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이 정도로 믿으시는구나
생각지도 못한 이런 전술을 쓰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카르탄의 전술이 달라졌다. 정확
히는 저 황제의 전술이 달라졌다. 언제나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던 황제였다. 그만큼 사상
자도 많이 나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뒤통수를 아주 제대로 쳤다.
사람이 바뀌지 않고서는 전술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몸에 밴 습관처럼 튀어나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사령관은 기어코 고함을 질러 댔다.
으아아악!!!
***
벨리타는 갑자기 자신을 찾은 데인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폐하께서 안 계시니 최종 결정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네?”
무슨 일이길래.
그리고 최종 결정?
원래 칼리크는 출정 시 황궁과 제국의 중대한 결정권을 데인 대공에게 일임했다. 그런데
왜 이번엔 나한테….
“폐하께서 그리 일임하셨습니다.”
벨리타의 눈동자가 잠시 잘게 떨렸다.
데인 역시 그런 결정권이 황후에게 넘어갔는데도 인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믿는다
는 뜻이다. 황제 폐하가 황후를. 이 정도로 믿으시는구나.
이건 대단한 일이다. 황제 폐하를 대신하는 일이기에. 폐하의 깊은 뜻을 황후가 잘 알아주
기를 바랐지만 표정만 봐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
“쿠로 쪽 귀족들 사병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정보원을 강화할 생각입니다. 결정만 해 주시
면 됩니다.”
지금 같은 시국에 쿠로라면 그런 짓을 도모하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벨리타는 신중하게 최
종 결정을 내렸다.
펜을 들어 사인하는 그녀의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결제할 사항들이
여럿 있어 그것까지 사인을 하며 처리를 했다.
데인은 황후가 돌아가고 나서도 골몰히 생각 중이었다.
지금 황제 폐하가 밖에서 전쟁 중인데 안에서 또 다른 내전을 일으키는 건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배다른 동생 쿠로에게는 이번이 기회일 것이다.
반드시 일을 저지를 터. 황궁을 습격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멍청해도 사병들이 움직이는데
황도와 황궁이 문을 열어 줄 리 없다는 것을, 승산이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분명 다른
계략을 꾸밀 것이다. 그 계략은 단 한 가지. 황궁 기사단의 발을 묶어 놓고 황궁 문을 열 수
있는 방법. 오로지 하나다.
황후.
보호를 더 철저히 해야겠다. 어떤 식으로든 숨어들어 오고도 남을 놈이다. 황궁 문을 더 철
저히 지켜야 한다.
쿠로. 이놈!
머리가 썩은 물로 가득 찬 놈이라 고작 그런 짓이나 벌이겠지. 저 주제에 황제를 꿈꾸다니.
그저 가문의 수치일 뿐이다.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이 되자 더 심하게 퍼붓기 시작했다.
***
쿠로가 열심히 찾고 있는 산티노 공작은 다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 처음으로 초대받아 혼
자 좋아하고 있었다.
에단을 비롯해 중요 인물들 10명 정도가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 있게 되니 모든 게 다 좋아
보였다. 자신의 공이 이제야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건 곧 황제에게 인정을 받는 것과 직결
된다.
오래도 걸렸다. 자신 덕분에 방어벽을 세우는 것이 거의 완성되어 오늘 처음으로 그들과
합석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 에단 말고는 다들 평범한 청년들처럼 보였다. 별다른 특징이나 능력 같은 건 전
혀 보이지도 않았다.
오다가다 볼 수 있는 흔한 유형들이었다.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이 조직의 응집력이었다.
에단을 중심으로 심할 정도로 단결되어 있는 것이 바로 느껴졌다. 이곳이 생각보다 질서가
잡혀 있어 은근 감탄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고위 귀족 가신들보다 더 나아 보일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이 에단의 지도력이리라.
하지만 여전히 산티노는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고 에단을 주의 깊게 살폈다. 지도자의 면
모를 다 갖춘 에단, 그리고 황후. 황후가 제아무리 변했다 해도 그게 얼마나 갈지 회의적이
다. 워낙 변덕이 심한 황후라 지금 모습을 믿지 않는다. 언젠가는 또 변할 게 뻔했다.
에단은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젊은 청년이었다. 이런 청년을 황후가 가만뒀으려고. 무슨
관계를 맺었으니 황궁의 지원까지 받는 것일 테고.
평민인 에단이 뽑힌 것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출중해 보인다고는 하나 이 정도의
인물을 물색하면 많을 터. 어떻게 이자가 이런 중대한 일을 맡았냐 하는 것이다. 황실과 아
무 접점이 없는데 말이다.
분명 황후의 성격상 어디서건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는 눈이 맞았겠지. 그러니 황후가 황
제에게 적극 추천했을 것이고 황후에게 빠져 있는 황제는 이런 사실을 모를 공산이 크다.
불쌍한 황제.
아무도 모르게 산티노는 입술을 슬쩍 비틀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황후와 에단. 당연히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게 틀림없다. 한때 황후와 즐긴 자신이기에 더 확신 할 수 있었다. 저
렇게 멀쩡하고 반듯해 보이는 에단도 남자라는 소리다. 황후의 미모에 안 넘어갈 남자가
몇이나 될까. 에단도 별수 없는 그렇고 그런 놈이다.
“황제 폐하께 충성을!”
또 에단이 외쳤다. 다 좋은데 잔을 들 때마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황후마마를 위하여’ 외
쳐 대는데, 따라 하느라 입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연막작전인가? 황후와 그렇고 그런 관계임을 속이기 위해?
에단이 머리는 제법 쓰는 놈임은 인정했지만 술수와 계략에 더 능한 산티노에게는 그 수
가 훤히 다 보였다.
“여기 오신 산티노 공작님 덕분에 방어벽이 내일이면 완성될 것 같습니다.”
에단의 말에 모두가 하나가 되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뭐 이 정도는 해 줘야 달려온 보람
이 있지. 산티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겸손한 척 인사를 했다. 이들이 자신을 일원으로 받아
들여 준 것 같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그가 겸손하게 인사를 해서인지 박수 끝에 환호성까지 질러 댔다. 환영받는 건 언제나 반
가운 일. 분위기가 아주 좋게 무르익고 있었다.
술도 한 잔씩 마시며 느슨해진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
다. 산티노도 얼큰하게 취기가 돌자 에단을 남자 대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황
후와 어디까지 갔나. 뭐까지 해 봤을까.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를 한번 뵙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발언으로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같이 끄덕였다.
“그러면 저도 좋겠습니다. 제가 만나 뵌 황후마마는 정말 천사 같은 분이셨습니다.”
오호. 드디어 에단이 사적인 감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자연 산티노의 귀는 쫑긋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분은 처음 뵈었습니다.”
얼씨구. 완전히 빠졌군.
황후가 어떻게 남자를 홀리는지 너무 잘 안다. 산티노는 처음에 자신의 나이가 많다고 거
들떠보지도 않던 황후에게 앙금이 남아 있었다. 지극정성으로 덤벼 겨우 관계를 맺었지만,
저 에단 놈은 젊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푸대접은 받지 않았을 거다. 그 점이 더 개탄스러웠
다.
“얼마나 똑똑하시고 현명하신지.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로 드높은 분이십니다. 그런
분의 존경을 받으시는 황제 폐하는 어떤 분이실지 저도 뵙고 싶습니다.”
연막작전의 대가로 인정해 줘야겠다. 말끝에 황제를 높이며 은근슬쩍 빠져나가는 저 노련
함 봐라. 젊은 것이 그런 기술이나 익히고 말야. 산티노의 눈에는 술수가 다 보이는 에단이
저보다도 못한 하수로 보였다.
“황제 폐하 만세.”
“황후마마 만세.”
다 같이 합창하듯 외쳐 대는 통에 산티노는 시끄러워 얼굴을 슬쩍 찌푸렸다.
“산티노 공작님. 정말 고맙습니다.”
에단이 옆으로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놈은 꼬박꼬박 공작님이라 불러 주
는데도 이상하게 저보다 더 위에 있는 자처럼 느껴졌다. 그런 힘을 갖고 있다니. 평민 주제
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도 이곳의 리더임에도 불구하고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면서 예의
바르게 굴고 있어 저 혼자 느낀 감정을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또한, 여긴 제 편이 한 명도
없다.
입을 쩝, 다시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이런저런 평범한 대화가 이어졌고 산티노는 슬쩍 궁
금해하던 걸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자신이 끼워 맞춘 생각들을 확인해 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흠흠…. 에단… 황후와는 어떤 관계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자신이 이놈에게 말을 놓고 있는데도 존대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비위가 상했다.
에단의 눈빛이 바로 달라졌다. 산티노의 말투는 끈적끈적, 사람 속을 긁는 뭔가가 있었다.
눈치 빠른 에단은 침묵한 채 싸늘해진 눈빛을 던졌다.
“언제 봤다고 황제를 그리 칭송하고 황후는 더 받들고.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러네.”
비웃음은 양념으로 더해졌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이들 평민 나부랭이들은 자신과 말 한마
디 주고받지 못했을 것이다. 같이 앉아서 밥을 먹고 대화를 한다? 내가 누군데. 이 나라 귀
족, 그것도 공작님! 이시다. 굽혀 주니 다들 안하무인처럼 군다. 비위는 맞추되 자신의 위
치는 확실히 각인시킬 생각이었다. 그 정도면 많이 봐주는 셈이다.
“황후를 잘 아는가?”
“두 번 뵈었지요.”
싸늘한 눈빛만큼 사람을 압박하는 에단의 목소리였다.
산티노는 아직 황후에 대해 잘 모르는 에단에게 충고를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귀담아들어
야 할 충고일 것이다. 인생 선배로서, 경험자로서 해 주는 말이니 에단은 귀 기울일 것이
다.
“두 번이면 아직 잘 모르겠군. 조심해야 할걸세. 언제 단둘이 또 만나자고 하면 그땐 목욕
재계하고….”
챙!
산티노는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순식간에 뽑아 든 에단의 검 끝이 그의 오른쪽
눈알을 겨누고 있었다.
겹쳐진다. 지난번 미친 황제의 신검이 자신의 눈알과 맞닿아 있던 그 무서웠던 순간이 떠
올랐다.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더 이상 지껄였다간 평생 눈 하나로 살아야 할 거요.”
바로 두 손을 들어 항복의 자세를 취했다. 어린 놈의 자식이 이런 거나 배워서 사람을 위협
한다. 너무 어리게 얕잡아 봤다. 아니 공을 세웠다 치켜 주니 기세등등해져 혀를 잘못 놀렸
다. 아니 술에 취하면 입방정 떠는 주사 때문이다. 여기서는 공작이라는 지위도 다 소용없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