다.
저 아래에서 이 성곽 위까지 화살이 닿을 수도 없다. 내리꽂히는 우리 쪽 화살만이 빗발치
듯 쏟아질 테니 저들은 이 안에만 들어 오면 다 죽는다. 그러니 어서 시작하라고!
사령관은 그들을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다. 곧 그렇게 될 것이다.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잡아 죽일 것이다. 열이 있는 대로 받은 사령관의 눈은 살기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
동이 트기 시작했다.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사실 칼리크는 날이 밝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먼저 내륙을 치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또 다른 군단들과 시간을 맞추고 있
었던 것이다.
호랑이 신수를 통해 몰려오는 군단들의 위치를 계속 파악하고 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왔
다. 그들을 막아선, 쪼개진 유클로 군대를 대파하며 진군해 오는 카르탄 군단들을 지켜보
고 있는 중이었다.
칼리크는 맞붙기 전 마지막 기회를 던져 주었다. 호랑이 신수가 해 줄 일이었다. 투명한 호
랑이 신수가 적진으로 달려 날아가는 걸 보고는 적들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었다. 황제인
그가 베풀어 주는 마지막 선처였다.
탁!
유클로 사령관의 살기로 등등한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자신이 서 있는 사령탑 기
둥 위에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꽂혔다. 그것도 종이를 매단 화살이 갑자기
와서 꽂혔으니 놀라지 않으면 정상이 아니다. 누구냐? 누가 이 화살을 쏜 거냐?
저 카르탄 적진에서 여기까지 거리상 화살을 날릴 수도 없는데 말이다. 이건 불가능한 일
이다. 그런데 제 눈앞에 버젓이 말도 안 되는 적의 화살이 딱 꽂혀 있으니 거품이라도 물
판이었다.
어디서 쏜 거지? 첩자라도 가까이 숨어들었다는 말인가?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협곡으
로 누군가 숨어들었다고 해도 이 높은 곳까지는 화살이 도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높은
공중 어딘가에서 화살을 쏘았다는 말인데 그 역시 불가능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급하게 화살을 뽑아 매달려 있는 종이를 펼쳐 보고는 사령관은 더 길길이 날뛰었다. 이 미
친 개자슥이. 죽고 싶으면 곱게 뒤질 일이지 얻다 대고!
[무혈입성하고자 한다. 항복하면 단 한 사람도 목숨을 잃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문을
열어라.]
황제, 네 입이나 열어라. 똥물을 확 처발라 줄 테니.
종이를 좍좍 아주 잘게 찢어 젖힌 사령관은 총공격 준비를 오히려 더 강화시켰다.
기껏 호랑이 신수가 입에 물고 간 화살을 보기 좋게 딱 날려 주었더니 하는 짓이 저 모양
이다. 칼리크는 한심해서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자고로 우두머리를 잘 만나야 그 밑의 사
람들이 살아남을 텐데 저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다. 그렇다면 이제 시작한다.
칼리크는 커다란 목소리로 우렁차게 외쳤다.
“모두! 나를 따르라!”
기다리고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소리를 높였다. 협곡 전체에 떠나갈 듯한 함성이 메아리치
며 지축을 흔들었다. 희뿌옇게 밝아 오는 하늘까지 흔들리는 듯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사
기로 충만된 군사들이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손에 방패와 창을 들고 전진하는 그들의 모
습은 너무나 위협적이고 웅대했다.
맨 앞에 말을 타고 질주하는 황제의 모습은 너무나 위대하고 압도적이었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기마병들이 먼저 따르고 그다음 나머지 군사들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유클로 사령관과 모든 군사들은 눈을 빛내며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맨 앞에서 달려오는
저 황제부터 죽이리라. 협곡으로 들어오기만 해라. 아직은 광야에서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
다. 조금만 더 와라. 조금만.
양쪽 성벽에 새까맣게 포진된 군사들은 화살을 조준한 채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그것도 잠시, 그들의 화살이 흔들렸다. 그 수많은 화살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광야를 달
려온 카르탄 기마병이 갑자기 협곡을 앞에 두고 대열을 바꾸기 시작했다.
새까맣게 몰려오던 기마병이 3열 종대로 길게 늘어서는 것이었다. 사령관은 보고 있으면
서도 어이가 없었다.
양쪽에서 화살이 쏟아지면 유일하게 화살이 닿지 않는 부분이 있다. 협곡 정가운데. 대여
섯 명이 나란히 설 정도의 공간까지는 양쪽의 화살이 도달하지 못한다.
그 사잇길을 뚫고 들어오겠다는 작전이다. 언제 저런 것까지 다 계산을 마친 건지 저 황제
놈은 사람이 아니다. 귀신이다. 화살 한번 쏴 보지도 못하고 모든 군사들이 동요하기시작
했다.
“어서 빨리 양쪽 군사들을 정면으로 배치하라!”
유클로 사령관은 급해졌다. 저들의 작전을 읽은 이상 이쪽에서도 최대한 대비를 할 것이
다. 정면 성곽에서 그들을 다가오는 대로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유클로 군은 다시 분주해졌다. 소수만 남겨 놓고 모두 층층이 되어 있는 정면 쪽으로 몰려
가기 시작했다. 대열을 맞춰 앞줄이 가지고 있는 화살을 다 쏘고 빠지면 그다음 줄이 바로
이어 화살을 쏘는 방식으로 빠르게 준비를 끝냈다.
이 협곡은 몇십만을 가둘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저것들이 길게 늘어서 성문까지는 어떻게
온다 쳐도 어쨌건 가둬 놓고 몰살시키면 된다. 갖은 머리를 다 굴린 건 가상하지만 끝은 달
라지지 않는다. 다시 한번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전방을 주시했다.
드디어!
황제가 협곡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성문 앞까지 빨리 와라. 바로 죽여 주마.
길게 늘어서 협곡을 달려오는 기마병 뒤로 카르탄 대군도 협곡에 거의 다다랐다. 저 수많
은 대군도 대열을 바꿔 진입하겠지. 기마병처럼. 어느 세월에 협곡 안으로 다 들어오나.
그들은 방패로 중무장을 했지만 혼자 멀찍이 떨어져 달려오는 황제는 그저 검 하나만 달
랑 손에 들고 있었다. 저놈 하나만 먼저 죽여도 저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무모한
놈. 황제라는 놈이 저렇게 모자랄 수가. 이것 하나는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협곡에 이미 들어선 황제는 정가운데 길을 달리고 있었지만, 양옆 성곽에 남아 있던 군사
들이 공을 세우고자 여기저기서 화살을 날렸다. 운이 좋으면 맞을 수도 있을 테니 너도나
도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칼리크는 닿지는 않지만, 땅에 박히고 있는 화살들이 거슬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한
다!
***
“뭐라고?”
몇 날 며칠 그 긴 시간 동안 그저 먹고 놀기만 했다고?
쿠로는 자신이 심어 둔 첩자에게 전쟁 상황을 상세히 듣고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겼다. 짐
마차의 마부로 몰래 심어 둔 자가 이제야 돌아와 보고를 했는데 이해 안 가는 것투성이였
다. 물론 미친 짓이란 미친 짓을 다 한 군사들의 이야기도 모두 들었다. 뭐 하는 수작인지.
어떤 작전인지 군사들도 모른다는 말에 더 화가 치밀었다. 무슨 작전을 짰기에 극비로 취
급하나? 명색이 대공인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괘씸함에 속이 더 부글부글 끓었다. 분명 데
인은 알고 있겠지. 이렇게 차별을 하니 대공은 무슨 대공. 스스로 그 대공 자리를 던져 버
릴 거다. 두고 봐라. 던지고 황제 자리로 옮겨 갈 테니.
그래서 펠론국에서 보내온 물자들이 다른 때보다 그리 어마어마했나?
모든 게 수상했다. 늘 펼치던 전술이 아니다. 뭔가가 있다.
역시 선견지명이 있었다. 이미 에무르가 움직였으니 우리에게 더 승산이 있다. 먼저 서두
른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신은 아직 자신의 편이다. 유클로 쪽만 신경 쓰느라 로카에서 이
때를 틈타 침공할 경우 대응할 수 없을 것이다.
에무르. 너한테 달렸다. 어서 서둘러라.
쿠로의 가늘게 뜬 두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
에단이 낭떠러지 끝에서 저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 뭔가 신호를 주고받고 있었다. 산티노는
궁금함에 못 이겨 그쪽으로 은근슬쩍 다가갔다. 자기 덕에 지금 땅굴 작업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집중하며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왜 다른 걸 신경 쓰고 자빠졌는지 배알이 꼴렸다.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간 사람이 손을 흔들자 에단도 손을 흔들었다. 뭘 하고 있나 보았더
니 일자로 쭉 설치된 계단 난간, 손잡이 봉 안으로 다른 사람이 뭔가를 붓고 있었다. 물인
가? 이 꼭대기에서 가운데가 뚫려 있는 봉 안으로 부은 물이 저 아래로 흘러나오자 서로
신호를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뭐 하고 있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다.
“일주일 후면 땅굴도 완성될 거요.”
별 시답지도 않은 것에 신경을 쓰고 있는 에단의 주의를 땅굴로 돌려 놓으려 산티노는 아
부하듯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거참. 쿠로 대공 앞에서나 공손했는데 이놈한테도 그러고
있다니. 내가 미쳤나. 그런데 그러고 있었다. 희한한 종자다. 괜히 이놈 앞에서는 공손하게
되니 말이다.
“산티노 공작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더 신경 써 주세요.”
거드름 피우는 말투도 아닌데 이상하게 위압감이 느껴졌다. 바로 네. 네. 하며 굽신거릴 뻔
했다. 그런 자신이 어이없기도 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참아 내야 했다.
낭떠러지 위에 방어벽을 치고 그 뒤로 물러나 있으면 저 아래 상황을 알 수 없다. 낭떠러지
벽 가까이까지 땅굴을 파 요새처럼 만든 다음 벽을 향해 작은 구멍을 내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만든다면 그곳으로 저 아래 상황을 안전하면서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처음 이 계획을 말했을 땐 다들 감탄하며 무지 고마워했다. 욕심 같았으면 계속 내내 자신
에게 칭송을 했으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많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이들이 뭐라고 하건 그냥 맞장구는 쳐 주고 있다. 하지만 의문투성이 저놈에 대해서는 여
전히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답답했다.
산티노는 그래도 에단의 비위를 맞추며 땅굴 작업 지휘를 하러 몸을 돌렸다.
에라이. 쿠로보다도 더 뻣뻣한 놈 같으니라고.
이런 상황만 아니면 거꾸로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릴 것들인데.
목숨이 걸려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산티노는 이를 악물고 참아 낼 수밖에 없었다.
“에이. 누가 이따위로 파라 그랬어? 기둥이 이게 뭐야? 다 무너지면 누가 책임질 건데!”
땅굴을 파라 지시했더니 이것들이 무덤을 파고 자빠졌다. 다 무너지면 매장된다. 그 책임
은 누가 지는데? 이것도 저것도 마음에 안 든 산티노는 괜한 곳에 더 화풀이하며 핏대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