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한 번이 어렵지
에단의 검 끝이 천천히 산티노의 눈앞에서 치워졌다. 멈추었던 숨을 몰아쉬며 에단에게 살
살 꼬리를 흔들었다. 술이 확 깨 버렸다.
“뭔가 오해를 했나 본데. 황후마마는 너무 깔끔하셔서 깨끗한 몸으로 알현해야 한다는 걸
설명하던 중이었소. 하하하.”
겨우겨우 위기를 모면했지만 에단의 눈빛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미친 황제도 그러더니 너까지?!
내 눈알이 그렇게 만만해? 왜 이 눈만 검으로 겨누고 난리들이야.
속마음을 숨긴 채 이를 악물고 에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우리 가문이 또 땅굴에도 일가견이 있는데. 내 계획 한번 들어 보겠소?”
그 말에 다행히 에단의 눈빛이 바뀌었다. 솔깃한 제안을 제시하자 점점 더 집중하는 모습
이었다. 일단 이렇게 이 순간을 잘 넘기는 산티노였다.
***
“마마. 뭐라도 좀 드셔야 합니다.”
잠자리를 봐 드리며 걱정이 된 핀핀은 황후마마가 테이블에 차려 놓은 음식을 조금이라도
드시게 하고 싶었다. 요즘 통 못 드셔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좀 이따가 먹을게. 내가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었구나.”
요즘 입맛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노력은 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서
였다. 그런데도 이리 걱정을 하니 미안함이 앞섰다.
마마의 머리를 빗겨 주던 핀핀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콩콩콩.
뭔가 소리가 들렸다. 창문 쪽인 것 같은데….
앗. 핀핀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창문 밖에….
핀핀의 소리에 벨리타도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핀핀이 말은 못 하고 벌벌 떠는 손가락으로 창문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 폐하다. 이번
엔 창문 쪽이다. 그럼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꿈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니 그것이
더 놀랍고 손이 더 떨려 왔다.
벌떡 일어난 벨리타는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활짝 열었다.
“칼리크?”
그녀도 놀라 서둘러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도왔다. 공중에 혼자 둥둥 떠 있는 칼리크를 보
고 핀핀이 얼마나 놀랐을지 알고도 남는다.
벨리타 역시 칼리크가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호랑이 신수 덕이다. 그건
벨리타만 아는 일이었기 때문에 지금 핀핀은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일 것이다. 그녀도 공중
에 둥둥 떠 있는 칼리크의 모습이 처음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칼리크는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바로 벨리타를 끌어안았다. 제 품에 꼭 안고 감격스러워했
다. 이 얼마 만인가, 이렇게 안아 보는 것이. 몇 달 만인 것 같았다. 그냥 자는 얼굴만 보고
간 날도 좋았지만, 지금이 훨씬 만족스러웠다.
벨리타….
한 번이 어렵지.
다행히 오늘은 벨리타가 깨어 있었다.
그가 얼마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벨리타는 숨이 잘 안 쉬어질 정도였다.
눈치 빠른 핀핀이 서둘러 방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놀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이 비밀을 지켜 줄 것이다.
한동안 말도 못 하고 칼리크는 그렇게 부둥켜안고만 있었다. 들리는 거라곤 오직 그의 애
타는 숨소리뿐.
그에게서 거친 바람과 광활한 대지의 내음이 풍겼다.
“여길 왜 온 거예요?”
갑작스러운 만남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칼리크는 이 순간을 좀 더 음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놓아줘야 했다. 그녀의 몸이 뻣
뻣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라도 벨리타를 안아 볼 수 있었으니 감사하기로 했다.
칼리크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쉽지 않았다.
칼리크의 품에서 벗어난 벨리타는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전히 에너지가 넘쳐나 보였
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 중이다. 아무리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렇게 달려오다니.
“지금이 어떤 때인데. 황제가 이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아까 대답을 듣지 못해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전히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자신
의 얼굴만 하염없이 쳐다보느라 두 눈만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신수에서 내려 벨리타의
방까지 걸어오는 시간도 아까워 이번에는 그대로 창문까지 날아왔다. 아래에서 저를 발견
한 몇몇 기사들이 놀라긴 했어도 지난번 함구시킨 부기사단장이 알아서 입단속을 잘 시킬
것이다.
“칼리크?”
그녀가 좀 더 강하게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아! 하며 그가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칼리크는 하도 오래간만이라 벨리타의 얼굴을 쳐다보는 데 정신이 나가 있었다. 얼마나 예
쁘고 사랑스러운지.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달려온 거요.”
“황제가 이러는 건 옳지 않죠.”
이렇게 찾아온 것을 벨리타가 썩 반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예상했다.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온 것이니 모른 척했다.
“너무 보고 싶었소.”
이렇게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소.
“떨어져 있던 시간이 몇 달은 된 것 같소.”
몇 번을 말해도 이 말은 자신의 심정을 설명하기에 부족한 것 같았다.
다시는 전쟁 같은 건 안 할 거요. 이번이 끝나면 할 이유도 없소.
칼리크는 그래도 제 진심을 전하며 흐르는 시간을 아까워했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
다.
벨리타만 이렇게 계속 쳐다보고 싶다. 떠나기 싫다. 하지만 이제 돌아가야 한다.
여기 오면 더 빨리 흐르는 시간 때문에 칼리크는 다시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것만으로도 또다시 충전은 되었다. 사랑스러운 내 벨리타.
“황제인데 이렇게 일탈이나 하고. 이래도 되는 거예요?”
벨리타에게 혼이 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좋았다. 화내는 얼굴이라도 보고 있으니 너무
좋았다.
“그런가? 하긴 이런 전쟁도 처음이야.”
치열하게 피 튀기는 전쟁만 치르다 이렇게 한가한 전쟁은 처음이라 낯설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전술이었다.
“다신 이러지 말아요. 알았어요?”
꾸짖는 벨리타 말에 칼리크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는 정말 떠나야 한다.
“이기고 나면. 그때 돌아오세요.”
그녀는 한 번 더 못 박았다. 또 이러지 못하게.
그가 창문 밖에 대기하고 있는 투명한 호랑이 신수에게 다가갔다.
“물론이오. 금방 돌아오겠소.”
그는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는 걸 마치 옆집 갔다 오는 것처럼 간단히 말을 하고는 드디어
호랑이 신수 위로 올라탔다. 또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애가 탔다.
다음번엔 꼭 승리하고 찾아오리다.
동이 트기 전이라 어둑한 밤하늘을 몇 시간 동안 다시 날아가야 한다. 드디어 그가 하늘을
날아올랐다. 그렇게 점점 멀어져 갔다.
“벨리타한테 혼났네.”
날아가는 호랑이 신수 위에서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한 번 더 얼굴 보니 좋다. 고맙다.”
호랑이 신수를 어루만지며 고마움을 표시하던 칼리크는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황궁을 내
려다보았다. 애틋했다. 서둘러야겠다. 그래야 빨리 돌아가지.
전쟁이 어서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안톤이 이끌던 군대가 곧 국경 쪽으로 다가올 것이
다. 자신들도 곧 움직일 거고. 빨리 끝내고 벨리타의 곁으로 가는 날만 손꼽으며 칼리크는
바람과 같은 속도로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
유클로 쪽 사령관은 여러 마리의 전서구가 날아온 통에 정신이 나가 있었다. 모두가 한결
같이 적에게 영지를 점령당했다는 영주들의 서신이었다. 전령으로 보낸 이는 감감무소식
이고 이런 비보만 계속 전해졌다.
이게 사실이라면 왕궁이 위험하다. 어서 빨리 왕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들을 보내야 한다.
유클로 왕국 군사들 대부분이 이 국경에 배치되어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
왕궁을 구하러 군사를 어서 재배치해야 한다. 이미 중간을 치고 들어온 적들도 쪼개졌을
것이다. 반은 이쪽으로 또 나머지는 왕궁 쪽으로 쳐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도 내륙 쪽에서 쳐내려오는 적을 쳐부수며 왕궁까지 갈 군사들과 저 눈앞에 미친
군대가 공격해 오면 방어할 군사들을나눠야 한다. 머리가 아파졌다. 아니 충격이었다. 정
말 저것들이 내륙부터 친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이 전쟁에 이
기는 것만이 중요하다.
사령관 진지는 분주해졌다. 머리를 맞대야 했다. 어느 정도의 군대를 보낼지 빨리 결정지
어야 한다.
저 미친 짓을 한 이유가 다 있었다. 이렇게 치고 들어오다니. 불리하게 돌아간다.
협곡에 가두어 양쪽에서 적을 몰살하려던 자신들이 역으로 당하게 생겼다. 이렇게 되면 자
신들이 앞과 뒤에서 공격받아 최악의 경우 전멸당할 위기에 처한다. 양공 작전은 적들이
펼치고 있었다.
무서운 카르탄 제국. 더 무서운 저놈의 황제.
서둘러야 한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유클로 진영에 어두운 기운이 점점 두텁게 내려앉고 있었다.
***
칼리크는 벨리타를 다시 만나고 와서 그런지 개운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어수선하게 변하
고 있는 적군의 동태를 호랑이 신수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그 후 총공격에 들어간다. 그 어떤 전쟁보다 가장 빨리 종식시키는
게 목적이다. 이번이라면 가능하다. 자신의 신수와 벨리타의 오아시스가 승리를 이끌 것이
다. 사실, 신수보다도 오아시스에 대한 정보가 더 큰 역할을 했다.
벨리타…. 그런데도 자신이 그녀에게 저지른 죄는 끔찍했다. 벨리타가 여전히 마음을 열지
않고 있는 것이 당연한 거다.
펠론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만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자신의 얼굴이라도 봐 주는 것이 천
사로 여겨졌다. 그녀 덕분에 꿈에 그리던 통일 제국을 이루고 하루라도 빨리 황궁으로 돌
아갈 것이다.
그리고는 가장 큰 염원인 그녀의 마음을 돌려 놓기 위해 노력을 이어 나갈 것이다. 조금이
라도 그녀의 상처가 낫기만 한다면 원이 없겠다. 어서 빨리 그녀에게만 집중하고 싶다.
벨리타. 조금만 기다려. 곧 돌아갈 테니까.
***
유클로 군의 절반 가까이가 움직였다. 내륙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한 그들은 우왕좌왕할 수
밖에 없었다. 적이 코앞에 있는데 또 다른 적과 싸우려 출격을 하니 혼란스럽기 그지없었
다.
자세한 상황을 위에서 전달해 주지 않았지만, 군사들은 느낌으로 알았다. 자신들이 불리하
다는 것을. 이미 지금 시점에서 군사들의 사기는 아래로 꺾이고 있었다. 아니 진작부터 서
서히 꺾이던 것이 급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