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환장할 판
협곡을 가운데 두고 절벽을 따라 지어진 낮은 성벽 안쪽에 완전무장한 적군들이 새까맣게
포진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나팔 신호 소리에 이어 분주한 움직임이 멀리서도 보
일 정도였다.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나팔 소리에 날이 팽팽하게 선 긴장감이 맴돌았다.
협곡을 앞에 두고 황량한 대지에 잠시 멈추었던 칼리크의 대군이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칼
같이 지키고 서 있던 대열을 벗어나 사령관들의 지시에 따르기 시작했다.
유클로 군이 불어 대는 나팔 소리는 더 요란해지며 소란스러워졌다. 카르탄 군이 진군하던
걸 멈추고 서 있다 갑자기 대열이 흩어지자 전쟁을 시작하려 한다는 걸 직감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모든 군사들이 일제히 공격 자세를 취했다.
즉각 전투 태세로 돌입했다. 성벽 위까지 개미 떼처럼 새까맣게 배치된 군사들이 화살을
조준하며 모두가 전쟁이 시작되기만을 숨죽인 채 기다렸다. 활시위를 한껏 잡아당긴 채로
대기하고 있는 군사들은 그 상태를 유지하느라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숨죽인 시간이 흘렀다.
자꾸 흘렀다.
계속해서 흘러만 갔다.
카르탄 대군이 바로 협곡 안으로 쳐들어오지 않고 있자 유클로 군사들은 힘이 조금씩 빠
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활을 들고 있는 군사들의 팔이 흔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들
었다. 한껏 팽팽하게 잡아당긴 활시위가 점점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진 성곽에서는 유클로 군 사령관이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아 주의 깊게 동태를 파
악하기 바빴다.
저것들이 뭐 하는 거지?
얼른 협곡으로 쳐들어오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것인지 황당했다. 이쪽에 진을 빼려는 전술
인가 싶어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모든 군사들과 함께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자니 점점
황당을 넘어서 환장할 판이었다.
100만 대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사 100만 대군
이 쳐들어온다 해도 이 협곡을 통과하기란 어림도 없다. 이곳에서 다 몰살당할 것이다. 그
런데 저들이 협곡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환장할 수밖에. 그렇다고 먼저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조금 전, 사령관은 저 멀리 보이는 대군이 정말로 100만 대군인지 확인하고자 했다. 생각
보다 적은 듯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순간, 카르탄 군의 대열이 흐트러지고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해 더더욱 가늠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의심이 들어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이번에는 연기까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바람
에 더 파악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웬 연기? 영문을 몰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던 사령관은 주변 군사들과
같이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냄새를 맡자마자 미간이 확 구겨졌다.
고…기?
왜 고기 냄새가?
그럼 저 연기들이 다 고기를 굽는 거다?
하!
가까운 성곽까지 그 기가 막힌 냄새가 퍼질 정도로 자욱하게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저
것들이 미쳤나. 적과 바로 코앞에 대치하고 있으면서 고기를 구워 먹어?
잔뜩 힘주고 전투 태세를 유지하고 있던 군사들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멈추
고 한동안 ‘뭐지? 뭐지?’ 물결이 일듯 모든 군사들의 입에서 죄다 터져 나왔다.
칼리크의 대군이 둥글게 대열을 새로 만들자 바로 물자들이 나누어졌다. 유클로 군은 그
물자들만 보고도 입을 쩍 벌렸다.
대군 사이로 수많은 짐마차들이 빽빽이 들어차는 걸 보고는 얼마나 카르탄 제국이 강대국
이며 부유한 나라인지 직접 눈으로 실감했다.
거기까지도 놀라운데 그들이 이 상황에서 식사 준비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점심 먹을
시간은 되었지만 지금 놀러 왔냐? 전쟁 중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적을 눈앞에 두고.
전쟁이 장난인 줄 아나.
사령관은 부글부글 끓어올라 우리 속에 갇힌 사자마냥 왔다 갔다 안절부절못했다. 이 와중
에 식사부터 한다고? 사람 돌겠네.
저 어마어마한 대군을 몰고 와서 저러고 있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사령관은 불같은 성격에 그 자리에서 펄펄 뛰고 있었다.
아니다. 카르탄 황제가 누구더냐. 무시무시하기로 유명한 황제다. 거기에 모든 전쟁을 승
리로 이끈 장본인이다. 그러니 이건 전술이다. 정확히 읽어 내야 한다.
카르탄 군대가 신나게 식사하는 걸 바라보는 유클로 쪽은 그래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협곡에는 여전히 살벌한 기운이 맴돌았다.
칼리크는 신속하게 만들어진 파오 안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투명한 채로 한 바
퀴 돌고 온 호랑이 신수를 통해 볼 것은 다 보았다.
이제는 호랑이 신수의 눈을 통해 그도 같이 볼 수 있었다. 속이 바짝바짝 타는 사령관부터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눈에 한껏 긴장과 두려움을 보이는 군사들까지 다 훑어보았다. 저러
다간 곧 지치겠네. 우린 아직 움직일 생각이 없으니 말이다. 여기서 안톤의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니까.
좀 쉬면서 대비를 해도 되겠다. 전쟁에 나와서 이렇게 쉬어 보기도 처음이었다. 완벽한 작
전과 인재들로 이런 호사까지 누려 본다.
둥둥.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전쟁도 있다니. 든든함과 여유
로움마저 있으니 전쟁을 즐긴다는 말이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이리라. 그의 귀에 들려오는
북소리가 점점 경쾌해지기 시작했다.
유클로 쪽 사령관은 머리털을 쥐어뜯고 싶어졌다. 군사들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군사들이 진군할 때 들려오는 북소리인가 싶어 한껏 긴장하며 동태를 살피고 있는데 여기
저기서 북소리가 가세하며 점점 흥겨워지고 있었다.
이곳이 전쟁터가 아니라 축제의 장인 줄 착각할 정도로 경쾌한 북소리에 유클로 쪽은 혼
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것이 작전인가? 사령관은 이것이 적의 교란 작전이니 휘말리지 말고 경계를 늦추지 말
라 명했다.
카르탄 군의 북소리가 점점 흥겹게 울려 퍼질수록,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메아리칠수록
유클로 군의 혼란은 점점 가중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지치고 힘이 빠졌다. 오늘은 안 쳐들어오고 저기서 놀고
있으려나? 언제 쳐들어오려나? 이러다간 우리 쪽에서 지쳐 쓰러지겠네. 이것이 작전인가?
기가 막히다는 말들이 그들 사이에서 오고 갔다. 초조해서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그날 밤
이 환장할 만큼 느리게 지나갔다.
***
다음 날이 밝았다.
유클로 쪽은 밤새 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날이 밝자 온몸에 힘이 다 빠져 버렸다. 날이
밝아도 경계심은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을 더 미치게 했다.
적의 동태를 예민하게 주시하느라 숨 쉬는 공기마저 팽팽하게 날이 서 있어 아주 죽을 맛
이었다. 그 칼날 같은 공기 속에서 저 빌어먹을 카르탄 군은 다시 고기 수프 끓이는 냄새를
풀풀 풍기더니 아침까지 잘 챙겨 먹고 있었다. 자신들은 나눠 주는 보급 음식을 서서 겨우
후다닥먹었는데 저것들은 아주 잔치를 벌이고 있다.
저러다 돼지 한 마리 통째로 꽂아 불 위에서 돌리는 거 아닌가 싶었다.
허걱. 그렇게 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통째로 돌리며 굽고 있는 저것은 분명 돼지 한 마리였다. 저건 군대가 아니여.
미친놈 집단이지. 미쳐도 단단히 미친 놈들이었다.
하지만 미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배불리 잘 먹고나 미쳤지 여기는 잘 먹지
도, 자지도 못하고 심리적으로 고문까지 당하며 미쳐 가고 있다. 차라리 저렇게 먹고 미치
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저들 분위기를 보아하니 오늘 전투를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런데도 경계심을 늦출 수
없으니 안 미치려야 안 미칠 수 없었다. 오늘도 이런 식으로 지나갈 거라는 생각에 유클로
군은 벌써부터 주저앉고 싶어졌다.
몇 시간이 흐르고 칼리크는 통돼지 구이를 즐기는 군사들을 둘러보며 자신도 맛보았다. 맛
있다. 곧 함락시킬 유클로 왕국 성곽을 바라보며 뜯는 고기 맛이 아주 그만이었다.
아직 적들은 더 고생해야 한다. 안톤 군단과 시간을 맞추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빠르면 며
칠 후, 안톤 군단에 의해 유클로 왕국의 허리 부분을 치고 들어갈 것이다. 이곳으로 그 소
식이 전해지려면 또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린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벨리타는 뭐 하고 있으려나. 잘 지내고 있어야 할 텐데.
시간을 낚고 있는 칼리크는 어느새 벨리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
벨리타는 오늘도 오랜 시간 황궁 안을 산책하고 있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는 그녀의 뒤를 시녀들이 따라갔다. 시녀들은 어서 빨리 전쟁이 끝나 대
군이 무사히 귀환하기를 염원했다. 하지만 맨 끝에서 마지못해 걷고 있는 리자만은 달랐
다. 얼굴에 쓰여 있었다. 마지못해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리자를 살피기 위해 그녀 앞에서 걷고 있다 뒤돌아본 유모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조금 전, 최근 들어 눈에 잘 띄지 않는 리자를 찾으러 황후궁 안을 싹 다 뒤졌다. 황후마마
시녀인데 코빼기도 안 보이는 날이 여러 날 되었고 나오더라도 삐죽 얼굴만 내밀고는 또
사라지기 일쑤였다. 버르장머리를 고쳐 놔야지 싶어 찾아다녔다.
“리자. 왜 이런데 숨어 있지?”
미로같이 생긴 정원 숲에서 아예 깔개까지 깔고 피크닉을 혼자 즐기고 있는 리자를 발견
한 유모는 날카롭게 질책했다.
“숨어 있다니요? 좀 쉬고 있는 거예요.”
“뭘 했다고 쉬어?”
유모의 꾸중에도 리자는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으로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
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서 따라와. 얼른.”
“뭐 하러요? 날 찾기나 하세요? 내가 안 보이는 것도 마마님은 모르실걸요?”
사실이다. 아니 알지만, 굳이 찾지는 않으셨다. 그렇다고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앉
아서 움직이지도 않아?
“따라오라 했다.”
이럴 때 유모의 얼굴은 꽤 무서웠다. 시녀들을 어설프게 통솔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유
모가 싸늘하게 쳐다보면 시녀들은 꼬리를 내리곤 했었다. 리자 역시 못마땅하다는 한숨만
내쉴 뿐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따라오더니 제일 끝에 서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샐쭉대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