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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90화 (90/130)

90화 여기에만 있어 주시오

신수 위에 올라타신 건 알겠는데 호랑이가 보이지 않으니 폐하 혼자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어지지 않아 말문이 막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할 정도였다.

칼리크는 처음엔 균형을 잡지 못해 불안한 자세였는데 점점 익숙해져 호랑이 신수와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이 참으로 신기하기만

했다. 하늘을 날아 보다니. 아버지께서 검은 늑대 신수에 태워 주시긴 했어도 이렇게 하늘

을 날아 보진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위엄이 실로 대단했는데 자신의 호랑이 신수도 만만치

않았다.

높은 곳의 공기는 저 아래하고 많이 달랐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강하게 스쳐 갈 때의 그

아찔한 경이감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숨 쉬는 것이 힘들 정도로 대단하고 어마어마

한 속도였다. 그저 감탄만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호랑이 신수 역시 주인인 칼리크가 어느 정도의 속도까지 적응해 내는지 가늠하는 모양이

었다. 둘이서 합을 맞춰 보는 이런 연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게 한참을 날며 서로

를 맞추는 데 집중했다.

다시 지상에 내려왔을 때 칼리크는 신세계를 경험한 흥분으로 얼굴이 상기되었다. 벨리타

를 태워 주면 천천히 날아야지 어지러워할 것 같다. 이 신기한 경험을 그녀에게도 맛보게

해 주고 싶어 제일 먼저 그 생각부터 떠올랐다.

가까이 있으면 당장 태워 주련만. 아쉬웠다.

“벨리타 본 지 너무 오래된 것 같다.”

너무나 장해 커다란 두 눈만 보이고 있는 호랑이 신수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 주며 칼

리크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만큼 그리움이 사무쳤다. 이런 경이로운 일을

같이 느끼고 싶었다. 적과 대치하고 있긴 하나 이쪽에서는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어서 그런

지 벨리타 생각이 더 많이 났다.

설마, 내가 없는 틈을 타 펠론국으로 가 버리는 건 아니겠지?

지난번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 떠올랐다. 갑자기 걱정이 훅 치고 올라왔다. 한번 그쪽으로

생각이 미치자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크르릉.

호랑이 신수가 뭔가 다른 메시지를 전했다.

“너도 걱정이 되느냐?”

호랑이 신수의 두 눈이 대답을 하듯이 크게 껌벅거렸다. 그런데.

“음? 다시 타라고?”

어허. 이거 참….

호랑이 신수가 더 솔직했다. 못 이긴 척 호랑이 신수의 말을 듣고 싶어졌다.

짧은 시간에 결심을 굳힌 칼리크는 조용히 기사단장을 불렀다. 여전히 얼이 빠져 있던 기

사단장은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곁으로 달려왔다.

“내일 아침 일찍 돌아오겠다.”

네에?

기사단장은 대답은 못 하고 두 눈만 커다랗게 뜰 뿐이었다. 어디를 가시려고… 아! 그제야

알아차렸다. 폐하가 지금 가고 싶은 곳이 어디겠는가. 이제야 제대로 알아들었다.

비밀에 부칠 것이다. 새벽에 돌아오시면 알아차릴 사람은 없다. 전쟁을 아직 시작하지 않

았으니 그만한 시간도 충분히 있고.

기사단장의 배웅을 받으며 칼리크는 호랑이 신수 위에 다시 올라탔다. 얼른 갔다 오면 아

무 문제 없을 것이다. 속이 타들어 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을 벌고 있으니 제대

로 활용해야겠다.

“자. 가자!”

칼리크의 몸은 순식간에 하늘 위로 높이 떠 올랐다.

***

희미한 소리에 잠귀 밝은 핀핀은 자다 말고 두 눈을 번쩍 떴다. 등불을 희미하게 밝혀 놓은

마마님 방 문이 조용히 열렸다. 누군가 들어오고 있었다. 유모나 시녀도 아닌 남자의 모습

에 기겁을 한 핀핀은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한껏 벌렸다.

쉿.

그러나 비명 소리가 입을 통해 터져 나오지 않았다. 조용히 하라 지시하는 사람이 누구인

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폐…하?

핀핀은 여전히 입을 크게 벌린 그 상태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렇게 놀라 보기는 처음이었

다. 그런데 왜 이곳에 폐하가? 지금 전시 중일 텐데 여길 어떻게 오신 거지?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아니면 꿈을 꾸고 있거나.

아무리 봐도 마마님 침대 곁으로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있는 분은 틀림없

는 폐하셨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유클로 국경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말을 타고 와도 하루 이틀 걸리는 거리가 아니

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건 필시 꿈이다.

핀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이 없는 칼리크는 시녀를 조용히 시킨 것만이 중요했다.

신수를 감추고 황후궁으로 들어오면서도 자신을 본 기사들에게 모두 절대적인 함구를 시

켰다. 신수를 타고도 몇 시간이나 걸렸다.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 버렸지만 여기 와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침대 위에 곱게 누운 벨리타가 인형처럼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보고 있기만

해도 좋았다. 그리고 안심도 되었다.

황궁을 나갔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는데 다행이었다. 여기 있다. 황후궁에.

잠깐 얼굴이라도 봤으니 바로 떠나야 했다. 하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봐도 봐도 너무나 사랑스럽고 완벽했다.

이렇게 하염없이 그녀의 자는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잠

든 그녀를 내려다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프다고 핑계 대는 줄 알고 확인하러 들어왔는

데. 그때와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이제는 인정했다. 그때도 벨리타가 아픈 얼굴로 누워 있는 걸 보고는 안쓰럽고 신경이 쓰

였다는 사실을. 그러니 물수건까지 새로 올려 주었지. 언제 그런 걸 해 봤다고. 갑자기 모

든 게 재미가 없어지고 나오면서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다만 그때는 인정하기 싫었겠

지. 갑자기 달라진 벨리타에게 끌리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을 테니까.

더 유혹해 보라고 자만하던 시기였다. 즐기기만 할 뿐이라 자신하며.

가만. 그러고 보니 혹시 그때 벨리타가 아팠던 것이 신수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다. 신수는 너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라고. 그게 이것이었던가? 어렸을 때 어머니

께서 그때의 벨리타처럼 자주 몸살로 아프셨던 것이 기억났다.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께

서 신수가 완성되었다고 처음으로 태워 주셨고 이상하게 그 이후로는 어머니께서 아프시

지 않으셨다.

신수가 나왔던 그날 벨리타와 열렬히 키스를 했으니 그랬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는 앓아누

웠다. 그게 맞다면 그때 아팠던 것도 자신 탓이다.

잘못한 것이 너무 많았다.

벨리타. 정말 미안하오.

용서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여기에만 있어 주시오.

부탁이오.

칼리크는 그러고도 한참을 애틋한 눈빛으로 조용히 벨리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녀가

잠이 깰까 봐 숨소리마저 죽이고는 그저 오매불망, 눈으로 그녀를 보듬었다. 그저 애틋한

마음뿐이었다.

멀리 떨어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핀핀의 눈에 이게 꿈이건 생시건

낯익은 것이 보였다. 바로 폐하의 표정이었다.

예전 마마님이 지하에 갇혔을 때, 찾아온 폐하의 표정이 딱 저랬다. 그저 놀라 바로 구멍

안으로 피신했지만, 그때 보았던 눈빛은 뇌리에 박혀 있었다.

아. 다시 문 쪽으로 폐하가 움직이신다. 다시 한번 자신을 향해 검지를 입술에 대며 함구할

것을 지시한 폐하가 소리 하나 없이 문밖으로 사라지셨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 이건 당연히 꿈이다.

핀핀은 뜬눈으로 날이 밝아 오는 걸 바라보다 설핏 잠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후

다닥 일어나 아침이 된 걸 확인하고는 마마님을 깨우러 몸을 일으켰다.

“마마….”

깨울 필요가 없었다. 마마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에 기대어 조용히 앉아 계셨다.

언제부터 일어나 계셨나…. 평소보다 늦어 버린 자신이 송구스럽기만 했다.

“핀핀.”

그녀를 부르는 마마님의 목소리가 왠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물 한 잔 주렴. 갈증이 이는구나.”

핀핀은 부리나케 테이블로 달려갔다.

벨리타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

노심초사 폐하를 기다리던 기사단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폐하가 다시 돌아오셨기 때문이었다.

표정이 떠나기 전보다는 훨씬 편안해 보였다. 다행이었다.

“폐하. 조금이라도 주무셔야 합니다.”

“괜찮다.”

칼리크는 더한 에너지를 충전하고 오는 길이었다. 벨리타가 잘 있는 걸, 황궁에 그대로 머

물고 있는 걸 확인하고 온 것이 그를 더 생생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침 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마시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살아나고 그의 두 눈이 진한 황금빛으로 반짝거렸

다.

***

안톤은 드디어 대장정을 끝내고 유클로 왕국의 본토로 치고 들어갔다. 대군단이 위험한 모

래바람이 부는 사막을 지나는 건 지루하고 힘든 행군이었다. 힘을 비축하며 휴식을 취하면

서 열심히 전진했다. 드디어 본토로 올라서자 그다음부터는 속도가 붙었다. 싸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던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을 개시했다.

처음 맞붙은 영지에서의 싸움은 싱겁게 끝이 났다. 군사들을 확보하느라 각 영지의 사병들

까지 싹 차출해 간 덕분에 내륙은 거의 비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협곡과 사막 덕분에 요새로 알려진 유클로 왕국인 만큼 국경을 뚫고 들어오는 건 불가능

하다 믿고 있는 탓에 모두가 느긋하게 있다가 안톤 군단에게 허를 찔린 것이다. 그들은 속

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내륙이 발칵 뒤집혔다. 그 누구도 사막을 건너 본토로 적

이 바로 치고 들어올 줄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영지들을 점령한 뒤, 카르탄 제국의 깃발을 꽂으며 계속 진군했다. 내륙 깊숙이 들

어온 그들은 안톤의 지휘 아래 30만 대군은 동쪽으로, 나머지는 군사령관의 지휘 아래 서

쪽 국경으로 향했다. 국경으로 근접하면 협곡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폐하와 양공 작전을

펼친다. 얼마 안 남았다.

안톤은 지나는 영지들을 점령하며 동쪽 가장 안전한 곳에 위치한 유클로 왕궁을 치러 간

다. 정확히는 왕을 잡으러 간다. 왕궁 역시 배치되어 있는 군사는 그리 많지 않을 터. 왕을

무릎 꿇리는 건 시간문제다. 그들은 그렇게 두 갈래로 갈라지며 진군에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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