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배신의 냄새
유모는 여전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심한 시선을 날렸다. 이젠 대놓고 본성을 드러내
는 것 같았다. 그런 리자가 골치 아픈 존재로 부상했다.
저거 저러다 큰일 내지.
유모는 리자의 관리를 더 엄하게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유모가 그러든지 말든지 리자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입이 뾰족이 튀어나와 있었다.
흥. 나를 이렇게 내쳤겠다?
두고 봐. 큰코다칠 때가 있을 테니.
리자는 제일 앞쪽에서 걷고 있는 황후와 바로 뒤에서 함께 걷고 있는 그 재수 없는 핀핀을
노려보았다.
저런 것보다 내가 뭐가 모자라서 난 이렇게 맨 끝이야?
나 이쁘다고 좋아 죽을 때는 언제고? 왜 갑자기 착한 척?
너무나 달라진 황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제가 여자라도 밝혔다면 어떻게 해서
든 유혹해 황비 자리라도 넘보았을 텐데 운이 안 따라 준다. 이러고 있는 제 처지가 한심하
고 초라해 보여 하루하루가 미칠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위인만 만난다
면 이 한 몸 바쳐 섬길 텐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니다. 누군가 있을 것이다.
리자의 두 눈은 점점 세모꼴로 뾰족해지고 가뜩이나 삐뚤어진 심보는 더 비틀리고 있었다.
***
에무르의 서신을 지닌 전령이 갑작스레 쿠로의 저택을 방문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란
눈으로 에무르의 서신을 펼쳐 보았다.
[합동 작전을 지시하는 바이오. 대공은 지금 비어 있는 황궁을 차지하시오…]
이건 뭐야? 지시?
쿠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전에 약속하지 않은 계획을 갑자기 이리 전하면 어쩌라고. 게
다가 지시? 마치 자신이 에무르 아래에 놓인 듯 명령을 받은 것만 같아 기분이 더러워졌
다.
[이미 출정을 했을 테니 거기 황궁은 거의 비어 있는 거나 다름없소. 우리가 침공하는 시기
를 한 달 앞당기려 하오.]
앞당겨?
누가 제 맘대로 바꾸라 했어? 주도권은 나한테 있단 말이다.
에무르 쪽에서 통수권을 쥔 듯이 굴고 있어 엄청 열이 받았다.
로카 왕국이 서두르는 거라면 부유한 펠론국이 무지 탐나는 것이겠고 에무르가 서두르는
거라면 벨리타를 차지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한 거겠지.
의논 한마디 없이 함부로 계획을 바꾸는 작태가 그를 배알 꼴리게 만들었다.
[우리가 공격할 때, 황궁을 점령하면 일이 더 수월해질 것이오. 난공불락 유클로 왕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테니 후방으로 군사를 보낼 여력도 없을 것이오. 전쟁에서 패하
게 되면 칼리크는 황궁도 빼앗긴 이름뿐인 황제일 뿐. 우리가 가서 나머지를 처리할 테니
대공은 때를 맞춰 황궁을 차지하시오.]
이건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다. 시기가 앞당겨진다는데. 다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꼴이
싫은 것이었다.
황궁을 차지해 버리면 전쟁 중인 칼리크의 귀에 들어갈 테고 내전이 일어난 사실에 영향
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가 알겠나. 그 충격으로 펄펄 날뛰다가 거기서 죽을지. 뭐
그래 주면 더 깔끔하고 고마운 일이 되는 셈이다.
그래. 이건 좋은 계획이다.
좀 미리 차지하는 것뿐. 계획한 대로 되고 있다. 그것도 더 빨리 황궁에 입성할 수 있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벌써 황궁을 차지하고 황제 자리에 앉은 것처럼 온몸이 희열로 떨려
왔다.
황제.
드디어 그 자리에 앉는다. 꿈에 그리던 그 자리를 더 빨리 차지하게 된다.
폭주하는 희열로 들썩거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다. 진정하자.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쿠로는 서둘러 마통단 세 공작과 만나는 은신처로 달려갔다.
***
“산티노 공작은?”
세 공작을 다 불렀는데 산티노 공작이 보이지 않아 대뜸 그것부터 물었다. 그러자 두 공작
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왜 저희한테 묻습니까?”
“어디 갔겠죠.”
“이리 급하게 부르시는데 저희나 되니까 달려오지요.”
여전히 자신들은 치켜세우고 나머지 하나는 깎아내리는 그들의 말투가 신물이 났다. 게다
가 불만이 가득한 태도로 시건방지게 나오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
었다. 살살 달래 줘야 할 때다.
“하하하. 내가 지난번에는 큰 실례를 했습니다. 신수가 커졌는지 속이 매우 좋지 않았지요.
이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신수가 커지면 적응하느라 제 몸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을요.”
신수가 커졌다고 들먹거리며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각인시키자 두 공작은 이내 표정을
풀고는 다시 충성스러운 개처럼 굴었다.
“그렇게나 커졌습니까?”
“그것도 모르고 서운해한 저희가 송구스럽습니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몸에 좋은 걸 보내 드리겠습니다.”
신수가 커졌다는 건, 몸이 적응하지 못할 정도로 커졌다는 건 황제 자리에 더 확고하게 오
를 수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그러니 순식간에 이렇게 변해 온갖 아부를 다 떠는 거고.
지난번 무례했음을 사과함과 동시에 자신의 위상을 더 높인 쿠로는 속으로 지극히 만족스
러웠다. 역시 달변가다운 처세술이었다. 혼자 자화자찬을 하며 쿠로는 그들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사병을요?”
세 공작들의 사병들을 다 모아 달라고 하자 놀라긴 했나 보다. 쿠로는 앞으로의 계획을 말
했다. 자신에게 줄을 선 지방 귀족들까지 모두 끌어들여야 한다. 지시가 떨어지면 바로 움
직일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 연락을 취해야 한다. 이 또한 이 두 공작이 나서
서 다 할 것이다.
“대공님. 황도 성문이 굳게 닫혀 있을 텐데, 황궁 침입까지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쉽지만은 않다. 이번에는 그 빌어먹을 놈이 2사단까지 동원해 황궁 수비를 맡겼으니
더 그렇다. 하지만 황후를 노린다. 자신이 몰래 땅굴로 먼저 들어가 황후를 인질로 삼은 뒤
황궁 문을 열게 만들 것이다. 그때 황도로 입성한 병력이 황궁 안으로 밀고 들어오면 끝난
다.
“지금이 나를 위해 큰 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입니다.”
두 공작은 바로 알아들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없는 산티노 공작이 불쌍할 뿐이었
다. 이렇게 되면 경쟁자는 두 사람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내가 그런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잊겠습니까?”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벌써 두 공작의 눈빛은 너무나 반짝거렸
다. 자기가 더 많은 공을 세우기 위해 지금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것이 뻔히 보였다. 아주
좋은 현상이다. 흡족했다.
그나저나 산티노 공작은 어디 갔나. 그의 사병들이 실력 좋기로 소문이 났는데. 지금 절실
히 그들이 필요했다.
산티노 공작이 나타나지 않아 좋아하는 두 공작과는 달리 쿠로는 뭔가 냄새가 났다. 직접
찾아가 봐야겠다. 쿠로는 서둘러 산티노 공작저로 향했다. 물론 베를루스 공작과 옌슨 공
작을 치켜올려 주는 수고로움을 잊지 않았다. 살살 긁어 주면 뭐든지 갖다 바칠 그들은 아
직 이용 가치가 있었다. 일이 수월하게 풀려 가니 쿠로의 기분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산티노 공작저 앞에서 기분이 팍 상해 버렸다.
에이. 도대체 왜 이리 일찍 돌아간 것이야!
문 앞에서 하인이 이틀 전에 이미 산티노 공작이 영지로 떠났기 때문에 이 저택 안에는 없
음을 알려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 떠난 건지, 정말 영지로 돌아간 것인지, 혹 다른 곳으로 간 건 아닌지 아
무리 자세히 물어도 별다른 정보를 듣지 못했다. 그냥 마차를 타고 떠났다는 말만 할 뿐이
었다.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이 하인은 주인을 위해 충성심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느껴졌
다. 자신의 빌어먹을 하인들보다 훨씬 낫다.
별 소득 없이 발길을 돌리는 쿠로는 마음이 급해졌다. 산티노 공작의 사병이 꼭 필요하니
돌아간 영지로 바로 전령을 보내야겠다.
그런데 말이다. 그의 촉이 말해 준다. 산티노가 영지로 과연 돌아갔을까? 다른 곳에 간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결코 자신에게 좋은 일은 아니다. 흠…….
뭔가 배신의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속히 조사해 볼 문제였다. 설마. 죽으려고 환장하지
않고서야 그런 일을 벌일까. 그래도 계속해서 찜찜해하는 쿠로였다.
그런 쿠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하인은 충성심 때문에 입을 다물었던 것이 아니었다.
웬일인지 주인이 돈을 두둑하게 주며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하며 주는 돈을 얼른 챙겼다.
마치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이 공작저가 텅 비게 짐마차 세 대에 물건을 바리바리 채
우고 떠났다는 것도, 아무도 보지 못하게 새벽에 몰래 떠났다는 것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돈 받은 값은 하는 하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쿠로는 의심만 가득 안고 사납게 화풀이하듯 마차 문을 거칠게 쾅 닫아
버렸다.
***
에단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이 작자가 왜 여기 나타난 건지, 또 이런 정보는
어찌 다 알아내서 이곳에 온 것인지 여간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나를 믿지 못하는 건 이해하네. 하지만 내가 가져온 물건들은 여기서 꼭 필요한 것 아닌
가?”
맞다. 산에 있는 나무들은 쓸만한 것이 거의 없어 목재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 남자가 가
지고 온 물건들은 지금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목재뿐 아니라 이 나라에서 손꼽히
는 기술자까지 대동하고 왔다.
낭떠러지 위에서 거리를 두고 빙 둘러 방어벽을 높이 치려고 하는데 두껍고 단단한 목재
가 많이 부족했다. 황후마마에게 받은 돈은 넉넉한데 문제는 에단의 위치에서 그 목재들을
귀족한테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전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이자를 바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저 목재들과 기술자들은 꼭 필요했다.
인상이 좋지 않은 것이 에단의 의심을 더 부채질했다.
“우리 산티노 가문이 원래 토목 공사로 유명한 건 알고 있겠지요?”
저 거드름 피우는 태도도 거슬려 절대 한편이 되고 싶지 않은 부류였다.
산티노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모두 다 절실히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
런데 이만한 사람이 겨우 이런 곳에 온 것이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