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돌겠다 미치겠다
산티노는 거대 파오가 수십 개 쳐져 있는 에단의 주둔지를 예리한 눈으로 살피고 돌아다
녔다. 모두가 에단을 따르며 조직처럼 움직였다.
이 정도 규모라면 제국에 위협적이다.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런데도 제압은커녕 황실의
보호를 받는다니 이건 엄청난 일이었다. 중앙에 놓인 가장 큰 파오 앞에 황실 깃발이 당당
하게 휘날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자신이 끌어모은 정보가 확실했다.
이들을 처음 움직이게 만든 건 황후다. 여전히 황후가 이런 일을 도모했다는 것이 믿어지
지 않았지만 누가 뒤에서 도와주었건 말건 황후가 이들의 배후 세력이었다.
하지만 황후는 허울뿐이고 뒤에 있는 자, 아마도 데인이지 않을까 싶었다. 황후를 잘 아는
데 이런 머리도 관심도 없는 여자다.
그러니 이 조직은 데인의 작품이고 진짜 배후 세력은 황제다. 이런 식으로 땅바닥에 추락
한 황후의 위신을 세워 주려고 한 게 틀림없다. 이 조그만 마을을 중심으로 황제는 물론이
고 황후에 대한 칭송이 점점 퍼져 나가고 있다. 이러다간 황도까지 퍼지겠다.
어쨌건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에 자신의 목숨이 달렸다. 그런데 늘 음모나 계략이 난무하는
삶만 살다 이런 곳에 오니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하나로 뭉쳐 있었다. 무슨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정직과 존중, 신뢰와
솔선수범이 판쳤다. 산티노 입장에서는 갑갑한 세상이었다. 이러니 평민들이지. 저런 정신
머리를 가진 자들은 높은 사람들 하인이나 기사로 써먹으면 딱이었다.
그래도 에단 스톤은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평민인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람을
모으는 힘이 있었다. 게다가 제법 생기고… 젊고… 흠….
산티노는 머릿속으로 몇 가지 가설들을 끼워 맞추고 있었다.
***
“우리 쪽 귀족들에게 연락은 다 취했습니다.”
“나도 다 했소.”
옌슨과 베를루스 공작은 산티노가 없는 틈을 타 둘만의 만남을 가졌다.
“우리 둘이서 큰 공을 세워 봅시다.”
“그래야죠.”
베를루스 공작은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잘못되지는 않겠지요?”
“어허. 무슨 소리. 당연한 수순이요. 쿠로 대공이 황제가 되는 건. 오히려 늦었지요.”
“그렇지요? 지금 황제에겐 아직 신수가 나오지도 않았으니….”
“지금 나온다고 해도 조그마한 새끼일 텐데 그걸 언제 키운단 말입니까. 그동안 우리 쿠로
대공의 신수는 더 커질 텐데. 승산이 없어요. 지금 황제는.”
겁이 많은 베를루스 공작에게 옌슨 공작이 확고하게 주장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렇게 깊이 관여했으니.”
“다 잘될 겁니다. 이것이 하늘의 섭리입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만약에 틀어지면 우린 영지를 뺏기고 쫓겨나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몰
살입니다. 지금 황제의 성정을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린 죽은 목숨….”
“어허. 왜 그런 불경스러운 말부터 먼저 하는 겁니까?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그…렇겠죠? 암요. 그래야 하고 말고요.”
여전히 미심쩍음이 남아 있는지 불안해하는 베를루스 공작을 두고 옌슨 공작은 속으로 다
른 생각을 했다.
강력했던 산티노도 없겠다 이제 베를루스뿐인데 반드시 자신이 대공 자리를 차지해야 한
다는 것.
만약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해 귀족들에게 서신을 보낼 때 모두 베를루스 공작의 사인으로
보냈다는 것. 이렇게 하면 이 일에 자신이 가담한 적이 없게 된다. 잘된다면 누가 서신을
보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이번 일만큼은 비상하게 머리가 잘 돌아갔
다.
점잖게 보이는 옌슨 공작은 겉보기와는 달리 저만의 욕심을 채우려 하고 있었다. 베를루스
공작을 바라보는 옌슨 공작의 눈빛이 만족스럽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
“뭐라?”
유클로 사령관은 지금 한 마리의 전서구로부터 받은 정보를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럴 리 없다. 어찌 그들이 내륙을 쳐?”
정확히는 사막을 건너올 수가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령관은 자신의 전령을 속히 불러 명령했다.
“더 정확한 상황을 빨리 알아 오너라! 이건 필시 속임수일 것이다. 어서 서둘러!”
사람 눈으로 직접 보고 오라 전령을 몰아붙이듯 보내고 나니 사령관과 같이 있던 부사령
관들은 동요했다. 저들이 협곡 밖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는데 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또
다른 그들의 전술적 기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마음을 놓을 상황은 아니었다.
“다른 군사들이 절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라.”
부사령관들이 명을 받들고 관사를 나섰지만 그들의 표정은 대단히 심각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 이상 그 많은 대군이 내륙부터 치고 들어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
륙 중앙에 있는 영지가 적에게 정복당했다는 영주의 편지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
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눈앞에 보이는 적들이 미친 작태를 보이고 있는 와중에
이런 소식마저 들으니 혼란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드높아야 할 사기가 높아질 수
가 없었다. 부사령관들은 동요한 눈빛으로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지금은 전시
중이다.
***
조짐이 보였다. 적군 사령관 귀에 소식이 들어갔다. 지금 내륙이 어떤 상황인지. 하지만 약
하다. 더 동요해야 한다. 신수를 통해 사령관 관사의 동태를 모두 다 지켜본 칼리크는 카르
탄 군에게 더 기다리라 명령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하다. 서두를 필요 없
다.
칼리크는 파오를 나와 자신의 대군을 바라보았다. 기막히게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꼬챙
이에 꿰어 통째 구운 닭을 뜯는 자신의 군사들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흐렸다. 오히려 해가 쨍쨍 내리쬐는 것보다는 나았다.
벨리타는 잘 먹고 있으려나.
그녀와 같이 있는 것이 정답이다. 떨어져 있으니 이것저것 걱정이 되어 한숨만 자꾸 터져
나온다.
칼리크는 그녀 생각에 푹 빠져 파오 안에 성찬을 차려 놓았다고 전하는 기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보고 싶다. 얼마 전 보고 왔는데도 또 보고 싶다. 계속해서 더 보고 싶다.
이놈의 전쟁. 어서 빨리 끝내든가 해야지 원.
그녀가 보고 싶어 죽겠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보고 싶은 사람을 못 보니 그게 제일 곤욕이
었다. 참는 수밖에 없다. 쉽지 않아서 문제지만.
전쟁을 아직 시작하지 않고 있어 그런지 매번 매 순간 그녀가 떠올랐다. 특히 잠이 들 때는
더 그리웠다. 호랑이 신수 덕에 중간에 한 번 벨리타를 보고 올 수 있었지만, 성에 안 찬다.
그때 충전한 것이 다 떨어져 가려 한다. 너무나 그립다.
이렇게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한 거겠지? 그녀도 날 조금은 그리워할까? 그래 줬으
면 좋겠다. 또 욕심인가?
그가 올려다보고 있는 하늘이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
다. 사막 지역인데 마치 비가 오려는 듯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례적이긴 하겠지만
비가 온다면 군사들은 시원함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툭.
정말 비가 오려나 보다.
***
비가 오려나 보다.
벨리타는 어두워진 바깥을 내다보며 창가에 서 있었다.
이미 어떤 작전을 펼칠지 데인 대공에게 들었기에 아직 전투는 시작되지 않았다는 건 알
고 있다. 그래도 이젠 임박했다. 얼마 후면 접전이 시작된다. 모두가 무사하기를.
“마마. 여기 계셨네요.”
문을 열고 들어온 유모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지금 벨리타는 칼리크의 방 창가에 서 있었다. 오늘은 그냥 한번 와 보고 싶었다. 이곳이
가장 전망이 좋고 탁 트여 멀리까지 내다보였다.
그런데 유모가 왜 이리 급하게 자신을 찾은 걸까?
“지금 대공 집무실로 가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지?
자신을 왜 찾을까 싶어 내려가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
쏴아. 쏴아.
아주 시원하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장대 같은 비가 좍좍 쏟아졌다. 협곡 사이로 물웅덩
이가 만들어지고 시야까지 뿌옇게 될 정도였다. 자욱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
다.
우와. 와아.
갑작스럽게 들리는 카르탄 군의 함성에 유클로 쪽은 바짝 긴장하며 동태를 살폈다. 이 장
대비를 뚫고 쳐들어오나 싶어 집중했는데 희뿌옇게 보이는 시야 속에서 간신히 그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신나서 함성을 질렀는지 알게 된 순간, 사령관을 비롯해 모든 군사들은 제 눈을 의심했
다. 지금까지 기괴한 짓을 해 오던 카르탄 군이었는데 지금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
다.
돌겠다. 미치겠다.
사령관의 콧구멍이 사정없이 넓어지며 뜨거운 콧김이 사납게 쏟아져 나왔다.
분명 미친 건 저것들인데 그걸 보고 있는 자기 쪽이 더 미치고 있었다.
적나라하게 보이지 않고 희뿌옇게 보여서 망정이지 저걸 어찌 두 눈으로 멀쩡히 보고 있
을 수 있겠는가. 지금도 머리로 피가 다 몰리고 있는데.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저들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그냥 확 열어 보고 싶었다.
여기는 전쟁터다. 너네 집이 아니라고!
수많은 군사들이 너도나도 옷을 벗어 던지고 전라가 되어 있었다. 장대비 사이로 살덩이들
이 넘실거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뭐가 그리 신나는
지 왁자지껄, 소란스럽기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필시 저것들은 전쟁을 하러 온 것이 아니
라고 착각할 정도로 미치광이들 같았다.
저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자신들의 숙명을 원망했다. 유클로 군사들은 서서
히 시간이 지날수록 저들이 부러워졌다. 적을 앞에 두고 잘 먹고 잘자, 쉬고 놀기까지 해,
게다가 이번에는 대놓고 씻기까지? 개운하겠다. 좋겠다.
그들의 어깨가 점점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다. 똑같은 군사들인데 너무 차이가 났다. 자신
들도 씻고 싶었다. 내리쏟아지는 빗줄기가 새삼 더 시원하게 보였다. 겨우 손을 내밀어 손
이라도 씻어 보려는 군사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사령관은 자신의 군사들 사기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낭패다. 싸우
지도 않았는데 아니, 적들이 다가오지도 않았는데 이 모양이다. 환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