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과거는 과거일 뿐
대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럼 그렇지.
“뭐 하려고요?”
당황하는 대사의 표정에 다시 한번 확신을 했다. 잊을 만하면 터지고 이러니 환장하겠다.
그러면서도 식상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저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공손한 말투에 묘한 분위기를 얹으니 기괴하게 들렸다.
“여기서 주시지요.”
뭐 하러 움직이나. 아무리 예전 벨리타가 정신 나가게 굴었다고 해도 이 대사 역시 미친놈
이다. 황제가 출정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게….”
슬쩍 자신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이런 행태도 익숙하다. 아니 지겹다.
“마마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선물은 제 바지 속에 있습니다.”
일 없습니다.
벨리타는 시선을 내려, 앉아 있는 그의 바지께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불룩하게 튀
어나온 그 부분이 심히 거슬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차가운 홍차를 정확히 그곳에 들이부어 버렸다.
얼음까지 우수수 그의 다리 사이로 몽땅 부어졌다.
으악.
놀라 펄쩍 뛰며 일어난 대사가 믿기 어려워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식혀.”
고작 그 몇 개의 얼음으로 얼어붙었을 리 없건만 대사는 말 그대로 완전히 굳어 버렸다. 이
럴 줄 몰랐겠지.
“앞으로 정신 차리고 살아. 아니면 국왕 전하께 전령을 보내겠다.”
마치 그 자리에서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대사를 뒤로하고 그녀는 자리를 떴다.
계속 정신 못 차리면 저 대사를 자르라고 하든가 해야겠다. 하도 많이 당한 일이라 놀라거
나 겁나지도 않았다. 이제는 대처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무던해졌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 이 현재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
벨리타는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을 이끌고 너무나 당당한 발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갔다.
***
오후가 되자 에단에게 보낸 기사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에단이 보낸 편지를 전해 주었다.
오늘은 편지를 실컷 읽는 날인가 보다.
이제는 에단과의 일을 비밀로 할 이유가 없어졌다. 기사들을 보낸 시점에서 데인 대공이나
기사단장이 알게 될 일이었다. 그들이 돌아오면 자세히 보고할 것이고. 에단의 정체나 무
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려진다 해도 이제는 자신의 뜻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
래서 투명하게 하기로 했다.
벨리타는 궁금한 마음에 편지를 펼쳐 들었다. 글씨도 정갈하니 에단의 올곧은 성품이 엿보
였다. 안부와 감사의 인사투성이였다. 게다가 황제에 대한 경외감까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 구절이 재미있었다. 이게 이렇게 되는 건가? 에단도 참….
[……우리 자칼단은 황제 폐하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선견지명이 있었나 봅니다. 자
칼단의 뜻을 새로이 정했습니다.
자. 자랑스러운
칼. 칼리크 황제 폐하를 위해
단. 단합한 자들.]
자칼단이 원래 이런 뜻이 아니었는데.
에단에 대해서는 걱정을 줄여도 될 것 같았다. 처음 지시한 대로 잘해 주고 있고 뜻하는 대
로 변화하고 있다.
벨리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편지를 곱게 접었다.
***
데인은 에단에게 갔다 온 기사단에게 보고를 받았다. 황후가 공식적으로 기사단을 보냈다
는 건 투명하게 활동을 공개한다는 의미였다. 그들의 보고를 받은 뒤, 데인은 고개를 끄덕
였다. 그 주변까지 잘 살피고 오라 명했던 터라 상세하게 보고받을 수 있었다.
에단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 좋은 일들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나타나고 그 주변 영지까
지 더 안정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두건을 쓴 이들이 나타나 악덕 업주들과 마을에 숨은
악을 손봐 주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그들이 자칼단일 확률이 높다.
또한, 그들이 황제를 위한 조직임을 밝혔다 한다. 그곳에서 자칼단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
이 없을 정도라 한다.
황후가 이런 일까지 할 줄이야. 지방 곳곳 세세한 부분까지 중앙에서 다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 부분을 그들이 하고 있다.
이런 경우라면 묵인한다. 그것도 황후의 명 아래 움직이는 자들이다. 어떻게 이런 자들을
알고 일찌감치 그런 곳에 포진해 둔 것인지 황후를 여전히 따라가지 못하겠다.
오아시스를 비롯해 이번 일로 확실히 밝혀졌다. 황후가 아주 유능한 지략가라는 것이. 지
혜롭다. 현명하다. 큰 그림을 그린다. 황후가 이런 능력까지 갖추었다는 건 나라를 위해, 황
제를 위해 더할 나위 없다.
또 하나 황후의 큰 그림이 이것만이 아닌 것 같아 그것이 더한 궁금증을 자아냈다. 가장 바
다 쪽으로 돌출한 그 마을을 선택했다는 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보고받은 바로는 원래 일부 낭떠러지로 되어 있는 곳이 아닌, 산으로 되어 있는 곳까지 깎
아 아예 그 마을 주변을 낭떠러지로 둘러싸게 만들고 있다 한다.
그리고는 계단을 여러 개 만든다고 하니 그 높은 낭떠러지를 올라오는 유일한 방법은 계
단뿐이다. 왜? 계단으로 마을 사람들은 무척이나 편리해졌지만 그다지 외부 왕래도 없는
그곳에 왜 그런 공사를 했을까.
계단만 만들었다고 하면 모르겠는데 왜 멀쩡한 산 한쪽 면까지 깎아 낭떠러지로 만들었냐
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계단 공사와 마을 정비를 위함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닌 듯했
다.
그렇다면 하나다. 해상으로 침범할지도 모르는 적들을 미리 방어하는 것. 그 적은 로카 왕
국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로카 왕국 쪽에서 별다른 이상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지만 이렇게 만약을 위해
미리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이번 일은 권장할 만하다.
이번 유클로와의 전쟁은 빨리 끝날 것이라 확신한다. 혹, 그들이 움직임을 보여도 폐하가
돌아오셔서 대비해도 늦지 않지만, 황후가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는 건….
염문을 뿌렸던 에무르 왕자에게서 무슨 정보를 들었을 가능성도 크다. 에무르…… 이 왕자
와의 일은 과거니까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 달라진 황후를 믿는다.
혹시 모르니 로카 왕국 쪽을 예의 주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출정식에 사절단으로 온 모든 사람들도 황궁에서 떠났고 정문도 굳게 닫았다. 자신과 부기
사단장은 이 황궁을 지켜야 한다. 특히 황후를. 만전을 기해야 한다. 혹시 모를 위험은 모
두 대비해야 한다.
다시 한번 황후에게 감탄하며 황궁의 경비를 맡은 부기사단장을 만나러 나섰다.
***
오래간만에 만났으면서도 바쁘다며 이내 자리를 뜨는 쿠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 공작
은 한결같이 얼굴을 찌푸렸다.
“구린 냄새가 납니다.”
“자꾸 우리를 피하는 느낌은 저만 느낀 게 아니군요.”
“혹, 우리 말고 다른 자들과 손잡은 건 아니겠죠?”
“그런 낌새는 아직 없습니다.”
“그럼 왜 이러실까? 저분이.”
각자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쿠로 대공의 신수가 뜸한 것도 신경 쓰이고 이 모임에서 한발 빼려는 듯한 태도도 거슬렸
다. 이러면 안 되지. 우릴 뭘로 보고. 아직 황제가 된 것도 아니면서 우리한테 섭하게 하면
큰코다치지.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같이 합심하여 떠들고는 있으나 산티노 공작은 따로 짚이는 데가 있었다. 정보력 하나만은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
이 나라 안에서는 저희들과 가까운 귀족들 말고는 쿠로 대공과 손잡은 세력이 없다. 하지
만 나라 밖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이 누구인지도 가늠된다.
지하 비밀 통로를 가르쳐 준 뒤, 에무르 왕자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자가 없다 하니 뻔
하다. 어디로 탈출시켰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러니 지금 대공이 저리 뻣뻣하게 나오는
것도 저 뒤에 에무르 왕자, 나아가 로카 왕국이 있다는 소리다.
확실한 끈을 잡고 있다 자부했는데 점점 확신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출정한 황제가 승리
라도 한다면, 또 신수가 발현되어 황제 자리를 굳힌다면 큰일이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
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처음에는 콧방귀를 뀌며 쿠로 대공이 황제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지금은 그것도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대공 역시 마음이 떠나 보였다. 그가 황제가 되더라도 대공 자리가 자신의 손에 떨어진다
는 보장이 없다. 저렇게 의리 없는 놈일 줄이야. 이러다간 헛지랄한 것이 된다. 혼자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뜻대로 되지 않았을 시 이들 중 자신이 가장 위험에 처한다. 이들이야 황제의 노여움을 사
도 하사받은 영지나 몰수당하고 더 외진 조그만 영지로 쫓겨나기나 할 것이다. 하지만 자
신은 아니다. 땅굴, 에무르, 쿠로와 연결이 되어 있다. 잘못하면 몰살이다.
어떻게 해야 가장 득이 되는 행동일까 가늠하느라 산티노 공작의 머릿속은 바삐 움직였다.
***
쿠로는 제 속내가 다 들통이 난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잘난 저런 것들의 심정까지 헤
아려 줄 만큼 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 대어인 에무르와 손을 잡았으니 저
것들은 이젠 하찮아졌다. 어차피 저들은 자신이 아니면 기댈 곳도 없다. 혹 서운하게 여겨
도 또 살살 긁어 주면 다시 충성을 다할 것들이다.
제 신수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한두 번 중요한 시기에 보여 주기만 하면 된다. 이번 전쟁에
서 쫄딱 망하고 돌아올 황제를 로카 왕국과 연계하여 처리하고 나면 그다음 황제가 거론
될 때 다시 한번 신수를 보여 주면 된다.
그러니 제 신수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 너무 머리가 아플 지경이
었는데 이러다간 황제가 되기도 전에 머리가 폭발해 죽을 것 같아 스스로 살길을 찾은 것
이다.
바쁜 척하며 저들에게서 벗어난 쿠로는 저택으로 돌아가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려고 마음
먹었다. 전쟁이야 황제가 하는 것이고 자신은 기회가 오기만 기다리면 된다.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오르며 쿠로는 벌써부터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
드디어 유클로 왕국으로 들어가는 협곡 근처에 다다랐다. 선대부터 국경 지대에서 약탈과
살생을 일삼던 놈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왔다.
광활한 대평원에 칼리크의 대군단은 진지를 빠르게 구축했다. 저 앞으로 협곡과 유클로 왕
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성곽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다시 정렬한 칼리크의 대군단은 협곡을 앞에 두고 진군을 멈추었다.