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황제 자리는 내 거다
불안함이 팽배해지고 자신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협곡으
로 몰아 카르탄 군을 전멸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자신감은 점점 힘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들의 입술은 바짝바짝 말라 가기만 했다.
바람이 분다. 진영 앞에 우뚝 서 있는 칼리크의 등 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카르탄
제국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서 그런지 시원하면서도 온기를 품고 있었다. 눈을 감고 크
게 심호흡을 한 칼리크는 벨리타를 느끼고 있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지금 그녀와
함께하고 있다.
더욱더 힘을 받은 그는 눈을 번쩍 뜨고는 계속해서 적들의 동향을 살피었다. 어수선해지는
그들을 지켜보며 손을 들어 올리자 주위에 있던 사령관들이 서둘러 다가왔다.
“고기를 아낌없이 내어 주어라.”
또다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도록 고기를 구워라. 온 천지에 고기 냄새가 진동하도록.
적들은 이미 고기 냄새를 많이도 맡았겠지만, 이번은 더 치명타가 될 것이다.
“내 군사들을 배 터지도록 먹여라.”
제집에 있을 때보다 전쟁터를 코앞에 두고 더 잘 먹는다며 신이 나 있는 병사들을 더 신나
게 해 줄 것이다.
아직 보급 식량이 넉넉하다. 적이 우왕좌왕, 혼이 나가 정신이 없을 때 이들은 고기를 뜯느
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황제의 명을 받든 사령관들이 밖으로 향했다.
잠시 후.
카르탄 진영에서는 기쁨의 함성이 다시 터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황제 폐하를 외치는 소리
가 점점 드높아졌다. 반면 적은 조용했다. 그저 조용했다.
멀리서도 그들이 불안감과 두려움에 떠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누누이 말하지만 아직도
멀었다. 카르탄 군이 움직이는 건 좀 더 지나야 할 것이다. 자신들은 그저 잘 먹고 편안히
휴식을 취하며 힘을 비축하기만 하면 된다.
칼리크는 자욱하게 올라오는 고기 굽는 냄새에 아주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이런 개자식.
기어코 죽고 싶어 환장했지.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산티노가 제 영지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다른 곳으로 튀
었다. 그게 어디냐가 문제였다.
땅굴의 대가 아니랄까 봐 이번에도 저 혼자 빠져나가 다른 땅굴을 파고 있다. 누구한테 붙
었지? 그런데 찾을 수가 없다. 이런 정보를 캐는 데는 자신 쪽 귀족 중 산티노가 일인자다.
그런데 당사자가 사라졌으니 찾을 길이 있나. 그래서 더 환장하겠다.
쿠로는 분노가 치솟았다. 속까지 다 뒤집혔다. 이놈이 정말로 이럴 줄 몰랐다. 그의 촉이
말해 준다. 분명 다른 꿍꿍이로 자신에게 배신을 때리고 있다고.
그는 어제 받은 서신을 떠올렸다.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출정이 약속한 날짜보다 일주
일 앞당겨질 것 같다는 에무르의 편지였다. 서신이 도착하는 시간이 있으니 아마 며칠 내
로 에무르의 군선들이 출항할 것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아군은 에무르였다.
연적이면 연적이었던 이놈이 지금 자신을 가장 돕는 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가장 일등
공신으로 꼽았던 산티노에게 다음 대공 자리를 주려는 생각까지 했는데. 물론 확정 지은
건 아니지만 그런 놈은 어딘가로 내빼 버리고 원수처럼 재수 없었던 에무르가 자신의 든
든한 뒷배라니. 그때 에무르와 손잡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 아찔하다. 신이 도우셨
다. 그러니 아직 신은 제 편이다.
그런데도 뭔가 계속 압박당하듯 불안했다. 이번 전쟁에서 황제가 패배하는 건 자명한 일인
데도 뭔가가 자꾸 불길했다. 어디건 생각지 못한 변수가 작용하는 법.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해가 쨍쨍하게 떠 있는데도 습하고 축축한 기운이 계속 그에게 달라붙는 듯했다. 이건 신
의 계시다. 더 빨리 움직이라는.
에무르. 착오 없이 잘 도착하기만 해라.
황제 자리는 내 거다. 반드시 손에 넣는다. 칼리크를 암살해서라도 그 자리를 꿰차고 말 테
다.
쿠로는 심란한 마음을 위로하며 홀로 힘을 내고 있었다.
***
쿠로가 아군으로 극찬하고 있는 에무르는 이 상황이 묘했다. 단 한 번도 주목받아 본 적 없
는 천덕꾸러기 둘째 왕자였는데 지금은 왕세자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해 버렸다.
구사일생으로 로카 왕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카르탄 제국과의 전쟁을 제의했을 때 다들 콧
방귀부터 뀌었다. 대륙의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나 때를 못 잡고 있던 로카 왕국이
었다. 그런데 한낱 유랑이나 하며 떠돌던 그가 돌아와 시건방지게 섣불리 나선다고 여겼
다.
하지만 유클로 정복을 위해 카르탄이 출정하는 날짜와 카르탄 제국의 자세한 상황들을 정
확히 보여 주며 지금 손잡은 자가 쿠로 대공이라 말하는 순간, 대신뿐만이 아니라 왕까지
도 관심을 보였다.
쿠로 대공은 차기 황제감으로 떠오르는 자로 이곳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신수 하나 때
문에. 처음, 카르탄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한 조건을 들었을 때 참으로 미개한 나라라고 치
부했다. 그까짓 게 뭔데 황제 자리도 뒤집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나라
의 원칙이 그러하다는데 어쩌겠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쿠로 대공, 호칭 붙이는 게 귀찮으니 쿠로. 이자가 여기서 이렇게 자
신에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자신보다 쿠로 대공을 더 믿은 덕에 지금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씁쓸
했지만, 결과만 좋으면 된다.
그 덕에 왕인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받았다. 독대를 하고 차와 식사를 같이 하는 등,
생전 처음으로 이런 호사를 누려 보았다.
게다가 가장 부유한 펠론국을 가지는 조건이 들어 있는 증서를 내보이자 크게 웃으며 자
신의 어깨를 부둥켜안기까지 했다.
대단한 조건을 받아 온 것은 틀림없다. 모든 대신들도 그를 추앙하기 시작했고 벌써 승전
을 거둔 것처럼 대우하기에 이르렀다. 머리도 비어 있는 천덕꾸러기 왕자가 이 나라에서
가장 똑똑하고 왕의 재목까지 갖춘 왕자로 등극한 셈이었다. 왕까지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
다.
“내 너를 믿고 기다렸다.”
거짓말. 지금 뛰어난 업적을 이룰 성싶으니 급하게 말을 바꾼 거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
지만 기분은 좋다. 언제 이런 말을 들어 봤다고.
“드디어 너를 드러내는구나. 그동안 감추고만 있어 내가 무척 애가 탔다.”
이건 핏줄이구나. 거짓말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잘하는 건.
물론 에무르도 거짓말과 임기응변이 장점이다. 아버지의 핏줄이라는 게 이런 데서 증명되
는 것이 우스웠다.
하도 눈 밖에 내놓은 자식이었기에 혹시 출생의 비밀이 있나 은근 마음 졸였던 시기도 있
었다. 더구나 아버지와 닮지도 않았고 어머니 쪽을 닮았다.
혹 다른 이유가 있어서 저를 내치나 싶었는데 이제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처음으로 자
세히 본 아버지의 얼굴과 자신은 닮아 있었다. 특히 눈과 코가 빼닮았다. 이제 방황을 끝내
고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는 걸로 정착하고 싶어졌다.
왕의 자리.
부강한 해상국 로카 왕국.
탐난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는데 이젠 욕심이 난다. 가지고 싶다. 그러니 반드시 이번
에 카르탄 제국을 집어삼킨다.
사실, 자신이 이러는 가장 큰 이유는 벨리타다. 그녀 없이는 못 산다. 그때 데리고 잘 도망
쳤더라면 지금 환희와 열정 속에서 몸부림치는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걸 놓친 것이
한이었다. 그만큼 자신들을 방해한 칼리크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고 정복할 충분한 이
유가 되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추세를 보아하니, 로카 왕국 차기 왕 자리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럴
거라 예상은 하고 희망은 품어 보았지만, 패를 까 봐야 아는 법. 제 생각대로 이번 전쟁만
성공하면 벨리타도 로카 왕국도 다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벨리타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둘이서 희희낙락 매일 몸을 부딪치는 환상의 나날을 펼칠 수 있다. 벌써 군침
이 돌아 몸이 근질근질했다.
“붉은빛이 도는 게 아주 아름답구나.”
알몸으로 자신의 몸을 덮은 아리따운 여자를 쓰다듬으며 에무르는 눈이 풀려 갔다.
벨리타….
이 여자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닮았다. 욕정이 일 때마다 여자들이 제 방에 들어왔다.
이젠 말만 하면 되었다. 위치가 바뀌자 왕자로서 누려야 할 것들을 넘치도록 받을 수 있었
다. 하지만 자신이 안을 여자는 조건이 붙었다.
반드시 붉은 머리일 것.
속궁합이 그렇게 잘 맞은 여자는 벨리타가 처음이었다. 혼이 나가는 희열을 매번 매 순간
경험했다. 절대 잊을 수 없다. 그러니 꼭 차지할 거다.
벨리타는 내 거다.
“벨리타….”
여자의 바지런한 움직임에 몸이 반응하며 흥분하자 소리 내어 그 이름을 불렀다. 지금 이
여자가 벨리타다. 지금 벨리타와 함께하는 것이다. 오늘도 벨리타와 몸을 부딪히고 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세뇌시키며 이 순간을 한껏 즐겼다.
대우받는 왕자니 뭐든 해도 된다. 에무르는 치솟는 흥분으로, 벨리타의 이름을 욕정이 담
긴 목소리로 연신 불러 재꼈다.
벨리타… 기다려. 곧 간다.
뒷마무리를 하며 떠나는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에무르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정말로 벨리타와 하게 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출항한다. 벨리타를 만나자마자 불
태울 것이다. 그녀도 얼마나 자신이 보고 싶을까. 엄청나게 그리워하고 있을 거다. 이렇게
합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긴 힘들 터.
내가 서둘러 구해 줄게. 조금만 기다려.
벨리타….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가 한시도 머릿속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지상에 있는 모든
여자 중 가장 으뜸이다.
아니 천상까지 다 합쳐도 벨리타가 제일이다. 육체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다 홀렸다. 그녀
만 있으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아… 벨리타…. 그녀의 황홀한 교성이 듣고 싶어졌다. 얼마나 눈과 귀, 모든 오감을 자극하
며 흥분시키는 소리인지 생각만 해도 다시 자신의 몸이 반응할 정도였다. 방금 한 차례 끝
냈는데도 말이다.
“여봐라. 여자를 한 명 더 들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