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이제 때가 되었다
“여봐라. 여자를 한 명 더 들이거라.”
빠르게 움직이는 발소리를 들으며 에무르는, 이번 여자는 얼마나 벨리타를 닮았을까 상상
에 들어갔다. 너무 호사스러운 생활이었다. 더 가질 것이다.
에무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여자를 기다렸다.
***
한밤중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 사람은 또 있었다.
로카 왕국 왕세자.
그는 자신의 숨겨진 충복이자 첩자인 자를 앞에 두고 입술을 비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
다.
“너의 존재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 말 명심하라.”
말없이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충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 충복은 말을 못 한다. 태어날
때부터 말을 못 했다. 조금씩 거둬 주며 세뇌를 시켰다. 이 자리를 지키려면 힘을 키워야
한다. 자신 뜻대로 움직여 줄 하수인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이자처럼 아무도 모르는
존재라면 더 금상첨화다.
“카르탄과의 전쟁이 끝나 갈 때, 쥐도 새도 모르게 에무르를 죽여라.”
지금까지의 정보로 봐서는 에무르가 호언장담한 것처럼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 되지도 않
는 유클로 왕국을 정복하러 머리 아둔한 전쟁광 황제가 이미 출정했으니 본토와 황궁은
비어 있을 터. 행여나 황제가 돌아온다 해도 내부 협조까지 있으니 로카 왕국 군대를 막기
엔 역부족이다. 다 지쳐 나가떨어진 패잔병들이 무슨 힘이 남아돈다고.
에무르의 뜻대로 되면 다음 왕의 자리는 그놈이 차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대신들의
움직임이 그러하다.
제 편이라 믿었던 대신들이 뒤로 은근슬쩍 에무르 쪽에 줄을 대려는 움직임까지 포착했다.
한 명 한 명 자꾸 저놈에게 붙기 시작했다. 권력의 힘을 좇아 움직이는 불나방 같은 존재들
이니.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부왕도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이 불리해진다.
뒤집어야 한다. 가만히 눈 뜨고 다 된 밥을 허무하게 뺏길 수는 없다.
생각지도 않은 에무르가 이렇게 치고 부상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동안 전혀 신경도 쓰
지 않았는데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를 쉽게 지키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날 아주 우습
게 봤다.
이번 침공에 성공을 해도 죽여 버리면 승리한 공까지 자신이 거머쥐며 왕으로 올라설 수
있다. 가만히 앉아 에무르가 죽도록 싸워 가져다주는 달콤한 열매를 손에 쥐기만 하면 된
다.
미련한 에무르. 지금 제가 아주 똑똑한 줄 착각하고 있겠지. 그러니 넌 내 아래다. 언제 네
가 날 이겨 봤다고. 하! 가소롭다. 넌 승리한 후 바로 죽을 운명이다.
조금 자비를 베풀어 전쟁 영웅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다.
잘 가거라. 비운의 왕자 에무르.
왕세자의 얇은 입술이 한쪽으로 올라가며 아주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만들어 내고 있었
다.
***
본토를 치고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한 유클로 총사령관은 그 후, 일주일도 넘게 계속 저 짓
거리를 보고 있느라 더 명이 짧아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 부사령관 한 명은 뒷목을 잡고 쓰
러져 어제 겨우 일어났다.
이렇게 가지고 놀면서 제 편을 기다리는 거겠지. 그러니 이렇게 오래 진을 치고 진 빼기 작
전에 들어간 거다.
뜻대로 되었다. 모두가 진이 다 빠져 바짝바짝 말라 가고 있었다. 우리는 전쟁 중인데 저놈
들은 유랑 중이었다.
이쪽은 말라 가는데 저놈들은 피둥피둥 살이 올라 있을 것이다. 저렇게 냄새를 풍겨 대며
허구한 날 처먹어 대는데 안 찔 수가 있나. 차라리 먹는 대로 족족 살이 쪄서 갑옷조차 입
을 수 없게 되어 버렸으면 속이 시원하련만.
“사령관님. 방금 도착했습니다.”
방금 전 전서구가 또 도착했다. 그 편지를 부하가 그에게 서둘러 전달했다.
희망적인 것이 담겨 있기를 바라며 그 편지를 읽는 순간, 사령관의 얼굴로 피가 확 몰렸다.
왕궁을 수호하기 위해 쪼갠 군사들이 내륙에서 맞닿은 적들에게 수적으로도 전투적으로
도 밀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유클로 총사령관은 뒷목을 움켜쥐며 심호흡을 했다. 이러다
저도 쓰러지게 생겼다.
왕궁까지 가지도 못하고 길목을 다 차단한 적군에 의해 밀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놈
들이 눈앞에 보이는 군사들보다 더 많은 군단을 내륙으로 보낸 걸 뒤늦게 알아챘다. 유클
로 군대를 총동원해 국경을 지키고 있었는데 다 합쳐도 40만이 되지 않는다. 그걸 또 반으
로 쪼갰으니 저들에게 당할 수가 없다.
아무리 막강한 군사력과 전투력을 자랑하는 카르탄이라 해도 협곡에서 몰살시킬 계획이
었고 지금까지 역사상 그 어떤 나라도 이 협곡을 통과한 적이 없다. 그건 단 한 번도 유클
로 왕국은 본토 침공을 당한 적이 없다는 소리다. 100만 대군 소리를 들어도 기세등등했는
데 이렇게 되면 자랑해 오던 자신들의 역사가 뒤집히게 생겼다.
거의 반 쓰러진 사령관을 보필하느라 밤새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유클로 쪽은 소란스러운데 카르탄 쪽은 조용했다. 아니 평온했다.
칼리크는 조용히 호랑이 신수의 눈으로 적들을 지켜보다 카르탄 군대가 어디까지 진격해
들어와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신수의 눈으로도 저 멀리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곳
이 보였다. 밤이라 불바다가 된 곳이 지평선 끝에 어른거렸다. 이제 때가 되었다.
주변에 모여 있던 사령관들을 가까이 오게 했다.
“내일 동이 트기 시작하면 군대를 정렬시켜라.”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한 사령관들은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좀이 쑤셨는
데 드디어 시작한다. 그들은 눈을 반짝이며 이미 의기충천해 있는 군사들에게 재빨리 다가
갔다.
***
“사령관님. 어서 나와 보십시오.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미친 짓을 하고 있는 카르탄 군을 주시하라 명한 부대 책임자가 부리나케 사령관
탑으로 뛰어 들어왔다.
“뭐라?”
엄청나게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군사를 쪼개고 어수선한 이곳 분위기를 만회하지도 못했는데 날은 밝아 오고 환
장할 보고까지 받게 되었다. 내보낸 군사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인데 이곳에서라도
이들을 제압해야 한다. 하늘 높이 치솟는 저놈들의 기세를 꺾어 놓아야 한다. 사령관은 밖
으로 급히 나와 높은 망루에서 적들이 있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개미 떼처럼 모여 있는 적진에서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짐마차들이 쏜살같이 외곽으로 빠
지고 있었다. 저 마차들이 제 나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건 전쟁을 곧 시작하겠다는 의미다.
비전투병들이 빠지고 군사들만 남았다. 전쟁의 기운이 짙게 내려앉은 분위기였다.
“전투 준비!”
사령관은 크게 명령한 뒤, 모든 군사들이 제자리로 움직이는 걸 잠시 지켜보았다. 그래도
우리에겐 저 협곡이 있다.
적들이 들어오는 대로 모두 몰살시켜 버리고 말 것이다.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희망을 심어 주며 다시 힘을 북돋아 주었다.
이쪽에 있는 황제만 잡으면 된다. 아무리 뒤에서도 공격을 받고 있다 하나 황제만 죽이면
판도는 달라진다. 어떻게 하건 승리하면 된다. 협곡이 우리에겐 가장 큰 무기다.
저 멀리서 카르탄 군사들이 절도 있게 정렬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유클로 군사들은
극심한 긴장으로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
쿠로의 걸음걸이가 술에 취한 듯 흐느적거렸다.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지금 몽
롱할 정도로 거사를 치르고 밤거리를 느긋하게 산책하는 중이었다.
오래간만에 몸이 맞는 여자를 만났다. 자주 애용해야겠다. 크크크.
물론 꼭 성욕만을 위해 여자를 안는 건 아니다. 신수를 보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다. 이럴
때 위로가 되는 자신의 신수.
칼리크가 출정한 후로 한동안 발현되지 않더니, 혹시 사라지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로
제 안에서 말 신수의 존재감이 점점 약해졌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살아난 느낌이었다. 말
신수가 기운을 차린 느낌.
여자도 만족스럽게 안았고 곧 신수가 나오려 한다. 불안했던 감정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
었다.
팟.
드디어. 오래간만에 나왔다.
밤이라 그런지 말 신수의 몸이 하얗게 빛이 났다. 전보다 더 근사하게 보였다. 또 성장했
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반가웠다.
위로를 받으며 반갑게 쳐다보고 있는 쿠로 앞에서 말 신수는 예민하게 귀를 쫑긋하며 뭔
가를 신경 쓰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주 잠시 그랬을 뿐, 이내 머리를 흔들며 멋들어지게 공
중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래그래. 이래야지. 이래야 내 신수지.
말 신수가 땅으로 내려와 쿠로에게 다가왔다. 겁에 질린 눈을 보여 주고 사라진 뒤 처음으
로 다시 나온 말 신수의 눈이 강인하게 보였다.
쿠로는 다가온 말 신수의 갈기를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너밖에 없다. 내가 그동안 너한테 실수도 많이 했지? 미안하다.
쿠로는 마음속으로 말 신수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진심도 담겨 있었다.
이렇게 요동치는 세상. 언제나 변함없이 제 편인 존재는 이 말 신수 하나다.
주인의 사랑과 관심을 받아서 그런지 말 신수의 하얀 갈기가 점점 더 빛이 났다.
“자. 다시 날아라.”
쿠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말 신수가 푸드덕거리며 높이 하늘을 날아올랐다.
오호. 이젠 명령에 바로 따른다. 또 발전한 거다. 이렇게 되면 맘대로 부릴 수 있게 된다.
아주 흡족해진 쿠로는 지난번 말 신수가 마음에 들지 않게 군 일을 잊어 주기로 했다.
칼리크.
넌 언제 여기까지 훈련시킬 거냐. 어림도 없다.
말 신수가 하늘을 시원스럽게 날아다니는 걸 보며 쿠로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덩실덩실
춤까지 추기 시작했다.
***
둥둥둥둥.
저 염병할 북소리만 지금 몇 시간째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카르탄 군이 위협적으로 정렬하자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건만 또 바로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이런 쳐 죽일 것들. 진 빼는 데는 아주 타고났다. 아직 붙어 보지
도 않았는데 징글징글했다.
움직이기만 해라. 어서 이 협곡 안으로 들어오란 말이다. 그때는 몽땅 다 쓸어 버릴 테니
까.
유클로 쪽 사령관은 아주 이를 북북 갈았다.
무슨 수를 써도 이 협곡은 너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