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89화 (89/130)

89화 신수를 가진 자만의 특권

산티노 공작은 제 성질대로 못 함을 누르느라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모

든 정보원을 풀어 최근 황궁에서의 이상 징조를 싹 조사했다. 그러자 나왔다. 황후가 한 남

자를 만났고 그가 이곳으로 이동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얼마 전, 황궁 기사 세 명이 여길

다녀갔다는 것이 결정적인 정보였다.

이거 뭐 있다.

그래서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 에단 스톤이라는 자가 여기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 하늘이 도우셨는지 제 집안의 장기인 토목 공사를 한다는 말에 이건 신의 계시라는 확

신이 들었다. 또한, 제 영지와 가깝기도 했고. 이것 역시 행운이었다.

에단에게 어떤 고충이 있는지까지 알아낸 산티노는 손뼉을 치며 팔딱팔딱 뛰었다. 모두 다

자신의 가문에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고충들이었다. 이건 기회다 싶어 바로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이곳으로 몰래 도망치듯이 움직였다. 누구라도 이 사실을 알면 큰일 난다. 특히 쿠

로 대공이.

그의 대단한 촉이 말해 주고 있다. 다른 길로 살아남아야 한다고. 지금이라도 황제에게 붙

어야 산다. 하지만 지금은 출정 중이라 황제에게 아부를 할 수가 없다.

이들은 황제를 위한 집단이라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까

지 받고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 에단 스톤에게 붙는 것이 더 이롭다. 아니 잘 보여야 한다.

그리고 공을 세워야 한다.

이 해안 마을에서 이런 토목 공사를 한다는 건, 말이 토목 공사지 적이 침공했을 때를 대비

하는 작업이었다. 그 적은 당연 로카 왕국이고. 그러니 로카 왕국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에단에게 이런 것들을 지시한 것이다.

지금 황제가 모든 걸 다 꿰뚫고 보고 있다. 에무르가 탈출한 경로가 비밀 땅굴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땅굴을 설계한 가문인 자신이 당연히 연결될 것이다. 쿠

로에게 충성을 다한 몸이니. 그렇게 쿠로와 에무르가 손을 잡았고 그 다리 역할을 한 자가

자신이라고 황제는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뭔가 잘못되었을 때는 자신이 그 죗값을 치르게 된다. 그때가 되면 분명 쿠로가 자

신을 팔아먹을 것이다. 저만 살겠다고 홀라당 자신한테 죄를 다 뒤집어씌울 작자다. 그러

고도 남는다. 그렇게 되면 빼도 박도 못하고 반역자로 몰려 바로 처형이며 가문은 몰살당

한다.

이번 전쟁도 병력을 굳이 나눠 출군한 것에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왠지 유클로

왕국을 상대로 승리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기에 쿠로는 가망이 없다. 그

렇게 되면 자신은 죽음뿐이다. 그러니 그 전에 이곳에서 공을 세워 황제가 자신을 단죄하

지 못하도록 미리 수를 써야 한다.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산티노 가문이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단단한 동아줄을 잡았다

확신하며 줄기차게 달려왔다. 영지에 기술자들과 보유하고 있는 목재들을 다 싣고 오라 명

한 뒤, 중간 지점에서 만나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왔다.

누가 볼까 봐 숨죽이며 똥줄 타게 달려왔건만 이 빌어먹을 어린놈이 자신을 아랫사람 대

하듯 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서슴없이 날렸다. 좋아서 제 앞에 넙죽 엎드리며 극진히 대우

할 거로 생각한 것이 여지없이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평민인데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가장 컸다. 역시 이놈한테 뭐가 있다. 그러

니 아무리 배알이 꼴려도 지금은 한발 후퇴다. 누구한테 붙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

는 것 또한 그의 장점이었다. 가끔 칼침을 맞아서 그렇지.

“그렇게 의심만 하지 말게.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데 내가 조금이나마 보태고 싶어

이리 찾아온 걸세. 어떻게 알았는지 그게 뭐 중요한가? 결과가 중요한 거 아닌가?”

회유하기로 작정했다. 이놈을 구슬려야 할 때다.

“의심하고 있을 시간이 없네. 어서 빨리 계획대로 완공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은데. 계속

이러고만 있을 텐가?”

에단 역시 촉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자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여기에 속을 에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산티노 공작이 가져온 것은 꼭 필요한 물건들과 인재들이었다. 평민들이 아무리 모

여 기술을 모아도 지금 이 공작이 데려온 자들만 못하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왜? 자신 있으니까.

제아무리 어떤 꿍꿍이가 있다 해도 자신과 자칼단이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뭐가 되었건

이 공작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이자를 감시하여 활개를 치지 못하게 할 자신이 있어

그의 손을 잡았다.

안 그래도 골칫거리였는데 한 방에 해결하듯 이자가 스스로 필요한 걸 다 가지고 제 발로

들어왔으니 이것도 하늘의 뜻이다. 에단은 그에게 묵직한 시선을 던지고는 자리를 떴다.

에단은 계단 공사를 하다 손을 다친 남자가 있는, 치료소로 쓰이고 있는 파오로 향했다. 공

사가 크다 보니 다치는 사람들이 자주 생겼다. 다행히도 얼마 전 자칼단을 따라온 여자가

치료사 일에 자처하고 나섰다. 제법 잘해 주었다. 지금은 여러 명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모

든 일을 혼자서 다 도맡아 했었고 군소리 하나 없이 깔끔하게 잘해 주었다.

얼마 전, 악덕 귀족을 벌하러 옆 영지로 자칼단이 잠입했을 때, 그곳에 하녀로 팔려 온 여

자를 하나 구해 주었다. 이미 몸도 마음도 다 다쳐 영혼 없는 인형처럼 축 늘어진 여자가

오갈 곳이 없게 되자 자칼단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말리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살려고 하는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밥값은 제대로 하고 있었다. 주근깨투성이인 파리한 얼굴, 앙상한 몰골, 머리카락

은 푸석거리고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여자였다. 그래도 이곳에 와 시간이 흐를수록 얼

굴에 핏기가 돌고 살이 붙기 시작했다. 마음이 편해서란다. 아무것도 걱정할 것도, 위험한

것도 없는 이곳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한다.

사람 하나 또 구제해 줬다 여겼다. 나중에 그녀를 찾아온 여자 둘이 있었는데 그들을 통해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몰락한 귀족의 딸이었던 그녀는 가세가 기울고 악덕 귀족에게 차용증을 잘못 써 준 탓에

팔리듯이 하녀로 가야만 했다고 한다. 뒤따라 찾아온 여자 둘은 몰락하기 전 그녀를 모셨

던 하녀라고 한다. 그때부터 같이 생활하며 다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셋이서 하게 되었

다.

에단으로서는 득이 되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그녀가 사람을 잘 대하는지 하나둘씩 여자들

이 다가왔다. 그래서 지금은 치료소를 따로 차려 그들이 맡아 주니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서로 돕는 관계가 가장 좋은 법.

치료소 안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는 남자는 잘 회복하는 중이었다. 자신들을 따라온 여자가

약초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든든함마저 들었다. 꼭 필요한 사람을 하늘에서 보내 준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녀에게

는 조금 전 보았던 산티노 공작 같은 탁한 눈빛이 보이지 않았다. 순수하고 맑은 눈동자였

다. 점점 원래 모습을 되찾아 가는 것도 다행이었다.

“이름이 뭐요?”

볼 때마다 살이 오르고 눈빛도 생기가 돌아 뿌듯할 정도였다. 세상 다 산 얼굴이었는데 지

금은 아주 많이 좋아졌다. 처음에는 다소 나이 들게 보였는데 지금은 훨씬 어리게 보였다.

생기가 돌아서 그런가 보다.

“레이나 로렌스.”

언제나 상냥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제부터는 그 여자가 아

닌 ‘레이나’라고 부를 수 있어 그것도 마음이 놓였다. 이름도 생각보다 예뻤다. 이름을 들으

니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거친 남자들하고만 생활해서인지 다정한 목소리가 인상 깊었다. 아마도 여기에서 의미 있

는 일을 해 주니 그 자신도 많이 너그러워졌나 보다.

게다가 레이나는 몰락한 귀족이라는 걸 몰랐을 때도 기품이 있어 보였다. 행동들이 조용하

고 우아했다. 처음 보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역시 귀족이어서 그런 건가 여기며 파오를 나

오는 동시에 레이나의 대한 생각은 거기에서 끝났다.

앞으로 할 일이 태산같이 많았다. 그것에만 집중하느라 에단은 항상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람을 잘 믿지 않지만 한번 믿기 시작하면 의리 하나는 알아주는 그였다. 산티노 공작 덕

분에 방어벽을 더 빨리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것 또한 힘이 났다. 남몰래 제국민들을

아끼는 황제를 위하여, 황후를 위하여 이 한 몸 불사를 생각이다.

에단이 걸어가는 동안 그 뒷모습을 레이나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칼리크는 호랑이 신수를 불러내기 위해 언덕 너머 진지와 떨어진 곳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물론 혼자 가도 되었다.

무적의 호랑이 신수가 있다. 그리고 칼리크의 실력 또한 만만치 않다. 하지만 적진이고 어

두워졌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기사단장은 자신만이라도 따르겠다 우기며 요지부동이었다.

할 수 없이 동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기사단장에게는 사실을 말해 주어야 했다. 물론

말하지 않아도 비밀 유지는 기본이다.

신수가 발현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기사단장이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신수가 벌써 발현되었다니 이보다 더한 경사가 어디 있냐며 감격스러

워했다. 아직 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쉽게도 오늘 기사단장은 보지 못할 것이다. 혹 누가 볼까 봐 투명한 채로 불러냈다. 조금

떨어져 지켜보고 있는 기사단장은 눈만 껌벅일 뿐이었다.

오늘은 호랑이 신수가 다른 걸 요구했다. 땅 위에 납작 엎드리더니 제 등에 타라고 신호를

보냈다. 기대감에 기분 좋은 긴장감이 밀려왔다. 하늘을 날게 되는 것이다. 신수를 가진 자

만의 특권이었다. 균형을 잡아야 하니 이 또한 연습이 필요하리라.

기사단장은 다시 한번 주저앉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황제 폐하 혼자 이야기를 하며 움

직이는 걸 지켜보고 있었는데 폐하가 편하게 앉은 듯한 자세가 되더니 갑자기 공중으로

붕 떠올랐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어 하며 자리에서 한참을 일어나지 못한 채, 하늘 높이

올라갔다 내려오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폐하를 그저 겁나는 시선으로 올려다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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